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대법, 기본권 침해" 전국 판사들 강력 항의

이범준 기자 입력 2017. 3. 8. 06:00 수정 2017. 3. 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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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법원행정처, 지난달 돌연 ‘연구회 복수가입 땐 나중 가입단체 강제 탈퇴’ 공지

전국의 판사들이 지난달 대법원의 일선 판사 통제 시도에 대해 헌법상 기본권을 앞세우며 법원 내부게시판에 항의글을 올리는 등 강력히 반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선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을 저지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한 ㄱ판사가 발령 2시간 만에 재인사 조치가 난 것과 같은 맥락의 사태다. 판사들은 일련의 작업을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주도하고 있으며 배후에는 양승태 대법원장(사진)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법원행정처는 느닷없이 공지를 올렸다. 전문분야 연구회에 2개 이상 가입한 사람은 3월5일까지 스스로 정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6일부터 1개만 남기고 강제 탈퇴시키겠다는 내용이다. 전산정보국장이 공지를 올렸는데 이유는 연구회가 인터넷 커뮤니티이기 때문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당시 나흘 뒤에 서울중앙지법으로 이동키로 돼 있던 전산국장이 왜 이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때는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전국 판사들을 상대로 사법부 개혁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작한 지 나흘째다. 또 임 차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된 ㄱ판사에게 설문조사 영향력 축소 등의 지시를 내린 무렵이다. 판사들은 ㄱ판사 상황까지는 몰랐지만, 대법원의 연구회 가입 강제정리 시도만으로도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틀 뒤부터 법원 내부게시판에 판사들의 항의글이 잇따랐다. 이들은 법원행정처가 결사의 자유(헌법 21조)와 학문의 자유(헌법 22조)를 침해하지 말라고 했다. 한 판사는 항의글에서 “법관의 연구활동은 개인의 학문과 결사의 자유를 넘어 대국민 사법서비스 차원에서라도 적극 장려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결사·학문의 자유 기본권은)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적어 고도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법원행정처가 연구회 가입 강제정리 명분으로 내세운 ‘국회의 예산 관련 지적 우려’ 등도 허구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판사들은 항의글 등에서 “차라리 1년에 몇백만원에 불과한 예산 지원을 없애고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보장하는 게 맞다”고 했다. 그리고 “수십년 동안 방치돼 있던 위헌적인 연구회 복수 가입 금지 예규를 찾아내 강제 탈퇴시키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전국 2900여명 판사 가운데 2개 이상 연구회에 가입한 이는 2095명, 3개 이상은 1308명, 4개 이상은 631명에 이른다. 특히 법원행정처는 강제탈퇴를 공언하면서 “처음 가입한 학회만 남기겠다”고 했다. 이 때문에 판사들은 “최근에 만들어진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설문조사 활동을 견제하려는 것 아니냐”며 “소통을 강조하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평소 얘기와 모순된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ㄱ판사의 위법 지시 거부와 사표 제출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지난달 20일 임 차장은 ㄱ판사에 대한 인사 취소를 대법원장에게 재가받아 오전 11시쯤 통보하고 11시12분 ‘연구회 강제탈퇴 조치도 유예한다’고 내부게시판에 공지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판사들이 헌법의 기본권까지 들고 나와야 하는 절박한 처지가 된 것은 이 사건의 배후에 법관에 대한 제왕적 인사권을 틀어쥔 대법원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전산정보국장이 서울중앙지법으로의 인사가 예고된 상태에서 이런 극단적인 조치를 내린 것은 자신의 판단이라기보다 조직의 판단과 명령”이라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이런 조치의 1차 배후는 강제탈퇴 유예를 발표한 임 차장이며 궁극적으로는 양승태 대법원장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계통상 법원행정처에는 차장 위에 처장(대법관)이 있지만, 대법원장은 차장에게 직접 보고를 받는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한국의 대법원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법관을 제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전국의 판사들을 해마다 인사하면서 통제한다”고 지적했다.

관계자들은 “대법원장 비서조직인 법원행정처의 사실상 책임자인 차장은 대법원장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며 대법원장은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차장을 대법관에 제청해주는 것으로 사법관료 시스템을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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