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짜릿하고 스트레스 풀리는 취미, 그게 뭐냐면요..'외국어 공부'

김형규 기자 2017. 2. 2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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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외국어 관심 갖는 20~40대
ㆍ학습지 시장 규모 매년 급증

최근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는 퇴근 후 학습지로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직장인이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학습지로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직장인 김승희씨(43·가명)는 일본어 학습지를 푸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야근을 하고 지친 몸으로 퇴근해도, 술을 마시고 밤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와도 반드시 학습지 10여장을 풀며 그날 진도를 마친 뒤에야 잠자리에 든다. 일본 유학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어 시험을 앞둔 것도 아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학생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건 순전히 뒤늦게 시작한 외국어 공부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배워보고 싶다 마음먹은 건 한참 됐다. 오랜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 건 먼저 학습지를 시작한 친구였다. 자기 수준에 맞춰 원하는 시간에 적당한 분량을 자유롭게 공부하는 걸 보며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이나 점심시간을 쪼개 강의를 들어야 하는 학원에 비해 부담도 적었다. 비용도 월 3만원 정도로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한마디로 진입장벽이 낮았다.

예술영화 전용극장에서 일하는 김씨는 좋아하는 일본 영화를 더 친숙하게 즐기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업무상 필요나 자기 계발을 위해 공부를 시작한 이들과 달리 동기 부여가 적었다. 하지만 뚜렷한 동기가 없다는 게 오히려 그에겐 자극제가 됐다. “저한텐 이게 취미가 됐어요. 또 너무 재밌는 놀이기도 하고요.”

다른 직장인들은 일주일에 20장도 풀기 힘들어 매번 밀린다는 학습지를 김씨는 매주 60장씩 풀었다. 시작한 지 넉 달 만에 과거 시제 문장을 구사할 정도가 됐다. 같이 학습지로 일본어를 배우는 트위터 친구들과는 진도를 공유하고 익힌 걸 뽐내며 서로 자극을 받는다. 친구들과 올해 초 흥행한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얘기를 나누다 극중 대사 ‘스키데스’(좋아합니다)를 알아들었을 때의 짜릿한 기분은 여전히 잊기 힘들다.

하루에 20~30분, 짧지만 회사 일과 상관없이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됐다. 무언가 매일 꾸준히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만족감과 성취감도 느꼈다. 자연히 일상생활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김씨는 망설였던 방송통신대 진학을 올해 실행에 옮겼고 평소 관심 있었던 다른 강좌들도 신청했다.

김씨 사례는 취미나 놀이, 기분 전환의 도구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20~40대의 최근 경향을 잘 보여준다. 취업이나 승진, 자기 계발과 묶여 억지로 외국어를 배워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들의 공부는 외국 드라마 자막 없이 보기, 해외 연예인 ‘덕질’하기, 외국 여행에서의 간단한 회화 등 개인적 만족과 취향의 실현에 목적을 둔 경우가 많다.

외국어 학습지는 쉬운 내용부터 부담없는 수준별 학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공부하려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덕분에 시장도 빠르게 성장했다. 교원그룹 구몬학습의 경우 지난해 말 성인회원 수가 4만명을 넘겼다. 3년 전과 비교하면 두 배가 훌쩍 넘는 숫자다. 성인회원의 70% 이상은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한다. 특히 일본어와 중국어 회원은 매년 평균 50% 이상 급증세다. 일본어 회원은 2013년 말 대비 지난해 말 220% 늘었고, 중국어 회원은 같은 기간 267% 성장했다. 대교가 운영하는 중국어 교육 브랜드 ‘차이홍’ 역시 성인회원 비중이 2013년 19%에서 지난해 26%로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시장 위축을 우려했던 학습지 업체들로서는 자발적으로 외국어 공부에 나선 성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고마운 존재다. 업체들은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상품 종류를 다양화하고 마케팅을 강화하는 등 시장 선점을 위해 적극 대응하고 있다. 보통은 일주일에 한 번 담당 교사가 집이나 사무실, 카페 등 고객이 원하는 곳으로 방문해 진도 체크와 간단한 테스트, 상담 등을 진행하지만 방문 횟수를 한 달에 1번으로 줄일 수도 있고 아예 방문 없이 교재만 우편으로 받아보는 상품도 최근에 나왔다. 간섭이나 부담 없이 혼자 공부하고 싶다는 욕구가 반영된 결과다.

학습지 인기의 비결엔 추억과 향수라는 재미 코드도 있다. 어렸을 적 부모에게 혼나고 선생님 눈치를 봐가며 밀린 학습지를 풀었던 추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 ‘저는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라고 중국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는 28살” “15년 만의 학습지… 선생님 나이가 나랑 비슷한 것 같다” “퇴근하고 밀린 학습지 하러 카페 입장!” 등의 글을 장난스럽게 올리며 자신의 외국어 공부를 ‘자랑’하고 즐거워한다. 구몬학습 교사 고숙영씨(42)는 “일단 수업을 하면 성인회원들도 다 아이처럼 된다”면서 “외국어 받아쓰기를 하면 꼭 초등학교 1학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떨며 긴장하는데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모습들이 참 보기 좋고 순수해 보일 때가 많다”고 말했다.

외국어 학습에 대한 관점의 변화 못지않게 정보기술(IT) 분야의 발전과 해외여행 증가 등 물질적 배경도 젊은층의 어학 공부 환경을 바꾸고 있다. 전자제품과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으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 직장인 현지연씨(37)는 인터넷 강의(인강)와 일본 드라마(일드) 감상이 주된 공부법이다. 인강은 태블릿PC나 노트북으로 어디서든 원할 때 들을 수 있고, 일드 역시 집에서 IPTV로 내킬 때마다 편하게 시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나 현지 여행을 통한 자극도 배운 내용을 실습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선순환 기회를 제공해준다. 현씨는 “전에는 요리나 운동 같은 걸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많이 풀었는데, 요즘은 외국어 공부도 그런 옵션의 하나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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