그들은 왜 '최순실의 령'을 거역하지 못했나

박종오 2017. 3. 1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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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지난달 8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연습실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문화 정책 진단’ 토론회. 전문가 토론 직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방청석에서 논쟁을 지켜보던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사무관이 신분을 밝히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 전문가는 “문체부가 ‘최순실 게이트’로 발칵 뒤집히면서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무척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반대 사례도 있다. 나라 밖이다. 올해 1월 환율 조작 문제로 미국 워싱턴DC를 찾은 기획재정부 관료는 미국 재무부 과장에게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전후해 동료 과장 3명이 사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부당한 지시를 받고 일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라고 했다. 이 관료는 “미국은 앞으로도 옷 벗는 공무원이 계속 나올 것 같다더라”며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씁쓸해했다.

△최순실 씨가 지난 17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출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정농단 사태로 발칵 뒤집혔던 관가가 요즘 다시 잠잠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조기 대선으로 관심이 급격히 옮겨가서다.

◇그 일을 겪고도…달라진 게 없다

문제는 이 일을 겪고도 공직사회에 달라진 것은 없다는 점이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종덕·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김종 전 문체부 차관 등 고위 공무원이 게이트에 엮여 줄줄이 구속됐다. 검찰·특검의 참고인 조사를 받은 현직 고위 관료도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 정만기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 정은보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전 금융위 부위원장) 등 결코 적지 않다.

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이나 상급자 지시에 누군가 “노(NO)”라고 했다면 최소한의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재단 설립도, 비선이 개입한 각종 정책도 일사천리였다. 고위 공무원부터 말단 사무관까지 손발이 맞은 결과다. 이런 폐단을 막자며 불붙는 듯했던 공직사회 개혁 논의는 대선 열풍에 밀려 없던 일이 될 판이다.

△공무원들이 지난 10일 정부 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 옥상을 걸어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다시 묻자. 한국의 공무원은 왜 미국 공무원처럼 소신 있게 행동하지 못했나. 왜 우리에게는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 명령에 반대한 샐리 예이츠 전 법무부 장관 대행, 재무부 과장들 같은 관료가 없을까.

◇韓 ‘폐쇄형 계급제’ 美 ‘개방형 직위분류제’

원인은 두 가지다. 개인의 자질이거나 제도다. 논해야 하는 것은 후자다. 개인 책임으로 돌릴 경우 좋은 사람을 가려 뽑는 것 외에 대안이 없어서다.

미국의 선례가 가능했던 것도 근본적으로는 제도적 차이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예컨대 미국 공무원이 상급자에게 치받을 수 있는 용기는 ‘여기 아니어도 갈 데가 많다’는 생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직업의 이동성이 높은 사회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민·관 이동이 자유로운 개방형 관료제도다. 공직은 평생직장이 아니다. 기재부 대외경제국 관계자는 “미국은 사회 이동성이 높고 지식 산업이 발달해 민간 싱크탱크 등 공무원이 옮길 자리가 많다”며 “집권 세력이 자기 성향에 안 맞는다고 관두는 등 정권 교체 때마다 공무원이 몇만 명 단위로 물갈이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관료 개인의 정책 권한이 크다는 것도 제 목소리를 내는 힘이다. 미국 공직은 사람부터 뽑고 일을 맡기는 게 아니라, 특정 일을 잘할 사람을 자리에 앉히는 ‘직위 분류제’가 뼈대다.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일하기보다 자리마다 고유의 의사 결정 권한이 뚜렷하다는 이야기다.

△미국 지역 일간지인 시카고 트리뷴 트위터에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해 시위를 벌이는 무슬림 소녀와 유대인 소년 사진이 캡쳐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중훈 한국행정연구원 행정관리연구부장은 “우리는 정치적으로 임용하는 정무직 공무원이 엄격한 의미로 중앙부처 장·차관 뿐이지만, 미국은 국·과장급까지 내려간다”며 “어차피 정권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므로 승진이나 인사 평가 등을 위해 상관 지시대로 따를 유인도 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은 다르다. 공직은 ‘폐쇄형 계급제’다. 5·7·9급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한 순간 관은 평생직장이다. 밖으로 나가면 모든 걸 잃는다는 생각이 강하다. 민·관 이동의 벽이 높아서다. 한 경제부처 차관보급 관료는 “미국은 공무원 개인이 가진 정책 권한이 커서 공직에 있는 동안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민간으로도 손쉽게 이동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한국은 개인의 영향력이 매우 미미해 조직을 벗어나면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조직 내부에서는 계급에 따라 직책과 대우가 달라지므로 상관 말에 순응하고 승진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긴다. 특히 국·실장급 고위 공무원단은 압박감이 더하다. 승진에서 밀리면 정년 이전에도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종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통령이 공무원 인사권 독점…복종은 의무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는 모든 부처 공무원이 장관을 보조하거나 보좌하게 돼 있고, 의사 결정을 하거나 입장을 내는 것도 장관만 가능하다”며 “이는 한국 공무원의 태도를 결정짓는 제도적 요인”이라고 말했다. 현행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복종의 의무(7장 57조)’를 아예 명시하고 있다.

대통령이 틀어쥔 인사권은 이런 상명하복 문화를 더 굳게 한다. 현재 5급 이상 공무원과 고위공무원단의 경우 장관 제청과 인사혁신처장 협의 등을 거쳐 대통령이 직접 임용한다.(국가공무원법 4장 32조) 박중훈 부장은 “미국은 공무원 채용과 임용 권한이 대부분 각 부처에 있지만, 우리는 대통령이 직접 임명권을 가지는 중앙집권화한 구조”라며 “대통령 영향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개인이 지시를 거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생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별검사 사무실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미국적인 제도가 무조건 정답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각 제도가 가진 장·단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은 공무원 한 명이 장기간에 걸쳐 여러 직무를 담당하므로 시야가 상대적으로 넓고 길 수 있다. 정책의 안정성이 높다는 얘기다. 미국 공직사회의 잦은 물갈이는 뒤집어 말하면 정책의 부침이 그만큼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시, 반드시 문서로…상명하복 문화 깨야”

대안은 결국 다시 제도다. 전문가들은 폐쇄형 계급제에서 개방형 직위 분류제로의 제도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본다. 이는 공직사회 반발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권마다 추진한 정책 방향이기도 하다.

박진 교수는 이에 더해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가 수자원공사 팔을 비틀어 4대강 사업을 추진했지만,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며 “기관 간 행정 행위는 전화나 비공식 경로가 아닌 공식 문서에 의하도록 명확히 명문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이 부당한 압력을 받았을 때 대응할 구실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그는 “특히 있는 제도조차 무시하는 상명하복 문화는 반드시 깨야 한다”면서 “이걸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창의와 혁신,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중훈 부장은 “공무원 재취업 제한은 퇴직 관료가 정부 산하기관이나 관련 협회에 낙하산으로 가 실제 민·관 유착이 벌어진 사례 등으로만 국한할 필요도 있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관피아’ 논란이 불거지며 강화한 취업 제한의 사전 규제적 성격을 완화해 공무원의 퇴로를 열어주자는 이야기다.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월 이른바 ‘영혼 없는 공무원 방지법’을 대표 발의했다. 국가공무원법에 ‘직무상 명령이 위법한 경우 복종에 거부해야 하고, 이로 인한 인사상 불이익 처분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새로 포함한 것이다.

공직사회의 자발적 변화가 불가피하리라는 시각도 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누구보다 값비싼 수업료를 치렀기 때문이다. 이른바 ‘학습효과’다. 강제상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전 한국인사행정학회장)는 “우리 사회는 상명하복이 명확하고 조직 전체가 몰려다니는 가족주의 문화여서 개인이 ‘노’라고 얘기하는 게 어려운 여건”이라면서도 “공직사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무엇이 잘못인지 학습하는 등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우리 사회에서 많이 회자된 개념이 있다. ‘악의 평범성’이다.

독일 태생의 유대계 미국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을 이렇게 정의했다. 아이히만은 명령에 순종한 ‘전형적인 공무원’이었다. 악의 평범함이라는 말은 사람은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악은 무시무시하거나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행위의 정도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이 개념이 한국에서도 거듭 사람들 입과 글에 올랐다는 것은 두 사회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닮음을 다름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대통령을 파면하는 초유의 일을 겪고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확하다.

박종오 (pjo22@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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