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아빠이고 싶지만

2017. 3. 1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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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세수조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육아
나는 정체되는 걸까?

지난해 가을 평일 낮에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한겨레> 기자 아빠들과 그 아이들이 모였다. ‘기이한(?)’ 이 모임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승준

‘좀 추레하긴 하다.’

멍한 표정으로 유모차를 잡고 있는 내 얼굴이 엘리베이터 문에 비쳤다. 대충 물만 묻혀 정리한 뒷머리가 여전히 떠 있다.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입 주변에는 볼펜으로 찍어놓은 듯 수염이 듬성듬성 났다. 입고 있는 바지 왼쪽 무릎에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얼마 전 빙판길에 넘어지면서 찢어졌는데, 다행히 유모차는 멀쩡했다.) 패딩점퍼에 묻은 얼룩은 그대로 있고, 라운드티는 오늘따라 목 부분이 더 늘어나 보인다. 육아휴직 8개월차, 22개월 아이와 어린이집에 가거나 동네 마트에 갈 때 늘 보는 내 모습이다.

물론 육아휴직 전에도 패션에 크게 관심을 기울인 건 아니다. 그래도 매일 아침 면도하고 스킨, 로션을 챙겨 발랐는데…. ‘취향’이라 하긴 좀 부끄럽지만 라운드티보다 셔츠와 파스텔 계열 니트티를, 청바지보다 면바지를, 점퍼보다 코트를 좋아했다. 웹툰 <나는 엄마다>를 보면 주인공(작가) 순두부는 “‘나중에 결혼해서도 꼭 세련미 넘치는 엄마가 돼야지’라고 망상을 하기도 했었다”고 털어놓는다. 나도 비슷한 망상을 했다.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지 말아야지.’ 1년 넘게 아이를 맡은 아내가 푸석한 얼굴로 내내 ‘추리닝’만 입고 지낸 것을 봐왔지만 나는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휴직 첫날, 세수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렸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아이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아빠! 아빠!” 소리 지르며 나를 따라 욕실에 들어오고, 휴지를 잡아당기고, 샴푸나 비누를 만지려 발꿈치를 들고 손을 뻗는다. 욕실 바닥에 아이가 미끄러질까봐 마음이 쪼그라든다. 시간이 걸리는 생리 현상(?)도 화장실 문을 열어놓은 채 급히 해결한다. 아이가 있을 땐 머리 감는 일도 사치다.

아이와 어린이집에 가거나 외출 준비를 할 때면 챙겨야 할 건 많고 시간은 없다. 늘 아이와 몸싸움을 하며 옷을 입힌다. 그다음 아이를 한 손으로 안고 다른 손으로 기저귀, 물휴지 등 준비물을 가방에 쑤셔넣는다. 그러니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입어야 하는 셔츠는 육아의 적이다. 한번에 입을 수 있는 티셔츠가 제일이다. ‘육아 유니폼’으로는 역시 트레이닝복만 한 게 없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무릎이 나오거나 밥풀이 붙어 있을 때가 많아 청바지로 재빠르게 갈아입는다.

요령이 없거나 게으른 것일까? 비슷한 시기에 휴직에 들어간 동료 아빠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회사 선배 유신재 기자, 김성환 기자와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키즈카페나 공원에 간다. 유 선배는 아예 수염을 깎지 않았다. (좀 어울린다. 부럽다.) 쌍둥이를 키우는 그는 겨울에 맨발로 집에만 있다보니 발바닥이 갈라졌다. 김 선배 집에 놀러 가니 그의 머리도 떡져 있었다. (조금 안심되는 기분은 뭘까.) 두 선배는 나보다 옷도 잘 입고 스타일도 괜찮았는데.

물론 이것도 주양육자가 된 이상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추레한 모습으로 집을 나설 때마다 마음속에 꾹꾹 누른 불안이 고개를 든다. 모두 앞으로 달려가는데 나만 정체되는 게 아닐까? ‘○○ 아빠, 아버님’으로만 불리다보니 기자의 정체성은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도 든다. 오랜만에 전화한 취재원이나 동료가 “부럽다” “좋겠다”는 인사를 건넬 때면 괜히 위축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늘 허둥대는 이유다. 고작 1년 휴직하면서 엄살이다. 육아 때문에 일을 포기한 전업맘들의 마음은 짐작도 못하겠다.

이승준 <한겨레>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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