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키운 아이들'을 잃었다

2017. 3. 1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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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지역에서 참사 피해 회복 지원하는 박성현 사무국장 인터뷰
“안산은 세월호 피해자들의 사회적 관계이고 삶의 터전이다”

세월호와 한국 사회
①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② 오지원 전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 지원 점검 과장③ 박성현 ‘우리함께’ 사무국장
<한겨레21>은 김승섭 고려대 교수와 함께 세월호 참사 피해자를 연구하고 치유해온 이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세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박성현 ‘우리함께’ 사무국장이다. 우리함께는 세월호 참사 이후 경기도 안산의 10개 복지관이 힘을 모아 만든 비영리단체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만나 상담하고, 지역사회가 참사 충격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우리함께 사무실은 세월호 참사로 형제자매를 잃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 국장은 2002년부터 사회복지사로 활동했고 지역사회 복지를 위해 2010년 안산으로 왔다. 지금은 상록장애인복지관 소속으로 우리함께에 파견돼 근무 중이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가 2월14일 밤 경기도 안산 우리함께 사무실에서 박 국장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정리했다. _편집자
박성현 ‘우리함께’ 사무국장이 2월14일 밤 경기도 안산의 사무실에서 김승섭 교수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지역 주민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어떤 의미였나.

안산은 아이들의 고향이다. 세월호 참사로 떠난 아이들 대부분이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리함께’ 사무실을 구할 때 부동산중개소 아주머니가 왜 집을 구하냐고 물었다. 오랫동안 쭈뼛거리다 답을 했다. 세월호 참사를 어렵고 불편한 일로 생각하는 주민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집을 구한 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유가족 형제자매를 지원하는 사무실을 열려 한다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했으면 좋겠다. 내가 단원고 앞에서 10년 넘게 부동산중개업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나고 자라는 걸 봤다. 아이들이 안 보이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이 아이가 배를 타고 갔구나.’ 그런 아이들을 위한 일 아니냐.” 세월호 희생 학생들은 지역 주민들이 눈으로 키운 아이들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눈으로 키운 사람들이 모인 곳, 희생자들과의 경험을 공유하는 곳이 바로 안산이다.

봉사하러 왔던 학생이 그 배를 탔다

참사 피해자들에게 지역사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역사회는 피해자들의 사회적 관계이고 삶의 터전이다. 떠난 아이들에겐 고향이다. 희생 학생들의 형제자매도 ‘일간베스트저장소’나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보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나 이웃에 사는 어른들이 건네는 말이 더 깊은 상처가 된다고 한다. 아이가 있었던 방을 보는 게 힘들어 이사 간 부모들도 다시 안산으로 오거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 세월호 참사 관련 활동이 대부분 안산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슬픔을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의 사회복지사들은 어떤 구실을 했나.

지역 사회복지사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큰 슬픔이었다. 복지관에 자원봉사를 하러 왔던 학생이 그 배를 타기도 했다. 사회복지사들이 피해자들과 직접적 인연도 있는 것이다. 안산에는 10개 복지관 소속 사회복지사 38명이 참가하는 지역사회협의체가 있는데 이곳에서부터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누구도 ‘노’(No)라고 하지 않았다.

참사 이후 중앙정부는 2014년 4월 통합재난심리지원단이란 것을 꾸렸다. 국립서울병원과 서울자살예방센터 등 외부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피해자를 돕기 위해 왔다. 외부 지원도 중요했지만 안산에서 꾸준히 장기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지역 사회복지사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역 사회복지사들은 피해자들이 어떤 직업 환경을 가지고 있는지, 아이들을 어떤 환경에서 키웠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더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사회복지사와 정신보건간호사, 통장 등이 3인 1조를 이뤄서 피해 가족들의 상황을 체크했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온 지원단은 피해 가족의 주소를 알아도 찾아가기 힘들다. 지리에 밝지 않으니까. 또 정작 피해자를 만나도 이야기를 이어나갈 소재가 없다. 안산은 공단 배후 도시이면서 자영업자가 많다는 지역 특성이 있다. 지역 사회복지사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쉬웠다.

슬픔은 계량되지 않는다

지역 사회복지사로 또 무슨 일을 했는가.

정부에서 식사 지원이 있었다. 부모들이 아이를 찾으려고 전남 진도 팽목항에 가 있으면 할머니, 할아버지, 세월호에 탄 학생들의 형제자매가 집에 남아 있게 된다. 돌볼 사람이 사라져 남은 가족들의 식사 지원이 필요했다.

정부는 이 문제를 기업 후원을 받은 즉석식품이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즉석식품은 몇 번 먹으면 쉽게 질렸고, 편의점 도시락은 배달 과정에서 반찬이 섞이거나 기온이 올라가면 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반찬은 지역사회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밥이야 가정에서 즉석밥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예산은 공공 영역에서 조달하고, 반찬은 지역 자활센터에서 만들었다. 배달비를 책정해 가정에 반찬을 전달하도록 했다. 각각의 자원을 연결해주는 ‘브리지’ 구실도 사회복지사의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또 다른 활동이 있었나.

세월호 참사 당시 피해자 가족들은 말하기를 꺼렸다.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어도 없다고만 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야 했다. 참사가 발생하고 2개월 정도 지난 뒤에야 처음 제대로 된 부탁을 해왔다. 사회복지사들이 피해자들의 욕구 조사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대책위를 만들어 운영할 때 각 피해자들의 세부 사항과 욕구를 알아야 하는데 자료가 없었다. 정부는 자료를 가지고 있겠지만 대책위 준비 가족들은 현황을 잘 몰랐다.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장애를 가진 동생이 있는지,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 등등. 250여 가족 중에 213 가정에 대한 현황을 파악해 카드를 만들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정부에 여러 요구를 했다. 그중 몇 가지는 받아들여졌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세월호 참사로 동생이 사망한 한 친구는 얼마 뒤 군대를 가야 했다. 군대를 안 가겠다는 게 아니라 입대 날짜만 연기해줄 수 없느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에서는 그냥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고만 대답했다. 지금 돌아보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과 기업이 피해자 지원을 논의하는 공동 테이블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해자들을 만날 때는 어땠나.

피해자들의 형제자매가 보통 병원에 상담하러 가면 의사가 “너는 지금 트라우마 상태고 2년 정도 약 먹으면서 나랑 상담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누군가 내 동생, 내 오빠를 잃은 슬픔을 해결하는 방법을 계량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내 슬픔이 2년짜리인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더 이상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한 사회복지사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다. 한 유가족이 너무 힘들어서 병원 정신과를 찾아갔다. 처음 찾아간 곳에서 엄청 두꺼운 질문지를 준 거다. 그걸 다 체크하면 의사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슬퍼서 미칠 것 같은 데 이걸 체크할 수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지를 던지고 나왔다. 두 번째 의사는 약을 한 움큼 주는데 어떤 약인지 설명도 안 해줬단다. 약을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만난 이가 사회복지사인데 그는 “슬픈 게 맞고 우는 게 맞다. 충분히 슬퍼하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중 유가족이 “선생님이랑 30분 이야기하니까 마음이 좀 풀린다”고 말한 것이다. 상담이나 약 처방이란 치료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유지하는 문제를 상대방과 공유할 수 있겠다는 신뢰가 약이나 상담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회복지사 양반 나 좀 도와줘”

2014년 4월27일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경기도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임시합동분향소에서 추모객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다. 안산은 세월호 참사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된 피해 지역인 동시에 슬픔과 분노를 극복하는 원천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한겨레 이정용 선임기자

피해자 심리 지원에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슬프거나 괴로울 때 충분히 울어야 한다. 그래야 치유로 가는 변곡점이 마련된다. 닫아두면 언젠가 터진다. 참사 직후 피해 학생들의 아버지를 찾아가면 “나는 괜찮으니 집사람과 남은 형제나 챙기라”고 말했다. 한국 아빠들에게 있는 ‘슈퍼맨 콤플렉스’다. 남자는 인생에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울어야 할 때 울지도 못했다. 눈빛은 죽어 있고 분명히 슬퍼 보이는데 괜찮다고 하는 거다.

그러다가 5개월 정도 지났을 때 상담이 끝나고 한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사회복지사 양반,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내가 이제 도저히 못 견디겠어. 정말 터질 것 같은데,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여기서 내가 울기 시작하면,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아. 나 좀 도와줘”라고 말했다.

지역사회 안에서 갈등은 없나.

2014년 7월쯤 서울에 나갔다가 놀랐다. 사람들이 웃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옷 색깔도 밝았다. 안산은 그때까지 모두 하얀색 아니면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분향소 행렬도 여전히 길었다. 안산이 고립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벌써 잊었다는 생각에 야속했다. “세월호는 이제 지겹다”고 말하는 주민 중에는 “실은 나도 2014년에 분향소 자원봉사도 했어. 그렇게 길게 슬퍼했는데 이렇게 힘겨웠던 것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참사 첫해에 지역 주민들이 추모를 위해 안산을 찾는 시민들을 맞이하는 상주 역할을 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의 슬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공동체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보니 참사 이후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 해결에 미숙하다는 것이다.

2016년 단원고 ‘기억 교실’ 이전 때도 당사자 간의 갈등을 반복해야 했다. 최근에는 추모공원 문제로 재건축조합과 갈등이 진행 중이다. 지역 주민들의 어려움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갈등을 적극 조율하는 행정력이 부재해 지역사회가 계속 상처받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2차 피해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들에 대한 공감 없이 피해 당사자만 돌보는 걸로 재난을 극복할 수 없다.

지역 주민도 참사 피해자

지금 우리함께에 자주 오는 이들은 누군가.

피해 가족의 형제자매다. 전체 형제자매 수는 260명이 넘는다. 그중에 우리함께가 만났거나 현재 만나는 아이들을 모두 포함한 수는 80명 정도고, 이곳을 참새 방앗간처럼 이용하는 수는 15명 정도다. 15명 정도는 본인들이 기획한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이따금 들러 숙제를 하거나 대화를 한다.

우리함께는 상담을 ‘준비 탕’ 하고 시작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짜증나는 것이 있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학교나 부모에 대한 불평이 있다면 들어주는 방식이다. 옆집 언니나 이모처럼 편하게 와서 이야기하는 관계로 남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아는 게 중요하다.

방학할 즈음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싶어 아이들에게 물어봤더니 “사실은 저희 너무 바빠요”라고 말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돌봐주지 못하니 학원을 여러 군데 보낸 것이다. 그래서 방학 때 특별히 상담이나 치유 따위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워터파크나 놀이공원으로 놀러 갔다.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이들은 보통 4월이 돌아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지낸다. 그 시간이 지나 5월이 되면 “안산의 공기가 너무 무거워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캠프를 다녀오곤 한다. 잠시라도 무거운 공기에서 벗어날 틈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함께 기획하고, 함께했을 때 만족도가 가장 컸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형제자매 지원을 한 게 처음이 아닐까 한다. 그들을 피해자로 생각하고 지원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2014년 9월 우리함께가 피해자 형제자매들이 지낼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들에게 “너희는 감정이 괜찮아? 실컷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지 않아?”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100명이면 100명 모두 울었다.

나도 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너무 슬픈데 어른들은 “네가 장녀니까 엄마도 챙기고 동생도 챙겨야 해”라고 말했다. 내게 “너는 괜찮니?” “너는 힘들지 않아?” 물어보는 어른은 없었다. 피해자 형제자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자 부모의 존재는 뚜렷하게 인식하지만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당연히 그 아이들도 힘들다. 누군가는 그들을 지지해줘야 하고.

‘죽은 형제자매를 대신하는 삶’에 대한 고민이 있었나.

자신을 소개할 때 떠난 아이의 엄마, 떠난 아이의 누나라고 말한다. 자기 정체성을 누군가를 대신하는 존재로 두는 순간 자기 삶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들에게 ‘너는 두 사람의 인생을 사는 거야’ 하는 것이 부모에게는 떠난 아이의 상실을 채우는 것일 수 있고, 주변에서는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자신으로도 온전히 사는 것이 쉽지 않다. 누군가의 무엇으로는 얼마나 더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친구들은 형제자매를 잃어버린 뒤 국가가 참사를 어떻게 대하는지, 부모들이 어떻게 내던져져 상처를 입는지 모두 목격했다. 이런 세상에서 한 걸음 딛고 살아가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들에게 두 사람 몫을 살라는 건 가혹하다. 너는 너로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말해줘야 한다.

“너로서만 살아도 괜찮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아직 재난은 진행 중이다. 우리 사회는 참사로 인한 슬픔을 개인의 몫으로 떠넘기고 있다. 형제자매들은 두 몫을 살아야 하고, 피해자는 진실을 알기 위해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이웃들은 피해자가 겪는 고통을 외면한다. 한국 사회가 함께 세월호 참사를 책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난은 또 발생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일은 지난 3년보다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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