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를 죽일 뻔했던 경기, NBA를 살린 남자

최연길 2017. 2. 2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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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 지금은 세계 최고의 리그가 된 NBA. 하지만 NBA도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하위 리그였다. 초창기에는 위기도 많았다. 리그 존폐가 달린 상황도 있었다. 팬들이 ‘NBA는 재미없는 리그’라며 외면하던 위기 상황에서 리그를 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대니 바이어손이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프로스포츠는 팬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늘 팬들을 유혹할 수 있는 흥미 요소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고, ‘어떻게 팬들을 즐겁게 만드느냐’는 모든 프로 관계자들의 고민거리기도 하다. NBA도 이런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점점 줄어가는 팬들의 발길을 붙잡기 위해 고민을 거듭 했고 그 고민이 해결되면서 오늘날의 NBA가 존재할 수 있었다.


‘첫 아이콘’ 조지 마이칸
1946년 BAA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NBA는 초창기에는 보잘 것 없는 리그였다. 초창기 NBA의 가장 큰 고민은 전국구 슈퍼스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1948-1949 시즌 NBL 소속이던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가 BAA에 가세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바로 NBA 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이자 아이콘인 조지 마이칸이 NBA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NBA 최장신이었던 208cm의 마이칸은 ‘슈퍼맨’이라는 별명답게 골밑에서 막강한 위용을 과시하며 리그를 흔들어놓았다. 마이칸의 위용은 대단했다. 1947년과 1948년에 미니애폴리스를 NBL 우승으로 이끌고 1948년 NBL MVP에도 뽑혔다. 1948-1949시즌에는 경기당 28.3득점, 3.6어시스트(당시는 리바운드는 집계하지 않음)로 득점왕에 올랐고 팀도 우승으로 이끌었다. 마이칸은 NBA에서 단 7시즌만 뛰었고 1955-1956시즌에 은퇴했다 팀의 권유로 잠시 복귀한 것이라 실제 풀 시즌은 뛴 것은 처음 6시즌뿐이었지만 그 6시즌동안 미니애폴리스를 5차례 우승으로 이끌며 NBA 첫 번째 왕조를 구축했다. 또한 마이칸은 득점왕 3회, 리바운드왕 2회, 올스타 4회(올스타 경기도 1951년부터 생겼음), 올 NBA 퍼스트 팀 6회를 차지하며 리그를 장악했다.

마이칸은 통산 10,156득점(평균 23.1점), 4,167리바운드(평균 13.4개), 1,245어시스트(평균 2.8개)라는 괴물 같은 기록을 남겼고, 「NBA 위대한 50인의 선수」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등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남게 되었다.

실제 마이칸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가 바꿔놓은 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대학 시절 마이칸은 라이벌이었던 밥 컬랜드와 함께 골밑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높이를 이용해 마치 골키퍼처럼 골밑에서 상대 슛을 걷어냈다. 결국 1945년 NCAA는 하향곡선에 있는 슛을 수비수가 건드릴 수 없는 수비 골텐딩 규정을 신설했다. 또한 마이칸이 NBA에서 골밑을 장악하자 1951년 NBA는 페인트존의 너비를 6피트(183cm)에서 12피트(366cm)로 두 배로 넓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규정은 잠시 후 소개한다.


마이칸을 막아라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는 1949년과 1950년 NBA 2연패를 차지했고 이후 1952년부터 1954년까지 다시 3연패를 달성하며 왕조가 되었다. 물론 미니애폴리스에는 짐 폴라드, 번 미켈슨, 슬레이터 마틴같은 전설적인 선수들도 있었지만 조지 마이칸이 없었다면 이런 위업은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이칸과 미니애폴리스는 다른 NBA 모든 팀들에겐 공공의 적이었다. 

처음에 다른 구단들은 마이칸에 필적할만한 센터를 찾기에 나섰다. 뉴욕 닉스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뉴욕은 드래프트에서 마이칸을 막을 수 있는 센터를 뽑느라 유망주들을 놓쳤고 그 결과 전력도 하락하고 말았다. 리그를 통틀어도 마이칸과 어느 정도 싸움을 펼칠 수 있는 센터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닐 존스턴(203cm)과 시라큐스 내셔널스의 돌프 쉐이즈(201cm) 등 몇 명 없었다.

마이칸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고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었는지는 1949년 12월 14일(이하 현지시간)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미니애폴리스 대 뉴욕 닉스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메디슨스퀘어가든의 광고판에는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대 뉴욕 닉스’라고 쓰여 있지 않았고 ‘조지 마이칸 대 뉴욕 닉스’라고 붙어있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마이칸의 존재감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니애폴리스를 제외한 모든 팀들의 집중 견제에도 미니애폴리스의 위력을 줄지 않았다. 마이칸의 미니애폴리스는 6시즌 동안 273승 131패로 승률 .676를 기록하고 5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반칙, 거친 몸싸움 등을 해도 막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스포츠에서 절대강자는 없는 법. 드디어 마이칸을 제어하는 전술이 등장했다.


최악의 경기
1950년 11월 22일, 미니애폴리스 홈구장에서 열린 포트웨인 피스톤스와의 경기는 역사에 남을 최악의 경기였다. 일부 NBA 전문가들은 이 경기가 거의 NBA 리그를 죽일 뻔했던 경기였다고 평가한다. 결과부터 말하지만 이날 경기는 원정팀 포트웨인이 19-18, 1점차로 이겼다. 다시 말하지만 19-18은 1쿼터 점수가 아니라 최종 점수였다. 이날 경기는 경기 초반부터 심상치 않았다. 1쿼터를 포트웨인이 8-7, 전반은 미니애폴리스가 13-11, 2점차로 이겼고 마지막 4쿼터만 따지면 포트웨인이 3점, 미니애폴리스가 1점을 올렸다.

정공법으로는 마이칸이 버티는 미니애폴리스를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포트웨인의 머레이 멘든홀 감독은 철저한 지공을 전술로 들고 나왔다. 경기 직전 멘든홀 감독은 선수들에게 “뭔가 다른 걸 시도해보자”고 입을 열며 “우리는 좋은 가드들이 많다. 상대 장신 선수들을 외곽으로 끌어내면 어떻게 될지 보자. 코트에 넓게 퍼져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 번 보자”라고 작전을 지시했다.

경기 시작 후 스톨링 플레이를 펼친 포트웨인은 정상적인 경기를 잠시 펼치다 리드를 잡자 다시 스톨링 플레이를 펼쳤다. 심지어 미니애폴리스가 템포를 높이기 위해 프레스 수비를 펼쳤음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포트웨인 가드진들은 미니애폴리스의 수비를 깨고 레이업을 노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돌파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경기가 늘어지자 관중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경기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고 관중들은 야유하는 것조차 지쳐 신문을 읽거나 경기장을 떠나기도 했다. 결국 미니애폴리스도는 말려들었고 1점차로 석패했다. 이날 미니애폴리스가 올린 18득점 중 조지 마이칸이 15득점을 올렸고 그 중 7점은 자유투였다. 마이칸은 4개의 야투를 던져 모두 성공했다. 야투 4개는 이날 양 팀 최다 야투시도였고 미니애폴리스 선수 중 2개 이상 야투를 시도한 선수는 마이칸뿐이었다. 포트웨인에서 최다 득점을 올린 선수는 5득점을 올린 존 올드햄이었다. 경기 후 포트웨인 선수들은 올드햄을 ‘득점기계’라고 부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팬들이 등을 돌리다
포트웨인의 승리는 NBA 경기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점점 여러 팀들이 슬로우템포 농구를 구사했다. 특히 미니애폴리스를 상대하는 팀은 더욱 그랬다. 템포가 느려지며 경기는 지루해졌고, 이를 깨기 위해 반칙은 늘고 자유투도 늘었다. 결국 팬들에게 NBA 경기는 느리고 지루하고 재미없으며 자유투 대결만 펼치는 저급한 경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54년 3월 21일 보스턴 홈에서 열린 보스턴 셀틱스와 시라큐스 내셔널스의 동부 지구 준결승 2차전 역시 최악의 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 1차전을 이긴 홈팀 보스턴은 4차 연장 끝에 111-105, 6점차로 승리하며 2전 전승으로 시라큐스를 꺾고 동부 지구 결승에 오른다. 최종 점수와 4차 연장이라는 면에서는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들어다보면 그렇지 않았다.

보스턴의 명가드 밥 쿠지는 이날 무려 50득점을 올렸다. 하지만 50점 중 30점이 자유투득점이었다. 이날 쿠지는 32개의 자유투를 얻어 30개를 성공했다. 이날 양 팀은 각각 65개의 자유투를 시도해 도합 130개의 자유투를 던졌다. 두 팀이 자유투로 얻은 점수는 108점으로 정확히 두 팀이 올린 점수의 절반이었다.

1954년 3월 20일 보스턴의 홈에서 열린 라이벌 뉴욕 닉스와 경기도 역사에 남은 졸전이었다. 이날 경기가 최악이었던 이유는 전국 중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기는 홈팀 보스턴이 79-78, 1점차로 이겼다. 하지만 이 경기는 무려 3시간 5분이나 이어지며 결국 마지막 승부처는 TV 중계가 되지도 못했다. 4쿼터에만 양 팀이 45개의 반칙을 범했고, 경기 내내 150개의 반칙이 범람하는 최악의 경기였다. 뉴욕이 올린 78점 중 50점은 자유투 득점이었고 보스턴도 79점 중 35점을 자유투로 올렸다. 이날 경기를 본 한 팬은 “지루한 자유투 대결을 누가 보길 원할까?”라는 한탄했을 정도였다. 1954년 3월 18일 시라큐스 홈에서 열린 뉴욕과 플레이오프 1차전도 그랬다. 홈팀 시라큐스가 75-68로 이겼는데 시라큐스가 자유투로 45점을 올렸고 뉴욕이 자유투도 30점을 올리는 자유투 대결이었다. NBA 구단들이 승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에 급급하자 관중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NBA는 존폐의 위기에 몰렸다.


NBA의 구세주, 대니 바이어손
NBA도 이런 위기 상황을 나 몰라라 방관만 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규칙 개정을 통해 상황을 바꿔보려 노력했다. 1950-1951시즌 NBA는 경기 종료 3분전 자유투 후에 점프볼을 도입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다음 시즌 페인트존 너비를 넓히고 마지막 2분 전 자유투 후 점프볼을 하는데 반칙당한 선수와 파울 범한 선수가 하도록 개정했다.

1952-1953시즌에는 종료 2분 전 자유투 후 점프볼은 매치업 상대끼리 하도록 개정했다. 이어 1953-1954시즌은 각 쿼터 당 개인당 반칙 2개만 허용하고 이를 넘길 경우 퇴장시키도록 개정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NBA 사무국이 위치한 뉴욕 시(市)와 가까운 뉴욕 주(州)의 시라큐스 내셔널스의 구단주 대니 바이어손은 NBA 사무국에 자주 들러 커미셔너 모리스 포돌로프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었다. 바이어손은 포돌로프에게 반칙에 대한 개정만 할 것이 아니라 공격하는 시간에 제한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어손은 훗날 이런 아이디어를 가지게 된데 대해 “1951년 보스턴과 우리(시라큐스)의 경기였어요. 경기 종료 8분 쯤 남았는데 레드 아워백이 4점차로 앞서자 밥 쿠지에게 드리블을 시키고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이후 보스턴은 8분 동안 야투 한 개도 시도하지 않았고 우리도 야투 한 개도 넣지 못 했습니다”라며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최고의 드리블러인 쿠지는 시라큐스 선수들이 반칙하려는 상황을 현란한 드리블로 요리조리 피해갔다. 심지어 당시에는 백코트 바이얼레이션도 없었다.

바이어손은 “당시 아무도 제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반칙에 관한 여러 규정들은 잊어버려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제한이다’라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본 후 제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바이어손(그래서 이탈리아 발음으로 ‘비아소네’라 하는 이도 있음)은 원래는 농구에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조금씩 설득력을 얻었다.

 

왜 24초인가?
일단 시간제한이라는 아디이어의 공감대가 생기자 다음 단계는 과연 시간을 얼마로 정해야 하느냐였다. 바이어손은 “저는 박스스코어를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경기가 지루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팀 당 60개의 야투는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양 팀 합계 120개. 경기 시간이 48분이니까 초로는 2,880초고 이를 120으로 나누면 슛 하나 당 24초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라며 24초 공격시간제한의 탄생을 설명했다.

시범경기에서 24초 공격제한시간을 시범적용하기 전까지 많은 구단주들은 이 규칙이 과연 효과적일까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시범경기에서 반응이 좋아지자 포돌로프 커미셔너는  구단주들에게 전화를 걸어 찬반 표결을 붙였고 그 결과 1954-1955시즌에 드디어 24초 공격제한시간이 도입되게 되었다.

1954년, 1954년 10월30일 밀워키 호크스의 홈에서 열린 포트웨인과의 경기는 공식적으로 NBA가 24초 공격제한시간을 도입한 경기였다. 이날 포트웨인은 맥스 자슬로프스키가 14득점, 조지 야들리가 14득점, 멜 헛친스가 14득점을 올리는 등 고른 활약으로 밥 패팃이 17득점, 찰리 셰어가 11득점을 올린 밀워키를 91-72, 19점차로 제압했다.

또한 1954-1955시즌 바이어손이 구단주로 있던 시라큐스는 파이널에서 포트웨인 피스톤스를 4승 3패로 제압하고 창단 이후 첫 우승을 차지한다. 공교롭게도 24초를 도입한 바이어손의 시라큐스가 NBA 인기 하락의 시초가 된 경기의 주인공 포트웨인을 응징(?)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다.

24초 공격제한시간 규칙의 효과는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24초가 도입되기 전 시즌 NBA의 평균 득점은 79.5득점이었다. 하지만 24초가 도입된 첫 시즌인 1954-1955시즌 NBA의 평균 득점은 93.1득점으로 전 시즌에 비해 무려 13.6점이 올라갔다. 결국 바이어손은 NBA를 위기에서 구한 구세주가 된 셈이다. LA레이커스 구단의 유명 아나운서였던 칙 헌은 훗날 “24초 공격제한시간의 놀라운 점은 현재까지도 24초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24초라는 시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이죠”라며 24초의 대단함을 칭송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심판 얼 스트롬도 “시라큐스에 심판을 보러 갔을 때 바이어손에게 ‘대니, 이 사건은 명예의 전당에 가야해’라고 말했더니 바이어손이 ‘내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때 같이 가야지’라고 답했어요”라며 바이어손과의 일화를 공개했다. 실제 바이어손은 2000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장에 공헌자 부분에 선정되었다.


팩트 정리
1. NBA 역대 한 경기 양 팀 합계 최소 득점은? 1950년 11월22일 포트웨인 피스톤스 19-18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미니애폴리스의 18득점은 한 경기 한 팀 최소 득점)
2. 24초 공격제한시간을 만든 대니 바이어손의 당시 직책은? 시라큐스 내셔널스(現필라델피아 76ers)의 구단주
3. 공격제한시간이 24초가 된 이유는? 팀 당 최소 60번씩을 공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48분은 한 팀 당 나누면 24분, 초로 계산하면 1440초다. 이를 다시 60번의 공격으로 나누면 24초가 된다.

4. 24초 공격제한시간이 적용된 첫 NBA 경기는? 1954년 포트웨인 피스톤스 대 밀워키 호크스
5. 24초 공격제한시간이 적용된 이후 첫 NBA 우승팀은? 시라큐스 내셔널스
6. 24초 공격제한시간이 적용된 시즌의 평균득점은? 93.1득점
7. 조지 마이칸이 바꿔놓은 규칙 세 가지는? 수비 골텐딩 규정, 페인트존 너비, 24초 공격제한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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