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삼천리자전거의 무심한 '아빠 마케팅'..뭐가 문제냐고?

정혜경 기자 2017. 2. 24.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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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혼자 노는 소년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시작한다. 우중충한 색깔의 티셔츠를 입은 소년은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혼자 축구를 한다. 그러다 다른 한쪽 구석에서 밝은 색깔 티셔츠를 입은 다른 소년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발견한다. “자전거 부럽다”,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부럽다”. 영상에는 소년이 뱉었을 법한 읊조림이 둥실 떠오른다. (참고영상: http://www.bike-daddy.com/)

혼자 노는 소년이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는 이유는 자전거 살 돈이 없어서, 자전거 탈 시간이 없어서, 자전거를 탈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바로 자전거를 가르쳐줄 ‘아빠’가 없어서다. 소년의 읊조림은 이내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부럽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삼천리자전거 ‘자전거 아빠’ 캠페인

● 소년의 우울은 어디에서 오는가

잔뜩 어두운 소년의 얼굴 옆으로 자막이 이어진다. 소년의 이름은 김동현. 소년은 아빠가 없고, 엄마는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한다. 그러다 소년에게 한 성인 남성이 다가와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스스로를 ‘자전거 아빠’라 칭하는 이 남성을 만나자, 소년의 옷은 더 밝은 색깔로 바뀐다. 비로소 소년은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배우며 ‘혼자 세상을 달려가는 힘’을 얻고 미소를 찾는다.

여기까지가 자전거 전문기업 삼천리가 올해로 2회째 진행하는 ‘자전거 아빠 캠페인’을 위해 만든 모집 영상이다. ‘자전거 아빠’는, 두발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한부모 가정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를 가르쳐 줄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사회 공헌 캠페인이다. 3월 5일부터 약 한 달간 매주 토요일마다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면 된다. 단 하나의 자격 조건이 있다. ‘성인 남성’이어야 한다.

이혼한 뒤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는 직장여성 A씨가 우연히 영상을 봤다. 영락없이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영상이었다. A씨의 아들은 자전거를 잘 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함이 엄습했다.

A씨는 과연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를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다녔다고 전했다. “일하는 여성이라서, 이혼한 여성이라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들을 키우고 있어서, 아니면 그냥 여성이라서. 어디서부터 죄스러움을 느껴야 하는지 모를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가장 처음에 든 생각은 혹시 아들이 이 영상을 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 했다. 혹시나 영상을 본 아들이 찌푸린 소년의 얼굴을 본 뒤 스스로를 결핍되었다 느낄까 걱정했다.

● 편견이 말한다, 우울해야 한다고

한 부모 가정 아이들에게 자전거 교육이라는 시혜를 베풀 수 있는 주체를 단지 ‘성인 남성‘에 한정했다는 것만 문제는 아니다. 또 아이의 자전거 교육부터, 나아가 인성 계발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책임을 너무나 명징하게 ‘일하는 엄마’라는 특정 집단에 지웠다는 것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더 근본적인 차원에 있다. 이러한 사회 공헌 성격의 캠페인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는 ‘편견’. 이것은 세대를 뛰어넘어 장구히 유지되어 온 ‘관습’의 결과물이다. 여성은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 한 부모 아이는 어딘가 결핍돼 있다는 편견, 직업여성은 아이의 교육에 소홀할 것이라는 편견. 그리고 ‘정상 가정’에 대한 장구한 믿음. 2분 36초짜리 영상 한 클립에 이러한 편견들과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다.

약자와 소수에 대한 폭력은 때로 ‘선의’를 뒤집어쓰고 나타난다. 삼천리자전거 관계자는 “지난해 처음 진행했던 캠페인은 아동들과 아빠들 모두에게 의미 있고 감동적인 시간이었다”며 “자전거 타기에 소외될 수 있는 아동들이 자전거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앞으로도 사회공헌 활동을 펼쳐 나갈 것”이라고 언론에 밝혔다.

● 지난해 혼인 건수, 출생아 수 역대 최저… 뭣이 중할까?

논란이 되고 있는 건 또 있다. 최근 시민단체로부터 잇따라 ‘폐기하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교육부의 ‘2015년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다.

“이성 친구와 단둘이 집에 있을 때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가 성폭력 대처법으로 소개가 되고(초등학교 3·4학년 교사용 지도서), “남성의 성에 대한 욕망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충동적으로 급격하게 나타난다.”(초등 1·2학년), “남자는 누드에 약하고 여자는 무드에 약하다”(고등학교) 같은 ‘설마’ 싶은 문장도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 혼인은 28만 1천 7백 건으로, 1974년 통계 집계 이후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전체 출생아 수도 40만 6천 3백 명, 역대 최소치로 나타났다. 감소한 출생아 수로 따지면 지난 한 해 동안, 평균 한 달간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지난해 시장조사전문기업 앰브레인의 트렌드모니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68.3%가 ‘비혼 선택이 이해가 된다’, 63.6%가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미혼자의 71.8%는 비혼을 ‘사회적 문제로 야기된 현상’이라고 답했다.

경기 불황, 고용 한파, 치솟는 전세값과 물가만큼이나 비싼 건 ‘편견의 비용’이다. ‘태어나지 않은 한 달 치 아이’가 애석하다면, 산적한 경제 부양 정책들에 앞서 편견의 비용부터 걷어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정혜경 기자choic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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