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판사들 '개혁 목소리' 힘으로 덮으려 한 대법

이범준 기자 2017. 3. 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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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대법원장 중심 사법부 관료화 문제” 법관들 대안 모색
ㆍ최대 규모 학회서 설문 추진하자 대법 조직적 저지 정황
ㆍ행사 축소 지시 거부한 판사는 인사 2시간 만에 취소돼

지난달 9일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한 통의 e메일이 들어왔다. 법원 내부 학회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전국의 모든 법관들에게 보낸 ‘국제적 관점에서 본 사법독립과 법관인사제도에 관한 법관 설문조사’였다. 전국 판사의 6분의 1 이상이 답변한 이번 설문조사는 정치권력의 압력에 수동적으로 저항한 과거 사법파동과는 달리 일선 판사들이 스스로 사법부를 개혁하겠다고 나선 움직임이다. 설문조사를 주도한 학회는 여성 판사들이 자동 가입되는 젠더법연구회를 제외하면 법원 내 15개 전문분야연구회 중 가장 크고 대중적인 판사들의 학술 모임이다.

[단독]‘판사들 사법개혁 움직임 저지하라’ 대법, 지시 거부한 판사 ‘인사 조치’

일선 판사들의 움직임에 놀란 대법원은 설문조사 결과 발표를 저지하거나 반향을 축소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 등 행정처 고위관계자들은 법원행정처로 발령난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ㄱ판사에게 설문조사 결과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도록 하고, 학회의 활동도 축소시킬 방안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임 차장 등이 ㄱ판사에게 일종의 로드맵을 제시하면서 장기적으로 학회의 와해를 지시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ㄱ판사가 ‘사법부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런 일을 하면 형사범죄에 해당한다’며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ㄱ판사가 법관사직 의사까지 표명하자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한 대법원 측이 극구 만류해 행정처 발령만 취소했다”며 “전국의 법관 인사는 대법원장의 전권이고, 더구나 법원행정처로 발령난 지 2시간 만에 복귀시키는 인사는 사법 사상 처음인 만큼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러한 과정을 몰랐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또 설문조사가 한창이던 지난달 13일 “법원 내 연구회 중복 가입을 금지하며 3월5일까지 가입을 정리하지 않으면 최초 가입 학회를 제외하고 탈퇴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판사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무산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사문화한 중복가입 금지 규정을 동원해 설문을 주도한 학회 활동을 막겠다는 것이 대법원의 로드맵 중 하나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지난해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수첩을 계기로 청와대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법관들에게 불이익을 주려는 사실이 드러났고, 특히 여기에 전국 법관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법원이 직간접으로 관여한다는 의심까지 퍼져 있었다”면서 “이 때문에 법원 내 최대 학술학회에서 대안을 마련하자는 얘기가 나와 설문이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장의 인사권에 묶여 관료화하는 사법부의 문제점에 대해 판사들이 처음으로 의견을 모으고 차분하게 대안을 마련하기로 한 움직임까지 봉쇄하려는 것이 현재 우리 법원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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