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따라잡기 힘든 사교육의 벽

김태훈 기자 입력 2017. 2. 2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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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선 잘사는 학생 매일 1시간 24분씩 더 공부… 다른 나라와 정반대
한국에서는 잘사는 집 학생들의 공부시간이 더 길다. 당연한 소리일까?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그 반대다. 못사는 집 학생들이 더 오래 공부한다. 사회·경제적 위치가 열악한 상황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일수록 성적이 낮은 것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같이 경쟁에 불리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뒤처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에게 더 오래 공부를 시킨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 앞서가는 학생들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다. 한국은 어떨까. 익히 알다시피 잘사는 집 학생들은 사교육을 받으며 더 오래 공부한 덕에 줄곧 앞서나간다.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학원가에서 학원 수강을 마친 학생이 귀가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사회·경제적 격차 좁혀지지 않는 이유 두 학생이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사는 일반계 고등학교 2학년 이환진군(17·가명)은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저녁을 먹은 뒤 곧장 학원으로 향한다. 학원에서는 영어와 수학을 배우고, 수학은 과외교습도 받는다. 여기에 다른 과목 공부를 위해 인터넷 강의까지 듣다보니 졸면서 자정을 넘기기도 한다. 그래도 주변 또래 급우들에 비해 공부량이 특히 많은 것도 아니다. “(공부를) 진짜 잘하는 애들 시간표 보면 학원·과외 마치고도 혼자 꾸준히 공부하더라고요. 특히 주말에도 걔들은 게임도 안 하고 공부한다니까…. 우리는 눈치 봐서 틈 나면 게임하거나 덕질(취미활동)도 하는데.” 이군에게 일주일 동안의 방과후 공부시간을 물어보니 “집중 안 해도 앉아 있는 시간만 따지면 많을 땐 40시간쯤 되려나?”라며 “별로 많은 거 아닌데”라고 답했다.

대구 남구 대명동에 사는 정은식군(16·가명)의 방과후 공부시간은 이군의 절반도 안 된다. 정군이 고등학교 1학년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차이는 크다. “원래는 야자(야간자율학습) 해야 하는데, 학원 간다고 하면 그날은 빠질 수 있거든요. 근데 학원 안 가고 놀 때가 더 많아요.” 정군이 말한 자신의 방과후 공부시간은 일주일에 10시간 남짓이다. 그나마 반강제로 하는 야자시간에다 등록한 학원을 꼬박꼬박 나간다고 쳤을 때의 공부시간을 더해서 나온 시간이다.

대구는 교육열이 높은 도시다. 하지만 그것도 동네마다 차이가 있다.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수성구나, 그에 못지 않게 대형 아파트단지와 학교들이 몰려 있는 달서구를 제외하면 다른 도시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반계 고교에 다니는 정군의 반 안에서도 소수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과 그닥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나머지 학생들 간의 분위기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수성구 쪽에는 학교 앞에 학원도 빽빽하게 있고 수업도 빡세게 한다고 그러던데, 우리 동네는 잘사는 동네가 아니라서 학원 수가 훨씬 적어요. 나처럼 자주 빠져도 뭐라 안 그러고.”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방과후 공부시간은 확연한 차이가 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관으로 3년마다 시행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2015’ 결과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사회·경제적 수준이 상위 25% 안에 드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하위 25% 학교 학생보다 주당 9.8시간을 더 공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잘사는 집 학생들이 매일 1시간24분씩을 더 공부하는 셈이다. 이 격차는 평가에 참여한 72개국(OECD 회원국 35개국, 비회원국 37개국)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교육의 양극화 현상, 사교육이 원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학생의 환경에 따른 학습시간의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거나, 오히려 비교적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학습시간이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 OECD 평균으로는 최하위층 학생이 최상위층 학생보다 주당 1.3시간 더 공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처럼 최상위층 학생의 공부시간이 유의미하게 더 긴 나라는 모두 6개국에 불과했다. 한국이 격차가 가장 심했고, 그 뒤를 대만과 일본, 마카오(중국), 크로아티아, 이탈리아가 이었다. 대체로 동아시아권에서 이러한 교육의 양극화가 두드러진 모습이었다.

보고서는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교육의 양극화 현상의 원인을 사교육이라고 지목했다. 보고서는 “더 유리한 환경의 학생들이 학업 성취도 격차를 더욱 벌리며 앞서 나가게 하는 학습시간의 격차가 커지는 것은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며 “만연해 있는 사교육의 결과로 양질의 공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학생들이 장시간의 학업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다. 하지만 보고서는 그런 통념을 또 한 번 깬다. 한국 학생들의 평균 방과후 공부시간은 주당 20.2시간으로, 비교대상 55개국 가운데 16위였다. 확실히 공부시간이 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장시간인 29.7시간을 기록한 UAE 같은 나라들보다는 OECD 평균 17.1시간에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최하위층 학생의 방과후 공부시간만 따지면 주당 15.8시간으로 OECD 평균 17.9시간보다 오히려 짧았다. 결국 오랜 시간 동안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교육현실은 잘 사는 집 학생들을 위주로 적용되는 반쪽 현실이었던 셈이다.

단지 잘사는 집 학생들에게 사교육 시간이 긴 것이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단순히 사교육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에 시달리는 시간이 긴 것만이 문제라면 학생들에게 휴식시간을 최대한 보장하는 등의 방안이 우선되면 된다. 그런데 상위층 학생들의 학습시간이 길어지면서 교육의 형평성까지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커진다. 보고서에서 한국은 2006년에 비해 2015년 조사에서 교육 형평성이 12.9%나 떨어져 조사 대상국 가운데 두 번째로 형평성이 악화된 나라로 나타났다. 학업시간의 양극화가 교육 형평성을 해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학업 성취도에 관한 유일한 국제비교 조사인 만큼 큰 관심을 모으는 PISA에서 한국의 교육당국과 언론이 관심을 집중하는 분야는 한정돼 있다. PISA 보고서가 각국의 교육현실과 환경 전반에 관한 폭넓은 조사를 수행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보도내용은 전체 조사대상국 중에서 한국이 몇 등을 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의 교육 형평성이 떨어지는 동안 학업 성취수준 역시 떨어졌다. 한국은 2015년 조사에서 과거 조사에서처럼 모든 영역이 상위권에 들었다. 하지만 영역별 평균점수는 2012년 평가 때보다 모두 떨어졌다. 읽기는 2012년 1~2위(536점)에서 2015년 3~8위(517점)로, 수학은 1위(554점)에서 2015년 1~4위(524점)로, 과학은 2~4위(538점)에서 2015년 5~8위(516점)로 나타났다. 형평성을 담보한 양극화가 학업 성취도 향상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순위가 떨어진 것보다는 자신감과 학업 흥미도 같은 정서적인 부분이 악화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실이 주최한 ‘PISA 2015 및 TIMSS 2015 결과에 나타난 우리나라 학생들의 성취 특성’ 토론회에서 신명경 경인교대 교수는 “경쟁의 팽배가 성적 지향의 능력 중심 교육풍토를 낳았고 이번 결과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된 것”이라며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상호작용이 원활한 환경에서 능력을 꽃피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성상 서울대 교수도 “학교에서 기초학력 부진 학생에 대한 관리·지도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정밀하게 분석하고 정책적 지원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합격자 수도권 집중현상 심해져 일반고 출신 서울대 합격자의 지역별 분포가 과거에 비해 변한 양상에서도 상·하위 간 격차가 확대되는 양극화 현상은 다시 한 번 발견된다. 종로학원하늘교육의 2007학년도와 2017학년도 서울대 합격자 지역별 분포 변화 분석자료를 보면, 서울 출신 합격자가 2007년에는 29.9%를 차지하던 것이 2017년에는 33.4%로 높아졌다. 경기도 출신도 16.7%에서 23.8%로 늘어나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해진 것이 확인됐다. 반면 2007년에는 세 번째로 많은 합격자를 배출했던 부산은 6.6%에서 3.5%로, 네 번째였던 대구도 6.4%에서 4.4%로 떨어지는 등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격차는 더욱 커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같은 기간 동안 서울 안에서도 지역 편중은 더욱 심해졌다. 교육열이 높은 강남지역의 강남·서초구와 목동이 포함된 양천구 소재 고교 출신의 서울대 합격자 비율은 크게 늘어났지만 15개 구에서는 비율이 줄어들었다. 강남구 출신 서울대 합격자 비율은 2007년 17.3%에서 2017년 23.4%로, 서초구도 9.6%에서 12.3%로, 양천구는 4.6%에서 6.8%로 증가했다.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학교당 서울대 합격자 수가 늘어난 곳은 이들 강남·서초·양천구를 제외하면 마포구가 유일했다.

학습시간의 격차가 결과적으로 교육 형평성을 해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모습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전문가들도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문제다. 서울 광진구의 한 중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 심모씨(36)는 사교육 그 자체보다는 사교육을 받기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심씨는 “학원을 많이 다닐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아서 주말에 도서관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들도 어느 순간부터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와서 성적이 잘 나오는 학생들과 비교가 되는 걸 보고는 공부할 마음이 없어지는 모습을 흔히 본다”고 말했다.

입시 위주 교육과 성적에 따른 줄세우기가 관행처럼 자리잡고 있는 문화도 양극화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한국 사회의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교육환경이 열악한 학생들이 더 오랜 시간 공부하고, 그에 따라 교육 격차를 줄이는 외국의 교육현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는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단순히 교육과정을 패스했느냐 아니냐를 점검하고 넘길 시험도 일일이 상대평가로 순위에 따라 성적을 매긴다”면서 “입시부담이 덜하니까 그때그때 부족한 학습분야를 보충하거나 자신이 관심있는 영역에 대해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 외국의 교육현실과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양극화는 앞서나가는 상위층 학생에게도 별반 만족을 주지 못한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열심히 공부하는 만큼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확률은 높일 수 있지만 그만큼 희생시키는 부분도 적지 않다. 강남의 고등학생 이군이 말하는 주변 친구들의 가장 큰 불안은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이들의 불안은 학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생을 관통하는 명제라고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성적이) 2등급이나 3등급 받는 정도에만 있어도 그렇게 모자란 건 아니지 않나 생각한다”는 이군은 “선생님이건 부모님이건 최대한 1등급으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앞으로 인생이 완전히 털릴(패배할) 거라고 말하니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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