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다른 길'로 '노무현 드라마' 재현할까

입력 2017. 2. 25. 13:56 수정 2017. 2. 2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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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안희정의 '보수 껴안기'

[한겨레]

안희정 충남지사가 23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여성정치연맹 초청 대선후보토론회에 참석하려고 행사장으로 들어서며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안희정(52) 충남도지사는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지지율 5% 안팎의 군소 대선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20%의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1위인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말인 2007년에 ‘친노 폐족’을 자처했던 안 지사가 10년 만에 ‘제2의 노무현 드라마’를 쓸 수 있을까요? 그의 삶과 인생을 통해 ‘안희정 바람’의 크기가 얼마나 될지를 짚어봅니다.

‘이명박 박근혜의 선한 의지’ 발언 여파로 이번주 들어 주춤하기는 했지만, 안희정의 지지율 상승세는 여전히 무섭다. 2월 넷째주 리얼미터 조사(매일경제·MBN 의뢰, 20~22일 조사, 이하 여론조사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에서 안희정은 19.2%로 지난주(20.4%, 13~17일 조사)보다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문재인(32.4%)에 이은 2위였다. 한달 전인 1월 넷째주 리얼미터(23~26일 조사)의 같은 조사에서 안희정은 6.8%로, 대선주자 중 문재인(28.4%), 반기문(16.5%), 이재명(9.6%), 안철수(8.5%)에 뒤이은 5위였다. 한달 전에 비하면 엄청난 도약이다. 2월 넷째주(21~23일 조사)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안희정 지지율은 지난주 22%에서 1%포인트 떨어진 21%를 기록해, 문재인(32%)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여야를 통틀어 2위일 뿐 아니라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도 지난해 후반기에 반짝 상승했던 이재명을 따돌리고 ‘문재인 대 안희정’의 대결 구도를 만드는 중이다.

고교때부터 한국 사회 혁명 꿈꿔
학생운동 좌절 뒤 혁명노선 포기
94년 노무현 만나 정치로 전환
2010년 충남도지사로 재도약 자유총연맹을 동지로 인정 등
보수 기득권과도 공존 소신
5%에서 20%로 상승에 도움
“경선에는 불리” 전망 많아

‘차세대 주자’로 인식됐던 안희정은 이번에 제2의 노무현 드라마를 쓰려고 한다. 2001년 추석 무렵 2.5% 지지율(문화일보가 의뢰한 TN소프레스 조사)이었던 노무현은 이듬해 3월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켜 부동의 대세였던 이인제를 꺾었다. 안희정 캠프의 대변인 박수현은 “지금 각 여론조사를 보면 문재인 후보와 대략 10%포인트 정도의 차이가 난다. 결국 그쪽 지지를 5% 정도만 가져오면 된다는 얘기다. 이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노무현이 눈물의 영상편지 보내

안희정이 처음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9년이었다. 김영삼 비서로 있던 대학 선배 김영춘이 그를 통일민주당 의원 김덕룡에게 비서로 소개했다. 하지만 그는 “방송 카메라가 있을 때만 열심히 일하는 척,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뒤로는 저급한 정치행태를 서슴지 않는 국회의원들”(<안희정의 함께, 혁명>)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등 잘 적응하지 못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이른바 ‘꼬마 민주당’에 남기도 했지만, 결국 이듬해인 1991년 정치판을 떠났다. 그 뒤 공사판 일용직 인부 생활과 출판사 영업부장 등을 전전하던 그는 친구인 이광재의 설득으로 1994년 노무현을 만나 다시 여의도에 돌아왔다. 14대 총선(1992년)에서 재선에 실패한 노무현이 새로운 정치적 기반인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하던 때였다.

2008년 5월11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은 안희정(왼쪽) 당시 참여정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안희정 경선캠프 제공

노무현과의 만남을 계기로 안희정은 현실 정치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 나갔다. “그(노무현)는 영혼을 팔지 않고서도 선거에 나설 수 있으며,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미래를 여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며 “마음은 혁명가로, 몸은 정치인이라는 이중의 질곡을 겪어온 내가 그제야 몸도 마음도 현실정치에 밀착시킬 수 있었다”(<안희정의 함께, 혁명>)고 스스로 밝혔다. 실제로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 시절부터 안희정은 노무현의 표현대로 정치 “동업자”였다. 노무현은 ‘좌 희정, 우 광재’를 단순한 참모가 아니라 실질적인 동지로 여겼다.

안희정도 노무현과 함께 하는 정치를 위해서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2년 대선 전 삼성 등 기업들로부터 65억원의 대선자금을 받은 혐의로 2003년 12월 구속돼 1년간 옥살이를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때문에 노무현 정권의 실세이면서도 노 정부에서 공직을 하나도 맡지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국정 과제를 놓고 측근 참모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일요일의 청와대 모임에 거의 매주 안희정을 부르는 등 배려했다. 2008년 초 안희정의 <담금질> 책 출판기념회에 보낸 축하영상에서 노무현이 “안희정씨가 나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죠. 난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린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불법자금 때 “무겁게 처벌해달라” 요청

안희정은 1964년 충남 논산군 연무읍의 한 철물점집 주인의 2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셋째가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이름을 뒤집어서 희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지만, 아들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79년 박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의식에 눈떴다. 이듬해 고등학교(남대전고) 진학을 위해 대전으로 유학 간 안희정은 도시에 흐르는 민주와 자유의 공기를 누구보다 빨리 흡수했다. <창작과 비평> <다리> 등 계간지와 김지하의 시 <오적>,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등을 읽고 의식화됐다. “지식인은 부르주아 계급의 창녀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에 자극받아 고1 여름방학 때 교과서를 팔아 없앴다. 그러고는 “민중 속으로 다가가기 위해” 매일 밤 대전역 광장에 나간 끝에 “박정희가 휴전선 지키는 군대로 혁명했다면, 나는 민중과 시민의 힘으로 혁명하겠다”(<안희정의 함께, 혁명>)고 결심했다. 어설픈 혁명가는 ‘평천하’라는 지하신문 사건으로 남대전고에서 제적당한 뒤 아버지의 강요로 이듬해인 1981년 서울 성남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혁명에 투신하기 위해 그는 3개월 만에 자퇴를 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검정고시를 통해 고려대 철학과(1983년)에 들어간다. 학생운동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대학은 혁명의 장이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그는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1986년 10월 대학생 1500여명이 연행됐던 건국대 사태를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처음 수감됐던 그는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또다시 투옥됐다. 좌절한 그는 감옥에서 혁명을 포기했다. “숱한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며 보냈다. 잘난 척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며 “능력이 달리고 스스로 준비가 되지 않은 자리는 절대 탐하지 않겠다”(<안희정의 함께, 혁명>)고 결심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뒷줄 오른쪽)가 초등학생 때 어머니 및 형제들과 찍은 기념사진. 안희정 경선캠프 제공

‘직업 정치인’으로서 안희정은 원칙과 상식, 책임을 중시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숱한 이합집산의 정치사에서 한번도 스스로 민주당 당적을 바꾸지 않았다. 이는 자신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잇는 장자”라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의 실패로 친노가 손가락질을 받을 때는 스스로 “폐족”을 자처하면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2008년 18대 총선 때 공천에 떨어졌을 때도 흔쾌히 승복했다. 앞서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재판(2004년 5월)을 받을 때 최후진술에서 “조직 살림살이를 맡으면서 현실과 많이 타협했다”며 “저를 무겁게 처벌해, 승리자라 하더라도 법의 정의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게 해달라”고 한 것은 그의 품성을 잘 보여준다.

2010년 지방선거 때 충남도지사에 도전장을 던진 것도 당선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다. 불모지에 야당의 뿌리를 내리겠다는 장기적인 ‘투자’ 계획이었다. 19대 의원을 지낸 박수현은 “충남도지사 출마를 결심할 때 지지율이 8%였다. 나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맨몸이지만 바위에 부딪혀보자. 실금이라도 가지 않겠나. 떨어지더라도 4년 더 노력해보면 그다음엔 실금이 더 벌어지지 않겠나. 또 4년을 해보자. 그러면 바위 같은 지역주의가 깨지지 않겠나.’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한겨레> 2014년 6월12일)고 밝힌 바 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당선이 유력했던 서울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겨 지역주의 벽에 도전했던 노무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삶의 궤적이나 태도에서는 정치적 스승이자 동지였던 노무현과 비슷하지만, 안희정의 대선 길은 노무현과 크게 다르다. 노무현은 보수언론, 정치적 패권 세력, 재벌 등 기득권층과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대선 때까지 일관했던 데 비해 안희정은 보수, 심지어 기득권층도 껴안자는 통합적이고 타협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새누리당)까지 포함한 대연정 주장을 비롯해 사드 배치 합의 존중,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에 대한 1차 영장 기각 존중, 이명박과 박근혜에 대한 선한 의지 발언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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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달 만에 문재인을 위협하는 대선주자로 떠오른 것은 상당한 정도로 중도 행보를 한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2월 초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경쟁에서 하차하면서 충청표가 대거 안희정으로 몰렸을 뿐 아니라 반기문을 떠받쳤던 보수와 중도층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안희정으로 옮겨갔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문재인 대세론을 흔들지 않으면서 안희정이 20%까지 치고 올라온 것은 반기문을 지지했던 중도 또는 보수표들이 많이 옮겨왔기 때문”이라며 “문재인이 야당 지지층을 이미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중도 확장 전략은 불가피했던 점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안희정은 리얼미터 2월 셋째주 조사에서 60대 이상(안 28%>문 18%), 국민의당과 자유한국당 지지층 등 비민주당 지지층(21%>11%), 보수층(27%>20%)에서 문재인보다 앞섰다.

“통합의 정치는 안희정의 소신”

하지만 안희정의 중도 지향적 노선은 핵심 지지층이 다수가 될 수밖에 없는 당내 경선에서는 지지율 상승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본선 5자 구도를 가상한 대결(리얼미터 2월 셋째주 조사)에서 진보 유권자의 경우 문재인은 70%의 지지를 받았지만, 안희정은 52%밖에 흡수하지 못했다. 또 민주당 지지자의 경우 문재인에게는 82%가 찍겠다고 대답했지만, 안희정에게는 59%만이 그렇게 답했다. 당내 경선의 주역인 야권 핵심 지지층에서 문재인이 안희정보다 훨씬 강한 셈이다. 이번주(2월 넷째주) 한국갤럽 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민주당 지지층에서 문재인이 60%인 데 비해 안희정은 20%에 머물렀다.

수도권의 민주당 3선 의원은 “문재인은 2030 젊은층에서 지지가 강하고 지지자에 대한 조직화도 잘돼 있다. 반면에 안희정은 문재인에 대한 비호감표들이 모여 있다”며 “국민 경선이라고 하더라도 조직이 상당히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안희정 지지자는 야권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을 안으로 묶어낼 노사모 같은 파이프라인이 그에게는 없다”며 “문재인 대세론을 뒤집을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해 보인다”고 말했다.

2015년 4월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다 함께 정책엑스포' 폐막식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오른쪽)과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럼에도 안희정 쪽은 이대로 쭉 간다는 방침이다. 익명을 요구한 캠프의 주요 관계자는 “우클릭으로 비치는 행보가 당내 경선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안 될 텐데 왜 그런 전략을 일부러 취하겠느냐”며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게 후보의 일관된 소신이다. 그런 생각이 국민들에게 수용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이렇게 끝까지 갈 것”이라고 말했다. 안희정은 실제로 2014년 자유총연맹 6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해 자유총연맹 회원을 “동지”로 부르며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되는지 충청남도 도지사와 충청남도 자유총연맹 회원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고민해 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또 ‘충남 사회단체 대표자회의’(2014년 10월 발족)에 진보뿐 아니라 보수단체들의 참여도 이끌어낸 바 있다. 캠프 대변인 박수현은 “토론회 등을 통해 앞으로 안 후보의 진정성이 드러나면 지지율이 더 올라갈 것”이라며 “결국 당심도 민심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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