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박근혜 파면된 날, 김재규 묘에 시바스리갈 놓인 까닭

김민욱 입력 2017. 3. 16. 15:57 수정 2017. 3. 1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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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박정희 시해 때 안가서 마신 술
박근혜 탄핵 후 묘소 찾는 발길 늘어
'내란목적살인죄서 재평가' 움직임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묘소모습. 김민욱기자
지난 14일 오후 기자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의 E공원묘원을 찾아갔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 독재자'로 불리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한 김재규(1926~1980)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의 묘가 있는 곳이다. 김 부장은 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면서 나흘 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죄명은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미수죄였다.

김 부장은 박정희의 고향(경북 구미) 후배이자 육사 동기(2기)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신정권의 핵심 인물에서 박정희 저격 이후 ‘대역죄인’으로 낙인 찍혔다. 김 부장의 묘는 일부러 숨겨 놓은 것처럼 공원묘원의 정상 부근(해발 380여m) 깊숙한 곳에 조성돼 있었다. 주변에 심어진 소나무에 가려져 입구 쪽에서 묘소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묘소는 가파른 경사길을 걸어 올라가야 다다를 수 있었다. 2013년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를 낸 문영심 작가는 이 길을 “예수가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메고 죽으러 올라가는 골고다 언덕을 닮았다”고 썼다. 김 부장은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에 화장 처리돼 이 길을 올랐다. 워낙 가팔라 성인들도 중간중간에 숨을 돌렸다 올라가야 할 정도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봉분 앞 상석 위에 놓인 시바스리갈 등. 김민욱기자
이처럼 참배가 쉽지 않은 묘소이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직후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봉분 앞 상돌 위에는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결정한 지난 10일에 발행된 석간신문들이 놓여 있었다. 이들 신문은 일제히 1면 머리기사로 '대통령 박근혜 파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묘소 앞에는 노란색과 흰색 국화 꽃다발 6개가 놓여 있었다. 김재규를 재조명한 『의사 김재규(김성태 작·매직하우스)』책과 헌법 등이 담긴 소법전도 보였다. ‘인치의 시대’였던 박정희와 박근혜 부녀 대통령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법치의 시대’가 왔다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읽혔다.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인 이재명 성남시장을 분석한 『이게 나라다』라는 책은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호남지역 재야인사들이 89년 건립한 김재규 부장의 묘 봉분 인근 추모비 오른쪽 측면에는 ‘종친 아재님 박근혜 파면됐어요. 대한민국 만세!’라고 적은 메모지도 붙어 있었다. 공원묘원 관계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예전에는 1년에 한 두 팀 정도 묘소를 방문했는데 최근 일주일에 두 세팀으로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봉분 앞에 놓여 있는 '시바스리갈'.
김 부장을 기리는 이들이 놓고 간 것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양주 ‘시바스 리갈’ 12년산이었다. 이 술은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마셨고 38년전 10월26일 저녁 청와대 인근 궁정동 비밀 안가에서 열린 '최후의 만찬'에서도 마신 술로 알려져 있다.

생전에 심한 간경화를 앓았던 김 부장은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를 저격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38년 전 10월26일 저녁 청와대 인근 궁정동 소행사장 테이블에 놓인 시바스 리갈을 마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부장 묘 상돌 위 시바스 리갈 양주병은 거의 비워진 상태였다. 대신 영정사진 앞 종이컵에는 이 술이 거의 가득 차 있었다.

1979년 11월 7일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중앙일보DB
앞서 지난해 12월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 온라인상에서 누군가 김 부장의 묘소 사진을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국정농단 핵심인물인 최순실(본명 최서원·구속기소·61·여)의 친부인 최태민의 비리, 최태민과 당시 큰 영애(박근혜)의 관계 등에 대해 김재규 부장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는 일화가 화제된 직후였다. 김 부장은 박정희 저격 이후 체포된 뒤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이 같은 내용을 일부 진술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9일 탄핵안의 국회 통과 이후 상석 위에는 시바스 리갈 3병이 올려져 있었는데 당시엔 모두 빈병이었다. 현재 술이 남은 시바스 리갈 병이 있다는 것은 최근 누군가 새로 가져다 놓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김 부장의 평전, 과거 신문기사 등을 종합해 보면 중정 안전국은 구국여성봉사단 총재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조사한다. 조사 결과 구국봉사단을 이용한 최태민의 부정행위에는 횡령 14건, 권력형 비리 13건, 이권개입 2건 등 다양했다. 김 부장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최태민을 직접 심문하지만 처발하지 않는다. 도리어 최태민을 구국봉사단 명예총재에, 박근혜를 총재에 각각 임명하는 선에서 사건을 봉합한다. 박정희가 김 부장의 직언을 듣고 최태민을 단죄했으면 이번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 부장의 1심 재판부터 변론을 맡은 안동일(77) 변호사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박정희가)그때 (박근혜와 최태민의)악연을 끊었어야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박정희의) 크나 큰 과오였다”고 지적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묘소 모습. 김민욱기자
일부 네티즌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이후 김 부장 묘소 사진을 적극 퍼나르고 있다. 이들은“이번 기회에 김재규 부장의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명예회복과 관련한 사업을 하기 위해 1000만원 모금운동을 한 모 포털사이트의 스토리펀딩은 지난달 1월 모금에 성공했다. 후원금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위원장 함세웅 신부)’ 등이 재평가를 위한 현대사콘서트를 열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데 쓰일 계획이다.

하지만 명예회복의 길은 아직 녹록치 않아 보인다. 80년 대법원 선고 이전부터 김 부장의 구명운동을 벌여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재야인사 등은 김재규 재평가 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문민정부(김영삼)는 물론 국민의 정부(김대중), 참여정부(노무현) 때도 내란목적살인죄를 벗지 못했다. 각 정부마다 정치적 셈법이 다르게 작용했고, 박정희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누구도 섣불리 나서길 꺼렸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박정희와 박근혜 부녀 대통령 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인 권위주의 개발독재, 하향식 통치, 민주주의와 인권 억누르기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및 파면으로 사실상 종식된 상황에서 김부장에 대한 새로운 평가 작업이 이제는 진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2004년 7월12일 김재규 부장의 부인 김영희(87)씨 명의로 행정자치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 민주화운동보상심의를 신청했다가 유족이 스스로 취하했다고 지원단 측이 밝혔다. 이와관련 안동일 변호사는 “당시 참여정부에서 김 부장에 대한 명예회복이 제대로 진행 되지 못했다. 명예회복을 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관계자는 “(김재규 부장의) 유족 외에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 신청자격이 없는데 지난번 취하한 이후 추가로 신청은 접수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동일 변호사에 따르면 김부장의 부인 김영희씨와 외동딸 수영(64)씨는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라고 한다.

김 부장의 추모비 중에 ‘의사(義士)’와 ‘장군(將軍)’이란 글자가 정으로 추정되는 도구로 훼손돼 있다. 박정희를 저격한 김 부장을 의사나 장군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세력들의 소행으로 보인다.

전두환 신군부의 서슬 퍼른 법정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역설한 김재규 부장. 박정희 시대의 종언을 이야기 하는 지금도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는 사실상 ‘금기(禁忌)’로 남아 있다. 경기도 광주=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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