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멋따라] '순이삼촌을 아시나요'..제주 북촌 '4·3길'

2017. 2. 2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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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생채기 품은 고즈넉한 마을 북촌리가 '평화와 인권'을 묻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해안 마을 북촌리.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하늘에서 본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전경. 2017.2.25

북촌리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함덕리와 해녀촌으로 유명한 동복리 사이에 있지만, 관광객들의 발길은 거의 미치지 않는 곳으로 최근 제주를 뒤덮은 개발의 광풍이 닿지 않아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새하얀 모래밭과 화산석 암반이 조화롭게 섞여 바다의 색은 유난히 다채롭고, 팽나무가 듬성듬성 자리한 마을은 고즈넉하고 여유롭다.

북촌마을은 북촌포구를 중심으로 '본동', 서쪽에 서우봉과 접한 '해동', 남쪽 선흘리 방향 중산간에 '억수동'이 있고, 1990년대에 '한사동'이 새로 조성돼 지금은 4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조천읍 북촌마을 곳곳에 자리한 퐁낭(팽나무)들. 2017.2.25

한참을 돌아다녀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 마주치게 되는, 이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이 마을에선 해마다 음력 12월 19일 집집 마다 통곡의 제사를 지낸다. 1949년 1월 17일(음력 12월 19일) 이 마을에서 주민 300여 명이 무차별 학살로 희생됐기 때문이다.

당시 북촌마을에서 자행된 집단학살 사건을 소재로 4·3사건에 대한 시대적 금기를 깬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1978년 작)은 이날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 기념관에 전시된 현기영의 순이삼촌. 2017.2.25

"그 시간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당시 이 마을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진 것으로 알려지자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한 뒤 처참한 학살을 자행했다. 그것도 모자라 인근 밭으로 끌고가 4∼50명씩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수십년이 지나도 그날의 아픔을 여전히 간직한 북촌마을 사람들은 1993년 피해조사에 나섰고, 2000년대에 들어 매년 음력 12월 19일 합동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1월 16일 오전 제주시 조천면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열린 '제68주년 제주 4·3 북촌리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참석자들이 헌화·분향하고 있다. 2017.2.25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7년에는 학살현장 가운데 하나인 너븐숭이에 희생자 위령비와 제단, 기념관을 세웠다.

북촌마을 사람들의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과 평화에 대한 열망은 지난해 12월 10일 사건 당시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진실을 공유하는 '4·3길' 개통으로 이어졌다. 4·3길 개통은 노인회와 부녀회, 4·3 유족회 등 마을 주민들의 주도로 이뤄졌다.

총연장 약 7㎞, 걸어서 2시간에서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북촌 4·3길은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시작한다.

국비 15억7천여만원을 들여 조성된 기념관은 2천532㎡의 부지에 지상 1층 294㎡의 건물과 위령비, 문학 기념비, 방사탑 등을 갖췄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지난해 12월 10일 오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열린 '북촌마을 4·3길 개통식'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2017.2.25 [연합뉴스 자료사진]

길을 나서기 전 기념관 내 전시관을 먼저 둘러보는 게 좋다. 전시관 입구에 걸린 강요배 화백의 그림 '젖먹이'가 당시 참상을 생생히 증언한다.

전시관을 둘러보며 집단학살 사건의 발생 배경과 과정 등을 대략 머릿속에 넣은 뒤 길을 떠나 보자. '순이삼촌'의 초판본과 여러 외국어 번역판, 작가가 취재 당시 사용했던 녹음기와 다른 저서들도 구경할 수 있다. 이밖에 북촌리 집단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고 홍순식 선생의 친필원고와 북촌리 원로회의의 자체 4·3희생자 조사서 등도 전시돼 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북촌마을 4·3길 코스 안내도. 2017.2.25

4·3기념관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가량 내려가면 해안이 나오고 곧바로 서우봉이 시작된다. 서산봉으로도 불리는 서우봉은 봉우리를 기점으로 동쪽은 북촌리, 서쪽은 함덕리다. 서우봉 해안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진지동굴 20여 개가 있다. 가장 가까운 진지동굴은 입구가 3개인데 내부가 연결된 'ㅌ'자형으로 마을 사람들은 삼형제굴이라 부른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서우봉 일제 진지동굴 입구. 2017.2.25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우봉의 바닷가 쪽 절벽의 이름은 몬주기알이다. 절벽 아래에는 입구는 작지만 내부가 꽤 넓은 천연동굴이 있어 4·3 당시 북촌과 함덕 주민들이 이곳을 은신처로 이용했다. 썰물 때 해안가로 접근이 가능하다. 토벌대의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8년 많은 주민이 이곳에서 희생당했다.

서우봉에서 내려와 고즈넉한 분위기의 마을을 거쳐 7∼8분 정도를 가면 환해장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축성된 환해장성은 왜구 등의 침범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조천읍 북촌마을의 환해장성 유적. 2017.2.25

환해장성으로부터 5∼6분 거리엔 북촌마을의 본향당인 가릿당이 있다. 구짓머루당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가릿당은 기와집으로 조성된 제장의 당신(堂神)은 '구짓머루 노보름한집'이고, 밖의 자연석으로 제장이 조성된 곳의 당신(堂神)은 '구짓머루 용녀부인'이라 한다. 이 신들은 북촌마을 사람들의 삶과 죽음, 호적과 병, 육아, 어선 등을 관장한다고 여겨진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의 본향당인 가릿당. 2017.2.25

가릿당을 나서면 바로 북촌포구다. 아담한 포구엔 아치형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포구 바깥 양쪽으로는 하얀색과 빨간색의 등대가 하나씩 서 있다. 북촌은 고기가 잘 잡히기로 유명한 곳이어서인지 날이 좋을 땐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1948년 6월 우도에서 출발해 제주읍으로 오던 배가 갑작스러운 풍랑으로 북촌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과 경찰 가족 13명이 타고 있었다 한다. 당시 지서장은 북촌포구로 들어서면서 고기떼를 향해 총을 쐈는데 이 총소리를 듣고 접근한 무장대가 경찰 2명을 죽였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조천읍 북촌포구와 다려도. 2017.2.25

북촌포구에 가면 먼저 정자가 있는 다려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4·3 당시 북촌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배를 타고 나가 몸을 숨기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해산물이 풍부해 주민들이 배고픔을 달랜 곳이기도 했다.

북촌포구에서 다시 20여분 걸으면 또 다른 학살현장인 낸시빌레가 나온다. 냉이가 많이 난다고 해서 낸시빌레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에서는 청년 24명이 국회의원 총선거 불참을 이유로 1948년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곳이다.

낸시빌레에서 다시 10여분 길을 따라 걸어가면 또 다른 역사 현장인 꿩동산이 나온다.

1949년 꿩동산에서는 무장대가 총기를 수송하던 군트럭을 습격해 군인 15명이 죽고 2명이 부상했다. 무장대는 1명이 죽었고, 무기를 탈취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 2017.2.25

20여년 전 일주도로가 생기며 꿩동산의 옛 모습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다시 10분 정도 길을 가면 포제단이 나온다. 포제단은 마을의 무사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마을포제를 지내는 제단이다.

또다시 표지를 따라 7∼8분을 가면 4·3 당시 은신처인 마당궤가 보인다. 북촌포구 경찰 피습사건으로 토벌대의 수색이 강화된 1948년 6월 마을 청년 9명이 이곳에 숨어있다가 경찰에 연행돼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하늘에서 본 제주시 조천읍 북촌마을. 2017.2.25

마당궤에서 윗마을 쪽으로 몇 분 걷다 보면 당팟이 나온다. 당팟은 집단학살 때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 가운데 100여명이 희생된 밭이다. 당시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크게 동쪽의 당팟과 서쪽의 너븐숭이에서 나눠 이뤄졌다.

당팟 인근엔 정지퐁낭(팽나무) 기념비가 있다. 정지퐁낭과 연못이 있어 조선시대 때 관리들이 쉬었다가는 장소였다는 정지퐁낭엔 수령 800년의 팽나무가 있었으나 1959년 태풍 사라에 의해 쓰러져 다른 나무로 대체됐다. 나무 옆에 자리한 제주목사 선정비엔 4·3 당시의 총탄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 조천읍 북촌포구의 잠녀상. 2017.2.25

마을 안길을 돌아 북촌초등학교를 거쳐 나오면 출발 장소였던 너븐숭이가 다시 나온다. 기념관 내부만 보고 출발했다면 반드시 위령비와 실제 희생된 유아들이 매장돼 있다는 애기무덤, 작품 속 문장들이 새겨져 누워 있는 순이삼촌비도 둘러보자. 순이삼촌비가 누워 있는 이유는 뽑아놓은 무처럼 널브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을 상징한 것이라 한다.

마을 어르신과 함께 길을 걸으며 당시 사건과 마을에 관한 해설을 들을 수도 있다. 둘째와 넷째 주 월요일을 제외하면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언제든 해설을 요청할 수 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지난해 12월 10일 열린 '북촌마을 4·3길 개통식' 직후 참가자들이 마을 해설사와 함께 4·3길 탐방하고 있다. 2017.2.25

4월 3일, 섬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다 준 그날이 한 달 남짓 뒤면 다시 돌아온다. 그날이 되면 섬 곳곳에선 유족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로 치솟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북촌 4·3길을 걸으며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자.

북촌 4·3길 외에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남원읍 의귀리에도 4·3길이 개통돼 있다.

동광마을 4·3길은 '큰넓궤 가는 길'과 무등이왓 가는 길' 등 두 개의 길로 구성됐다. 길이는 각각 6㎞다.

(서귀포=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 4·3 '잃어버린 마을' 서귀포시 안덕면 '무등이왓'. 2017.2.25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길은 영화 '지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무등이왓'의 잔혹한 역사를 품고 있다.

무등이왓은 1948∼1949년 마을 주민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남은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마을이 재건되지 않고 '잃어버린 마을'이 된 곳이다.

이 길은 시신을 찾지 못해 묘만 조성한 '헛묘'와 '잠복학살터', 무등이왓 마을이 번성했던 역사를 볼 수 있는 개량 서당인 '광선사숙' 등을 지난다.

의귀마을 4·3길은 '신산모루 가는 길'과 '민오름주둔소 가는 길' 2개 코스다. 길이는 각각 7㎞다.

신산모루 가는 길은 의귀마을 복지회관에서 출발해 의귀초등학교, 현의합장묘, 송령이골을 돌아오는 길이다. 민오름주둔소 가는 길은 옷귀마테마타운을 출발해 민오름 주위를 도는 코스다.

(제주=연합뉴스) 제주에서 두 번째로 개통되는 '남원 의귀마을 4.3길' 코스도면. 2017.2.25

ji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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