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국의 극우주의를 관통하는 '식민지 백성'의 무의식

2017. 3. 1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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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기의 '동맹'
[한겨레]
박근혜 탄핵반대 및 탄핵무효 집회 현장에 계속해서 나란히 등장하는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 태극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박근혜 탄핵 반대’와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박근혜’로 상징되는 한국의 극우주의가 미국의 극우주의, 그리고 ‘원조 선민’적 주체인 이스라엘과 상상적으로 동일시되는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가 나란히 등장한 탄핵 반대 집회 현장에선 ‘박근혜’로 상징되는 한국의 극우주의가 미국의 극우주의, 그리고 ‘원조 선민’적 주체인 이스라엘과 상상적으로 동일시됐다. 사진은 지난 1월14일에 있었던 서울광장의 구국기도회 한 장면. 유튜브 갈무리

두 나라의 국기가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은? 예를 들어 월드컵 축구경기 같은 걸 꼽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두 국기는 경기장에서 대결하는 양편을 각각 통합하는 기호다. 계층도 연령도 성(性)도 지역도 다르지만, 경기가 진행되는 순간만큼은 모두 하나로 뭉쳐 ‘우리나라’를 응원하자는 의미가 담겼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방식의 기억이 존재할 수도 있다. 내겐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나라를 찾은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을 환영하려 거리에서 그가 탄 자동차를 향해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흔들던 기억이 있다. 이때 태극기와 성조기는 동맹, 어른들의 표현에 따르면, ‘혈맹’의 기호일 수 있다. 나의 아버지 세대에겐 더욱 절절한 과거의 기억이다. 미국의 ‘도움’으로 ‘공산화’를 막아냈다는 기억. 즉, 이들 세대에게 미국은 ‘구원자’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우리 눈앞에 두 나라의 국기가 동시에 등장하는 생생한 현장이 있다. 바로 ‘태극기 집회’다.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두 가지 집단기억 중 후자를 내세운 행동이다. 문제는 그들 손에 들린 성조기가 ‘박근혜 탄핵’ 반대와는 과연 무슨 연관이 있느냐다. 왜 그들은 탄핵 반대 주장을 ‘태극기-성조기’라는 상징으로 전달하려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선 ‘국민 만들기’의 상징적 기표로서의 국기의 의미가 왜 박근혜 정부 들어 더욱 강화됐는지부터 먼저 살펴봐야 한다.

10만 청중 앞에서 영어로 기도하던 목사

2002년 월드컵. 전국 거리를 휩쓸었던 빨간 티셔츠와 태극기의 기억. 당시 빨간 티셔츠와 태극기는 거리 응원에 나선 국민 개개인을 한국인으로 호명하는 ‘국민의 아이콘’이었다. 그 무렵 나는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글로벌 시대에 전국을 하나의 색깔로 물들이고 국기를 흔들어대며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이곳에서 매일 잠들고 깨며, 매일 도로 위를 걷고, 일터로 출근하고 퇴근하며,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한국인과 생활패턴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하나의 국민 아이콘만으로 결속된 사회는 얼마나 생경하고 소외감을 줄 것인가? 또 그들에겐 이 상황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질 것인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것이다. 적어도 그때만 해도 내셔널리즘에 대한 이런 식의 급진적 문제제기들이 존재했다. 심지어 정부 내에서조차 ‘다문화성’ 운운하며 국민의 경계를 약화시키려는 논의가 왕성했다.

그로부터 십여년. 두 보수정권을 연달아 거치면서 정권이 주도하는 담론 지형은 외려 국민의 경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사실상 국민의 분열을 획책하는 쪽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광범위한 보수세력을 결속시켜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반대파는 고사하고라도 자신을 지지했던 절반의 보수주의적 국민조차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타인에겐 늘 법을 준수하라고 강요했다. ‘군림하는 자’였던 박근혜의 정치는 대체로 강성의 극우주의 기조를 띠었다. 박근혜식 정치에 동의하고 따르는 자는 ‘국민’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종북’ 혹은 ‘배신자’로 간주했다. 태극기가 날마다 거리 곳곳에 걸려 있던 박근혜 시대의 일상은, 이처럼 국민과 비국민을 가르는 박근혜식 극우주의 정치의 가릴 수 없는 증거다.

국민-비국민 가르기가 ‘내 편’, 나아가 ‘혈맹’에 집착하는 한국적 극우주의 형태로 ‘강화’되는 과정에서 성조기는 핵심 연결고리다. 잠시 2000년대 초를 떠올려보자. 그 무렵에도,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양분된 현재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집회가 대립적으로 양립했다. 두 시위의 화두는 ‘반미 대 친미’였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대형 성조기가 등장했다. 심지어 대표 기도자로 연단에 오른 한 개신교 목사는 영어로 기도를 했다. 주최 쪽 추산에 의하면 10만의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그중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는 많아야 채 5%도 안 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영어로 기도했다. 신은 영어로 말할 때 더 잘 알아들을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일까, 아니면 신은 ‘미국인’과 오버랩되는 존재로 상상되었던 것일까? 이처럼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 집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성조기란 태극기와 병행하는 것, 아니 실상은 태극기보다 우위에 있는 ‘상상적 초월자’다. 여기엔 일종의 식민지적 무의식이 작용한다. 여기엔 일종의 ‘미국=구원자’라는 믿음이 개입돼 있다. ‘미국 중심주의가 곧 우리의 축복’이라는 신탁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는 셈이다.

탄핵반대 집회 태극기는 국민분열의 기호
성조기는 반공의 나라 돕는 ‘우월한 혈맹’
이스라엘 국기엔 개신교 극우파 ‘선민’ 코드

3월1일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가 주최한 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망토처럼 두른 채 행진하고 있다. 정용일 <한겨레21> 기자 yongil@hani.co.kr

일상을 포획할수록 기억에선 외려 멀어져

얼핏 보기에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다. 탄핵 반대자, 아니 이젠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현재 상황은 미국이 아니라 ‘대통령’을 옹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들의 무의식 속엔 아무런 충돌이나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을 ‘압박’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종북’이며 ‘배신자들’(혹은 ‘유사종북’)이다. 자연스레 성조기는 또다시 ‘우월한 혈맹’의 기표로 작동한다. 온통 종북 혹은 유사종북 세력으로 둘러싸인 박근혜를, 그리고 박근혜가 표상하는 극우적 반공의 나라를 돕는 우월한 혈맹을, 마치 10년 전 10만명의 청중 앞에서 영어로 대표 기도 하던 목사처럼 성조기를 흔들며 갈구한다. 위기에 처한 대통령과 애국시민을 ‘도와주소서’라고. 이처럼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있는 손은 ‘이상한 손’이 아니라, 언젠가 본 듯한 ‘익숙한 손’이다. 그 손은 극우주의적 식민지 백성의 기도하는 손이다.

현실은 태극기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성조기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국기의 향연은, 역설적이게도 다수의 국민한테서 국기의 기억을 외려 흐릿하게 만들었다. 단지 ‘콘크리트 지지자들’, 아니 실은 그중의 아주 적은 일부만이 매일 거의 모든 장소에 걸려 있는 국기를 가슴 뜨겁게 응시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조차 실제로는 무관심하게 그 거리를, 거리의 태극기를 스쳐 지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태극기가 국민의 일상을 포획할수록 정작 국기에 대한 국민들의 기억은 외려 희미해지는 역설! 이제 태극기는 국민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박근혜 지지를 상징할 뿐인 아이콘으로 변질돼 갔다. 태극기 집회라는 한정된 공간 ‘외부’에서 태극기는 온전히 소거됐다.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다니는 걸 점점 더 께름칙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평생 국경일에 태극기 게양하는 일을 철칙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한 70대 노인은 올해 3·1절엔 그 철칙을 접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처럼 비치기 싫어서였단다. 가뜩이나 ‘국민 만들기’의 상징적 기표로서의 국기의 의미가 색이 바래고 있던 터에, 탄핵 반대자들의 볼썽사나운 태극기 퍼포먼스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서 태극기 혐오의 감정마저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셈이다.

그럼에도, 성조기에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한 태극기 집회 장면에선 한국의 극우주의가 식민지 백성의 무의식에 여전히 얼마나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일부 태극기 집회에선 다윗의 별이 중앙에 있고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상징하는 두 개의 선이 위아래로 그어진 이스라엘 국기마저 등장했다. 탄핵 반대 집회의 현장에.

이스라엘 국민이 아님에도 이스라엘 국기에서 탄핵 반대의 의미를 이끌어내려는 집단은 개신교의 극우적 근본주의자들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극우파 근본주의 목사인 조지프 와일드는 미국인이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가운데 하나인 므낫세 족속의 후손이라며, 타락해 원형성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나머지 부족들과 구별된 므낫세 족속과 미국인, 특히 백인 극우주의자들을 하나로 연결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연결되긴 하지만, 모든 이스라엘인과 모든 미국인이 아니라 ‘진실한’ 이스라엘인과 ‘진실한’ 미국인만이 하나의 계보로 엮인다는 강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보다 앞서 19세기 영국의 극우주의자들이 주장한 ‘브리티시 이스라엘리즘’의 상상적 세계관에 의하면, 에브라임 족속의 일파가 영국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에브라임과 브리티시 이스라엘리즘을 신봉하는 영국 극우주의자들을 하나의 계보로 엮는다.

글로벌 극우주의동맹을 지향

이런 유의 순혈주의적 믿음은 한국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최근 한국 개신교의 극우파들이 유독 선호하는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선민’이다. 즉, 한국인 중 선별돼 구원받은 이들은 ‘선민’으로서 이스라엘과 순혈성으로 연결된다는 믿음을 담은 용어다. 개신교 극우적 근본주의자들의 언어 속에서, 한국인 중 ‘선민’으로 선별된 이들은 ‘원조 선민’ 이스라엘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태극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하나의 코드로 엮일 수 있는 사고 속 장치는 바로 이것이다.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 국기. 결론적으로, 태극기 집회에 나란히 등장한 세가지 국기의 상징적 의미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바로 극우주의다. 무엇보다도 개신교 극우주의와 친화적인 코드다. ‘박근혜’로 상징되는 한국의 극우주의가 미국의 극우주의, 그리고 ‘원조 선민’적 주체인 이스라엘과 상상적으로 동일시되는, 속성상 수직적이고 식민지적인 동일시 과정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식민지적 극우주의는 ‘박근혜’라는 기호로 표상되며, 반공산주의·반동성애·반이슬람이라는 정치적 어젠다로 묶인 글로벌 극우주의동맹을 지향한다. ‘박근혜 탄핵 반대(무효)’의 구호는 세 가지로 열거한 ‘적’을 멸절시키는 극우주의동맹을 선언하는 외침이다. 또한 이 외침에는 극우주의동맹을 지향하는 주력부대가 바로 개신교 극우주의라는 사실이 암시돼 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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