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 결혼도 할아버지 재산이 중요한 저성장 시대

권성희 금융부장 2017. 2. 25.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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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투자노트]

[머니투데이 권성희 금융부장] [[줄리아 투자노트]]

“요즘 강남 부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남편감 혹은 사윗감은 누굴까요?” 이상건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상무가 물었다.

“돈 많은 남자겠죠.” “그러니까 누구 돈이 많은 남자요?” “네?” 나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상무는 “요즘은 할아버지 재산이 많은 남자가 제일 인기”라며 “고령화로 아버지 재산은 물려받을 때까지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다음으로 아버지 재산이 많은 사람이 인기고 남편감 본인의 학력과 능력은 가장 마지막에 따지는 조건이라고 한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이 상무는 할아버지 재산을 자산가치, 아버지의 현재 돈 버는 능력과 재산을 수익가치, 결혼할 남자 본인의 능력을 성장가치에 비유했다. 요즘은 저성장으로 본인의 능력만으로는 과거만큼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져 남편감이나 사윗감을 고를 때 할아버지 재산(자산가치). 아버지 재산(수익가치). 본인의 능력(성장가치) 순으로 중요성을 둔다는 설명이다.

이 얘기를 들으니 한 때 강남 엄마들 사이에 유행했던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기 위한 조건이 이해가 됐다.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산. 이 얘길 들을 때 왜 아빠의 재산이 아니고 할아버지의 재산일까 궁금했다. 이제 생각해보니 요즘은 저성장으로 어린 자녀가 있는 아버지 대부분이 큰 돈을 벌기는커녕 정리해고의 위험에 시달리니 할아버지 재산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것보다 월급이 적어도 공무원과 교사 같은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것도 저성장 사회의 특징이다. 저성장 사회에서는 미래에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 따라서 미래의 안정성이 성장성보다 가치 있게 평가 받는다. 이런 관점에서 정년이 보장되고 연금으로 노후가 보장되는 삶이 대기업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일한 만큼 성과급을 받아 억대 연봉을 받을 수도 있는 인생보다 선호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맥락에서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은 배우자로 인기가 없다. ‘용’과 결혼해봤자 ‘개천’으로 시집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간 5% 이상 고성장이 가능했던 과거엔 ‘개천에 사는 용’과 결혼해도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지만 연간 3% 경제 성장도 힘겨운 지금의 저성장 시대 땐 아무리 ‘용’이라도 ‘개천’에서 태어나면 ‘개천’을 벗어나기 힘들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를 휘저은 금수저·흙수저라는 ‘수저론’도 저성장 시대 땐 원래 있는 자산이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보다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 인식을 반영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여기저기서 새로운 성공 사례가 나온다. 노력하면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보답을 받는다. 지금은 미약해도 성장세만 잘 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반면 저성장은 좋게 말하면 사회가 안정됐다는 의미고 나쁘게 보면 활력이 떨어져 사회가 정체되고 고착됐다는 의미다. 밑바닥에서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는 성장이 만드는데 성장이 없으니 계층 사다리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개인이 아무리 ‘노오력’해봤자 사회 전체의 부가 늘지 않으니 원래 가진 것이 없던 사람은 성과가 미미하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이 상무는 “저성장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질식시킨다는 점에서 무섭다”고 표현했다. 이 무서운 저성장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안타까운 것은 저성장 시대에 고성장 프레임을 갖고 사는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다. 이 상무는 저성장 시대에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고정관념으로 학벌에 대한 맹신을 꼽았다. 명문대만 졸업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자녀에게 쏟아붓는 사교육부터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교육에 쓸 돈을 모아 차라리 작은 집 한채 사주는게 낫다.

둘째로는 차익을 얻으려는 투자에서 현금흐름을 얻으려는 투자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예컨대 부동산을 사놓기만 하면 가격이 올라 차익을 얻고 팔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투자할 땐 차익을 남기고 팔겠다는 관점보다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얻겠다는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주식에 투자할 땐 배당주를 선택하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자기계발에 너무 열 낼 필요도 없어졌다. 자기계발로 몸값을 올려봤자 저성장으로 높은 몸값을 주고 사줄만한 곳이 거의 없다. 자기계발에 돈을 쓰는 것보다 성실하고 꾸준히 일하면서 착실하게 돈을 모아 자산을 축적하는 것이 더 낫다는 조언이다. 슬프지만 저성장 시대엔 미래 가능성에 베팅을 걸어도 성공 확률이 너무 낮다.

권성희 금융부장 shkwo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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