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민란 없는 일본, 민심의 나라 한국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2017. 3. 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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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촛불시위를 전하는 일본 텔레비전들이 요란하다. 가장 놀라는 건 역시 참가자 수. 출연자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거기에 태극기집회까지 더해지니 “에? 더 있었어?” 하는 반응). 카메라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면서 입들은 더 벌어진다. 유창한 정치발언이 난무하는 건 그렇다 쳐도, 가장무도회를 방불케 하는 시위의상과 퍼포먼스, 한 패널이 부러워한다. “마치 한바탕 놀이 같네요.” 그러자 나이 든 사람이 피식 내뱉는다. “역시 데모 대국.”

한국의 시위규모에 일본인들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20세기 일본 최대 시위라는 1960년 안보투쟁 때 도쿄에 모인 수는 주최 측 추산으로도 30만명을 웃돌 뿐이다. 그 후 최대 시위였던 2015년 안보법안 반대 시위도 10만명 정도였다. 도쿄 인구는 이 기간에 내내 1000만명 안팎이었다. 또 일본 전체 인구는 한국의 2.5배에 가깝다(남북한 인구의 2배 정도. 사실 이 비율은 조선후기=도쿠가와 시대부터 그러했다). 시위 참가 인원 수라는 게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인구가 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한국에서, 일본의 몇 배 규모의 시위가 번번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일본사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민(民)의 정치행동이 자주 일어나지도 않고, 또 그 규모가 참가자 수로나 지역적으로나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민란의 나라 중국이나, 민심의 나라 조선에 비하면 특이하게 보였다. 물론 도쿠가와 시대 내내 잇키(一揆)라고 불리는 농민들의 항의행동이 있었으나, 그 규모가 군(郡) 단위를 넘어서는 경우도 드물었고, 폭력행사도 제한적이었다. 농민들은 대체로 매뉴얼대로 행동했고, 권력 측의 처리도 그러했다(지금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일본공산당의 데모도 이렇게 점잖다!). 연구자들이 이를 민란이나 반란, 혹은 폭동으로 부르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격동의 19세기에도 일본 민중들은 ‘난(亂)’이라고 불릴 만한 시위행동을 일으킨 적이 거의 없다. 백련교의 난·태평천국의 난(중국), 홍경래의 난·진주민란·동학농민전쟁(조선) 등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두드러진 대조다.

이에 비해 조선은 여론정치의 나라다. 물론 그 주요 담당자는 선비들이다. 중앙으로 휘몰아쳐 올라가는 소용돌이 사회에서 중앙정치는 지방사람들의 이해와 서열에까지도 곧장 영향을 미친다. 모두 그에 주시하고 발언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사대부들은 상서하고 사발통문을 돌리고, 민중들은 상언하며 격쟁한다(한상권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 상언·격쟁연구>). 불만이 쌓이면 행동에 들어간다. 조선의 촌락은 도쿠가와 일본의 그것에 비하면, 아주 느슨한 사회다. 민중들은 촌락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이사하거나 이동한다. 군 단위를 넘어서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동학이나 3·1운동 같은 민중시위가 삽시간에 전국화되는 것도 이런 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닐까(해방 후의 찬반탁운동, 4·19혁명, 87년 6·10항쟁 등 그 예는 수두룩하다).

내가 지난 1월12일자 칼럼에서 말했던 ‘상자사회’ 일본은 어떤가. 나는 2014년 3월 3·11 대지진 3주년을 맞아 후쿠시마 지역을 찾아간 적이 있다. 3년이 지났지만 이재민들은 여전히 임시가옥에서 살고 있었고, 이재민대책위원회 분들은 아베 정부가 이렇게까지 홀대할 수 있냐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보다 못해 내가 말했다. “고베 대지진 이재민 분들하고는 연계가 있으신가요?” 위원장이 한동안 내 얼굴을 멍하게 보더니 허공을 보며 한숨 섞어 말했다. “아~, 고베데스카?(아, 고베요?)” 아마도 도호쿠(東北)지역의 그분들에게 저 멀리(!) 간사이(關西)에 있는 고베는 다른 상자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철거민, 노점상, 빈민까지도 ‘전국○○연합회’가 있다고 했더니, 눈과 입이 동시에 둥그레졌다.

경제사에서는 동조율(同調率)이라는 말이 있다.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경제적 변동이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높을수록 그 사회의 경제적 동조율은 높은 것이 된다. 경제의 상업화 정도가 약했던 조선은 같은 시기 도쿠가와 일본에 비해 경제적 동조율이 낮은 사회였다. 그러나 ‘정치적 동조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중앙정계에서 이슈가 불거지면, 전국 각지에서 수백, 수천통, 때로는 만 단위의 상서가 올라오는 조선의 ‘정치적 동조율’은 단연 두드러진다. 지금의 한국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런 사회이기에 한국은 여전히 ‘민심’이 세상을 지배한다. 민심이란 말은 일본어에도 중국어에도 있지만, 일상적으로 쓰지는 않는다. 하물며 우리처럼 정치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는 어휘도 아니다. 한국인들이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을 이렇듯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것을 알면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아마도 놀랄 것이다.

그 민심은 지금도 여론조사와 군중집회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중이다.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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