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 양아치 같은 사장 X X..상담사님,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닙니다"

김지윤 기자 2017. 3. 3. 20:54
번역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사실상 실업자’ 453만명 시대…실업급여 사연들 르포

실업급여 설명회에 참석하러 온 구직자가 지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기가 안 좋아지니까 나이 든 사람부터 자르더라고. 눈치도 보이고 순순히 나가면 실업급여는 받게 해주겠다고 해서 그러겠노라 했는데, 이게 말이 좋아 희망퇴직이었어.”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나서던 조성호씨(57)가 담배를 물었다.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그는 올 초 다니던 식당을 그만뒀다. 지난 한 달 동안 조씨가 작성한 이력서는 열 장. 돌아온 답변은 없었다. 무직의 가장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따가운 시선에 그는 하루 종일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서울 시내를 뱅글뱅글 돈 날도 있다고 했다. 끝까지 타들어간 꽁초를 버리며 그가 말했다. “뉴스에 등장하는 ‘실업’이 내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여기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취업준비생, 주당 18시간 미만 취업자 등을 모두 합친 ‘사실상 실업자’는 453만8000명이다. 맹추위가 지속되던 2월 초, 서울의 한 고용복지플러스센터를 찾았다. 실업급여, 복지 상담, 신용회복 상담 등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고용복지플러스센터는 2017년 3월 현재 전국 100여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북적이는 센터에서 최근 고용시장에 휘몰아친 한파를 ‘체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마다 사연은 달랐지만 이들 모두는 ‘실업’이라는 공통분모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건물 밖에서 나눠준 숱한 자격증들이 나열된 학원 홍보 전단을 읽거나, 센터 한쪽에 비치된 안내문들을 정독하며 자신의 상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꾸지람을 들으러 교무실을 찾는 학생들처럼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실업급여 신청 창구 앞에 서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필요한 자격조건과 서류 등을 갖추고 와서 큰 무리 없이 신청에 성공하는 사람들. 대체로 20~30대 젊은층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실업급여 규정에 해당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행여나 하는 희망을 품고 찾아온 이들이다. 주로 자영업자나 자발적 퇴사자들이 많았다.

“나가라는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사실상 잘린 것”이라는 읍소와 한탄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퇴사하는 과정이 원만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도 비일비재했다. 실업급여 신청을 위한 서류 중 하나인 ‘이직확인서’를 떼지 못해 전 직장의 인사담당자와 통화를 하며 언성을 높이는 모습도 종종 목격됐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폐업 신고’로 사라지며 실업자가 된 김준혁씨(26)도 그중 한 명이었다. 김씨의 아내 역시 출산휴가를 신청했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한 상태다. 아내는 다행히 실업급여 신청에 성공했지만, 그는 전 직장에서 필요한 서류를 받지 못해 결국 실패했다. 센터에서 실시하는 실업급여 수급자 교육을 받으러 간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안아 재우고 있던 그는 “일용직 시장에도 나가봤는데 경력이 없다고 면박만 당했다”며 “대기업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지는 내 자신이 이제는 무능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지난달 22일 찾아간 경기도의 한 고용복지플러스센터 역시 실업급여를 신청하려는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자신의 차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20대 초반의 한 여성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화면을 통해 얼핏 보이는 단어는 ‘직장’ ‘싸우고’ ‘실업급여’ 같은 것들이었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들의 사례를 검색해 보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번호가 전광판에 뜨자, 그녀는 센터 상담직원에게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구구절절 자신의 사연을 풀었다. “유치원 교사로 2년 일했어요. 마지막에 원장 선생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 그만뒀는데, 해고 처리를 안 해줘요. 저 실업급여 못 받나요?” 불안해하는 여성을 대신해 상담직원이 전화기를 들었다. 직원은 유치원 원장에게 노무사 못지않은 전문용어들을 동원해가며 이 여성이 받았던 불합리한 처우들을 조목조목 따졌다. “네, 그럼 (이직확인서는) 팩스로 보내주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직원이 전화를 끊자, 그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란 말만 연발했다.

“양아치 같은 사장이 끝까지 내 발목을 잡네. 씨X.” 한동안 이어지던 오후의 고요함을 깬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온 그를 흥분시킨 건 “전산에 재직 중이라고 표시된다”는 직원의 한마디였다. 분노와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절차대로 실업급여를 받으실 수 있다”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본래의 점잖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문을 나서던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선생님, 잘 부탁합니다”라고 거듭 강조한 뒤 센터를 떠났다.

“실업이 무슨 벼슬이라고, 할 말 없다”며 뿌리치고 가는 사람들에게 치이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혹은 또 다른 구직자라 오해했는지 끝내 물어보지 못했지만 기자에게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며 등을 토닥여준 한 중년 여성의 한마디가 센터를 찾은 실업자들의 마음과 상황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네. 사는 게 팍팍하지?”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검색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