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프랑스 노동문화로 짚어본 한국의 현주소, 부끄럽다

정원식 기자 2017. 3. 1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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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프랑스에서는 모두 불법입니다
ㆍ최은주 지음 |갈라파고스 | 308쪽 | 1만5000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최은주씨(43)는 프랑스인 남편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 거주한다. 파리 7대학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던 그는 2005년 어느날 평소처럼 76번 버스를 타고 마레 지구에 있는 학교로 갔다. 이날 그는 지도교수에게 석사논문을 제출하기로 돼 있었다. 지도교수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학교 안 카페테리아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뽑아 빈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 영문 잡지를 넘기는데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파리 주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 대표부가 영어와 프랑스어가 가능한 어시스턴트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고, 비정규직 행정원으로 채용됐다. “석사 논문을 제출하러 가던 날, 교수님이 지각을 했다. 딱 10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틀어버렸다.”

<프랑스에서는 모두 불법입니다>는 2011~2016년 사이에 최씨가 OECD 한국 대표부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하고 배상을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서 그려지는 OECD 한국 대표부 소속 외교부 관료들의 행태는 권위주의, 관료주의, 노동에 대한 몰이해가 뒤섞인 ‘갑질’의 전형이다.

사건은 2011년 1월에 발생했다. 2011년 1월 한국 대표부 공관 사무실에서 상사 김용필씨(가명)가 최씨의 어깨를 밀치고 폭언했다. 몇 시간 후 김용필씨는 버스정류장으로 최씨를 따라와 이번에는 욕설을 퍼붓고 장갑으로 얼굴을 내리쳤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들이다. 최씨는 한국 대표부에 김씨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지만 대표부는 최씨를 다른 사무실로 배정한 것 외에 김씨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최씨는 한국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한국 대표부는 그제서야 김씨에게 형식적인 징계를 내렸으나 오히려 더 불편해진 것은 가해자인 김씨가 아니라 피해자인 최씨였다. 최씨는 한국 대표부로부터 무언의 퇴직 압력을 받고 버티다 결국 대표부에 합의퇴직을 제안한다. 프랑스에서 합의퇴직은 회사와 고용인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을 때 법원까지 가지 않고 고용계약을 종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도다. 노동자의 권익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프랑스 제도하에서는 사업장에서 부당노동행위가 발생했을 때 고용주가 법적으로 이기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대표부 입장에서는 합의퇴직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했지만, 대표부는 제안을 거부했다. 최씨는 이에 사내폭력 문제와 관련해 본격적인 소송을 준비했다. 대표부는 그러자 최씨를 해고해 버렸다. 최씨는 소송 사유에 ‘부당해고’를 추가했다.

파리 노동재판소는 2012년 10월17일 부당해고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사내폭력은 유일한 직접 목격자가 진술을 거부해 인정되지 않았다.

최씨가 부당해고 소송에서 쉽게 승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국 대표부와 고용계약을 맺으면서 ‘외교증’ 대신 ‘체류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체류증을 선택할 경우 프랑스 학생 신분으로 프랑스 노동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럴 경우 프랑스 노동자로서 프랑스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그 대신 급여의 3분의 1을 사회보장제도 분담금으로 내야 한다. 외교증을 선택할 경우에는 사회보장 제도 분담금을 내지 않아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 대신 프랑스 노동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한국인 비정규직 행정직원 신분이 된다. 또 외교증을 소지한 한국인은 한국 대표부에서만 일할 수 있고, 고용 계약이 1년에 한 번 갱신되기 때문에 비정규직 행정원들이 정규직원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구조가 성립한다. 대표부 내에서 한국 외교관들이 ‘갑질’을 할 수 있는 배경이다. 최씨가 외교증을 선택했다면 파리 노동재판소에서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프랑스에서는 계약직 노동자라도 1년6개월 이상을 근무하면 종신직 노동자가 된다. 7년째 근무한 최씨는 프랑스 노동법으로는 종신직이었지만 한국 대표부 내에서는 비정규직이었다. 한국의 후진적 노동관행에 익숙한 대표부 관료들은 그를 비정규직으로 대했다. “ ‘노동자’를 ‘노예’ 또는 ‘하인’으로 잘못 이해하는 ‘직원’들의 무례함은 여전했고 이름 대신 ‘야’, ‘너’ 등으로 불리는 것도 참아야 했다.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 이곳은 한국 영토이며 ‘너’라고 부르는 것은 윗사람이 친근감을 표현하는 한국식 정서이기 때문에 그런 소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면 그만이라는 조언을 들어야 했다.”

부당해고 소송에서 이긴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국 대표부가 부당해고에 대한 배상금 지불 판결을 그 뒤 4년 동안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씨는 OECD 대표부와 청와대에 민원을 제기했다. 결국 2016년 5월, 한 달 뒤 대통령의 파리 방문을 앞둔 시점에서 한국 대표부가 비로소 최씨와 마주앉았다. 최씨가 기록한 당시 차석대사의 발언들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한국 관료들의 비뚤어진 인식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현 공관장이 좋은 분이시다. 우리는 외교관 면책특권이 있기 때문에 전임자들처럼 이 건을 무시해 버려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내부 회의에서도 이 건을 무시하자는 의견도 분분했지만 공관장이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해결의 노력을 보이는 거다”, “당신도 지금까지 소송을 하고 싸워 오면서 몹시 피곤하지 않은가? 그래서 여기서 타협을 하고 서로 피곤한 일을 마무리 짓자는 의도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대표부가 ‘배상금을 전액 지불하는 대신 이번 사건을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을 경우 대표부는 해당 직원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할 수 있으며 지불한 배상금을 전액 회수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할 것을 종용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비윤리적인 조건을 문서상의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알 터인데 대한민국 정부를 대변하는 재외공관이 그것을 버젓이 합의서에 적어 넣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최씨는 책머리에서 “한국 대표부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비정규직을 원했고 나는 프랑스 노동자 흉내를 내며 당당하게 내 권리를 주장했다”면서 “한국 정부에 해고당한 한국인 노동자를 끝까지 품에 안았던 것은 프랑스 노동법이었다”고 밝혔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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