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그는 떠났지만 논쟁은 남았다

2017. 3. 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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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임신중지 합법화’ 세기의 판결 승소 뒤 반낙태 운동가 된 노머 매코비

AP 연합뉴스

1969년 미국 텍사스주에 사는 노머 매코비(22·사진 왼쪽)는 계획에 없던 임신 사실을 알았다. 매코비는 16살에 첫 결혼과 임신을 했고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 이혼했다. 첫 출산은 이혼 뒤였다. 18살에는 둘째아이를 낳았다. 첫아이는 매코비의 어머니가 키웠고 둘째는 입양을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임신, 매코비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당시 텍사스에서는 태아가 산모의 생명을 위협할 경우에만 낙태가 합법이었다. 합법적으로 낙태할 수 있는 다른 주까지 갈 돈이 매코비에겐 없었다. 임신 5개월차, 매코비는 둘째를 입양 보내며 알게 된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 변호사는 매코비를 린다 커피와 세라 웨딩턴 변호사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낙태가 불법인 텍사스주를 상대로 소송을 벌일 원고인을 찾던 중이었다. 매코비는 그들의 원고가 됐다.

익명 ‘제인 로’로 승소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낙태 합법화의 물꼬를 튼 세기의 판결은 이렇게 시작했다. 대법원까지 간 사건은 4년 뒤인 1973년 매코비의 승소로 판결이 났다. 법원은 미국 수정헌법 등이 규정하는 ‘사람’에 태어나지 않은 존재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고, 다만 태아가 생존할 능력을 갖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는 낙태를 금지한다고 했다. 이로써 미국 내 46개 주의 낙태 금지법은 무효화됐고 낙태 과정이 실질적으로 합법화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사이 매코비는 아이를 낳았고 입양 보냈다. 매코비는 재판 당시 ‘제인 로’라는 익명을 썼고 법정에 한 번도 서지 않았지만 획기적인 판결의 당사자로 여겨지면서 저절로 여성운동의 우상이 됐다. 나중에 매코비는 진술서 내용을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서명했으며 어떤 재판인 줄도 몰랐다고, 자신은 변호사들이 만든 장기판의 ‘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재판에서 매코비는 자신의 임신이 성폭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나중에는 그렇게 말해야 승소할 것 같아 거짓말한 것이라고 밝혔다.

1995년 매코비는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부터 격렬한 반(反)낙태 운동가로 변했다. 그는 “성폭력을 당했더라도 아기는 생명이므로 낙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낙태에 관해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는 ‘프로 초이스’(pro-choice) 입장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 현장에서 반대시위를 하다 체포당하기도 했다.

낙태 찬반 양쪽의 아이콘으로 살았던 매코비는 언제나 열렬한 지지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매코비는 가난한 상태에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세 번 겪으며 자신의 삶을 위해 낙태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지난 2월18일 노인요양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69살.

그는 자서전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자세히 밝혔다. 여자친구와 함께 주유소에서 돈을 훔쳐 도시로 달아난 게 10살 때였다. 아버지는 진즉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어머니 마리는 알코올중독자였다. 매코비와 여자친구는 도망친 모텔에서 키스를 하다 직원에게 들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매코비는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로 보내졌다가 친척 집으로 맡겨졌는데 거기서 친척에게 수차례 성폭력을 당했다. 16살에 매코비는 제강소 노동자 남성과 결혼했다. 남편은 매코비가 임신한 뒤에도 계속 때렸다. 결국 매코비는 어머니에게 돌아와 딸 멜리사를 낳았다.

낙태 찬반 양쪽 모두의 아이콘

매코비는 알코올중독에 빠졌고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했다. 매코비가 여행을 떠난 동안 아기를 돌보던 어머니는 딸을 아동 유기로 고소했고 손녀 멜리사의 친권을 가져갔다. 이후 집에서 쫓겨난 매코비는 청소, 바텐더, 페인트공, 축제장 호객행위 등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전전하며 밑바닥 생활을 했다. 18살에 두 번째 임신, 22살에 세 번째 임신을 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서로 달랐다. 낙태를 하지 못해 낳은 아이 둘은 입양 보냈고 매코비는 평생 이들과 교류 없이 지냈다.

매코비는 최종 판결을 신문 기사를 보고 알았다. 재판과 판결은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지만 익명으로 남았던 매코비의 삶은 비켜서 있었다. 변호사들과 연락하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나중에 매코비는 변호사들이 자신을 “바보”처럼 대했다고 말했다. 낙태 합법 승소 판결 뒤 10여 년 동안 매코비는 여자친구와 조용히 살았다.

1980년대가 되면서 매코비는 사람들 앞에 나섰다. 낙태 시술 여성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담했고 낙태권을 주창하는 집회에 참가했으며 미디어와도 접촉하기 시작했다. 1987년 성폭력 때문에 임신했다는 게 거짓말이었다는 고백으로 신문 헤드라인에 오르내렸다. 성폭력 여부가 당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요소는 아니었지만 이는 낙태 반대 그룹들에 폭탄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코비는 ‘아기 살인자’라고 비난받으며 살해 위협까지 겪었다. 이후에도 매코비는 여성의 낙태권을 위한 집회에서 발언했으며 그를 소재로 한 TV 영화도 제작됐다.

그랬던 매코비는 1995년 반낙태주의자로 갑자기 변모했다. 그가 일하던 여성병원 바로 옆에 기독교 낙태 반대그룹이 사무실을 열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혐오했던 이들을 오가며 자주 마주쳤고 시위 현장에서 만나 대화를 텄다. 매코비는 곧 그들을 따라 교회에 나가 세례를 받았다. 1998년에는 로마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했고 여전히 반낙태운동에 열심히 나섰다.

매코비는 1997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낙태 지지자들은 보험 혜택을 받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크고 좋은 ‘살인 센터’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에는 상원 의회에 나서서 “여생을 내 이름이 달린 법을 무효화하는 데 헌신할 것”이라고 했다. 2012년에는 ‘오바마는 아이들을 죽인다’는 TV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매코비는 대법원에 해당 판결을 철회해달라고 탄원했지만 거절당했다.

1995년 반낙태주의자로 변모

<뉴욕타임스>는 매코비의 부고 기사에 이렇게 썼다. “핵심은 그렇다. 매코비는 수백만의 미국인에게 신화적인 존재이자 상징이 됐다. 사람들은 매코비가 누구인지보다 그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매코비는 우연히 전국적인 조명을 받게 된 젊은 여성이었다. 매코비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오래 피해 다녔다. 그러나 낙태 논쟁 중에 정치적 압력 때문에, 그다음엔 종교에 의해 (세상으로) 끌려 나왔다.”

매코비는 자서전에서 “내가 ‘제인 로’가 된 건 잘못된 사람이어서도 옳은 사람이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제인 로’가 됐다. 그리고 내 인생은 나쁜 점까지 모두 역사의 작은 부분이었다”고 밝혔다.

‘제인 로’ 판결 이후 5천만 건의 합법적인 낙태가 미국에서 이뤄졌다. 이후 법원과 주, 연방법이 제약을 도입하고 피임기구 사용으로 낙태는 줄었으나 관련 논쟁은 미국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특히 도널드 트럼프 집권 이후 첨예하다. 낙태가 불법인 한국에서도 지난해 박근혜 정부가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낙태 시술 의료인 처벌 강화 법안을 내놓으면서 낙태와 여성의 몸 권리에 관한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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