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속을 봤다면, THIS IS AFRICA!
즐거운 추억을 안겨준 에리카. |
T.I.A를 아시나요
어떤 사람이 추장의 집으로 가라며 안내해줬다. 추장의 집은 생각과 달리 평범한 벽돌집이었다. 옷도 그저 평범했다. 처음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그들의 토의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간이 늦었으니 제발 경찰 좀 불러주세요. 제가 여기서 밤을 새우며 토의를 지켜볼 순 없을 거 같아요”라고 애원했다.
하룻밤 묵기 위해 원주민 동네에 들어가는 길. |
저녁 8시 30분이 되어서야 그들은 결심했다는 듯 나를 재워준다 했다. 너무 피곤해 바로 잠이 드려 하는데 바깥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그들이 경찰에 확인 전화를 하는 거 같다. 이렇게 적대적이고 보수적인 현지인은 여행 이래 처음이다.
다양한 원주민 중 하나를 겪은 것이겠지만, 이번 경험은 정말이지 ‘This is Africa’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두고, 외국인들이 하는 말이다. 줄여서 T.I.A라고도 한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실제 대사로 나오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깊은 속을 봤다면 자동으로 탄성처럼 내뱉게 될 그 말, T.I.A!
에리카의 집 옆에 있는 바오밥나무. |
한 달 반 만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보츠와나로 돌아왔다. 국경선을 넘어 10km 떨어진 마을에 도착했지만, 예상외로 주유소와 집 몇 채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다음 도시는 100km나 떨어져 있었고 분명 거기까지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오후 2시밖에 안 됐지만, 주유소 근처에서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화장실을 찾아 주유소에 들어갔다가 여자 직원에게 잠자리를 물어봤다. 여직원이 자기네 집으로 초대해줬다. 그녀의 이름은 에리카였다.
에리카의 집은 아늑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는 곳이다. 에리카는 도착하자마자 맥주나 와인 등 마시고 싶은 술을 내게 물어왔다. 에리카는 남아공 사람인데 보츠와나에서 살고 있다.
에리카는 10대 때부터 알코올 중독자였다. 친오빠가 ‘악마에 씌였다’고 해 나이지리아에 유명한 사람을 찾아 치료하러 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에리카는 너무 힘들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왜 마시냐고 물었다. 에리카는 “당신이라는 특별한 친구가 왔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에리카의 그림 솜씨. |
“참, 우리 집에 바오밥나무가 있어요. 보여 줄까요?”
”그런 게 있다니 신기하네요. 에리카는 바오밥나무 옆에 사는 여자군요.”
해 질 녘의 빛이 바오밥나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영화의 가장 멋진 장면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다.
“어린 왕자에서 봤던 바오밥 나무가 생각나요. 나도 10년이 지나면 에리카처럼 살고 있을까요?”
“모를 일이죠”
다음 날 아침, 내게 에리카는 이것저것 참 많이 챙겨줬다. 떠날 시간이다. 오랜만에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에리카, 우리 또 볼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어디서든 또 볼 수 있어요. 잘 가요.”
시골 유치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
프랑시스타운에 있는 한인 가족을 알게 됐다. 친절하게도 한 달이나 머물도록 해줬다. 머무는 동안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찾아다녔다. 번번이 무산되다가 드디어 시골에 있는 한 유치원에서 할 수 있게 됐다.
프랑시스타운은 택시 타는 법이 색다르다. 택시 기본요금이 다른 승객과 합석하면 4폴라(약 500원)인데 모든 택시가 버스터미널에 간다. 거기서 다음 목적지로 가는 택시를 타는 것이다. 이러면 택시비가 총 8폴라다. 만약 환승하는 게 귀찮으면 혼자 20폴라를 주고 스페셜 택시를 타면 목적지까지 편하게 갈 수 있다. 물론 난 항상 4폴라 짜리를 타고 다녔다. 버스터미널에서 마을은 20km 떨어져 있다. 대략 30분 정도 걸렸다.
시골 마을 유치원 여선생님은 남아공 코카서스인 조슬린이다. 하루의 수업은 일정한 규칙이 있다. 아침에 오면 아이들은 장난감을 갖고 논다. 이후 선생님과 노래를 부르는데 요일, 알파벳 혹은 동요를 부른다. 보츠와나는 츠와나어를 사용하지만, 대부분 영어를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유치원 수업도 영어로 진행된다. 선생님이 뭔가 말하면 아이들이 한 명씩 나와 그에 맞는 카드를 고르기도 한다. 똑같은 그림에 줄을 긋거나 숫자를 쓰기도 한다.
청소년들이 직접 설거지를 하며 일손을 돕는다. |
실제로 7살 아이들의 수준은 4~5살 아이와 같았다. 검색해 봤더니 원래 학습을 시작한 아이들에게는 글씨 쓰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한다. 유치원 교육과 관련된 봉사활동을 처음 하는지라 내가 너무 성급했나 보다. 천천히 아이들의 수준에 내 눈높이를 맞춰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학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는 여러 액티비티를 했다. 조슬린이 이웃들에게 두루마리 휴지통을 잔뜩 얻어왔다. 그녀를 도와 쌍안경 모양으로 접착을 미리 해뒀다. 이후 아이들은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아이들을 바라보는 건 행복하고 재미있고 무엇보다 굉장히 흥미로웠다.
색칠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여러 질문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왜 저 색을 선택한 걸까? 무엇을 상상하며 그리는 걸까? 왜 한 가지 색만 색칠하는 걸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이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아이들이 쌍안경에 색칠하는 것을 도왔다. |
개인적으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두 가지 준비했다. 하나는 풍선이었다. 유튜브에서 풍선으로 꽃 만드는 법을 터득했는데, 문제는 자전거 펌프로 풍선을 불려니 너무 힘들어서 손가락이 얼얼했다. 그래도 막상 만들어 놓으니 뿌듯했다. 다른 선물은 바로 사진이었다.
나를 묵게 해준 한인 가족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반값 할인을 받아서 아이들 사진을 모두 출력했다. 사진기 렌즈에 곰팡이가 껴서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포토샵으로 수정 후 아이들 이름을 새겨 넣어줬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진 찍는 걸 매우 좋아한다. 아이들 역시 사진을 받고 매우 좋아했다.
떠나는 것의 두려움
긴 휴식이 끝나고 다시 길 위에 올랐다. 떠나온 도시로 향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소독 약물에 신발 밑을 적셨다. 유치원에서 봉사활동 할 때 잠깐 자원봉사자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곳에도 이런 게 있었다. 동물에게 오는 전염병을 막기 위한 듯했다.
해가 질 무렵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했다. 한 여성이 아이들과 앞마당에 있기에, 텐트 쳐도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하지만 5km 더 가면 숙소가 나온다고 그곳으로 가라고 한다. 1년 8개월 동안 여행해서 돈이 궁하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그 숙소의 주인이라며 방을 그냥 내주겠다고 한다.
남아공의 아름다운 풍경. |
벌써 보츠와나를 떠날 시간이다. 다음 나라 짐바브웨가 걱정된다. 나이가 90세임에도 정권을 놓지 않는 독재자 대통령이 있는 곳이다. 실업률 90%로 전 세계 1위다. 자전거 여행을 무사히 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대륙에서 만난 짐바브웨 사람에게 물어보니 남아공에서 아무 일 없었다면 짐바브웨에서도 당연히 괜찮을 거라고 했다.
짐바브웨의 짧은 이름은 ‘짐’이다. 국경선 근처로 가자 다들 ‘짐’에 가냐고 물었다. 국경선 근처에서 만난 사람이 모두 ‘짐’은 괜찮을 거라고 한다. 다만 밤 6시 이후에는 절대 길 위에 있지 말라고 했다. 부디 무사히 짐바브웨를 자전거로 통과할 수 있길 바라며 보츠와나 출국 도장을 밟은 후 짐바브웨 국경선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글 사진 정효진 / webmaster@outdo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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