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리의 울분 "54년 폭음 견디니 이젠 전투비행장이냐"

홍용덕 2017. 2. 23. 19: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수원 군공항 예비 이전 후보지 가보니

미군 사격장과 방조제 건설로
터전 잃었다 겨우 희망 찾았는데..
마을마다 분노의 현수막
화옹지구 일부 주민은 유치 찬성

수원시, 5111억 들고 화성 설득
화성시는 주민·지역 갈등 고민

[한겨레] “매화꽃 향기 가득 퍼지는 날에 너를 안고 춤을 추리라.”

미군 폭격훈련장으로 화약 냄새가 자욱했던 경기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가 고향인 가수 안치환은 2001년 그의 자작곡 ‘매향리의 봄’에서 평화로운 고향의 미래를 이렇게 노래했다. 농섬과 고온리 해안가를 따라 매화꽃과 해당화 가득했던 고향은 그에게 “너무나 오랜 세월을 폭음에 찢겨 살아온 땅”이었다.

눈과 비가 뒤섞여 내리던 지난 22일 매향리는 낡은 초소 몇을 빼면 예전의 미군 폭격장 모습이 아니었다. 전투기가 기관총 사격을 하던 육상 사격장에는 27m 높이의 야구장 조명탑 48개가 들어섰다. 초록색 잔디를 갖춘 야구장 8개가 모습을 드러낸 화성드림파크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소년 야구공원이다. 육상 사격장 중 57만여㎡에는 화성드림파크 외에도 내년까지 매화언덕과 농섬숲, 매향리 역사기념관 등 평화생태공원을 만드는 사업이 한창이다.

한때 미군 전투기 육상 사격장으로 쓰였던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일대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소년 야구장이 다음 달 준공된다.

미군 전투기의 폭탄으로 민둥산이 된 바다 건너 농섬은 흐린 날씨에 가물가물했다. 지난해 5월 이곳에서는 멸종위기 2급의 검은머리물떼새가 확인됐다. 전 세계 3천마리뿐인 국제보호종의 서식이 확인되자 전문가들은 농섬이 ‘생명의 땅’이 되는 것이라며 반겼다.

미군 폭격장과 간척공사를 딛고 생명이 움트던 매향리 등 화성의 서해안 일대가 다시 신음하고 있다.

매향리 주민들의 17년에 걸친 미군 폭격장 폐쇄 항쟁 끝에 54년 만에 폭격장이 문을 닫은 것은 2005년 8월의 일이다. 이후 11년 만인 지난 16일 국방부가 수원 군 공항 예비 이전 후보지로 화옹지구를 발표하자 마을마다 분노의 펼침막이 내걸렸다. “미군 전투기 폭격 소음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전투비행장 건설이냐.”

주민 김영철(62)씨는 “비행기 소음 피해를 봤던 터라 수원시민들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전 예정지가 화성시이고 또 매향리냐”며 허탈해했다.

수원 군 공항 예비 이전 후보지로 선정된 화옹지구는 매향리 육상 사격장에서 3㎞가량 떨어져 있다. 승용차로 5분을 달려 도착하자 바다를 가로질러 직선으로 곧게 뻗은 9.8㎞의 방조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조제의 남쪽 끝이 우정읍 매향리이고 북쪽 끝은 화성 8경 중 바다 위 노을 ‘궁평낙조’로 유명한 서신면 궁평항이다.

국방부가 지난 16일 수원 군 공항 예비 이전 후보지로 발표한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화옹간척지의 모습이다.

농지를 조성하려고 시작된 화옹지구 물막이 공사가 2003년 끝나면서 군 공항 이전지로 거론되는 4482ha의 간척지와 1730ha의 인공 담수호인 화성호가 만들어졌다. 서신면을 시작으로 마도면, 남양읍, 장안면과 우정읍이 화성호를 에워싼 채 7만여명의 주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방조제 공사 전만 해도 화성호 일대 서해안은 천혜의 갯벌로, 80년대에는 “어민들이 안주머니에 10만원 수표를 넣고 다니며 쓴다”고 할 정도였다. 화성시 이정일 학예연구사는 “고려 말에 정도전이 유일하게 외직을 받은 곳이 이곳 남양 부사였는데, 집안이 빈한해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남양만한 곳이 없다는 설이 전해질 만큼 예로부터 소금과 어류 등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고 말했다. 남양은 현재 화성시 남양읍이다.

폭격장과 방조제로 천혜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에게 희망이 싹튼 것은 매향리 폭격장 폐쇄 이후 10년 사이 일이다. 화성시는 바닷길이 갈라져 ‘제부 모세’로 불리는 제부도와 전곡항, 궁평항에서 매향리까지 해안 71.4㎞를 따라 2600억원을 들여 ‘힐링과 평화, 생태’를 내건 7곳의 관광지를 조성해왔다. 방조제에 갇혔던 화성호에도 생명이 찾아왔다. 수문 개방 이후 염분기가 들어오면서 자연 염습지로 바뀐 화성호의 주변 간척지는 새들 세상이 됐다.

정한철 화성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매향리와 화옹지구에서만 조류 83종이 관찰됐다. 봄·가을로 3만여마리씩 몰려오는 도요새와 물떼새는 물론 법적 보호종 또는 천연기념물인 조류만도 18종에 이르고 화성호의 습지는 전남 순천만 습지 이상의 가치로 학계에서 주목받을 정도다”고 말했다.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일대 화성호에 수원 군 공항 예비이전 후보지로 발표되자 주민들이 반대 현수막을 내걸었다.

“화성시민을 두 번 죽이지 말라”는 주민들의 호소에는 이처럼 오랜 역사적 경험이 묻어 있다. 미군 폭격장과 간척사업으로 생계 터전을 잃고 겨우 희망을 찾았는데, 군 공항 이전으로 아예 희망을 잃는 것 아니냐는 절박함이다. 군 공항 이전과 개발 및 지원 등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수원시가 모르는 ‘화성의 아픔’이다.

오문성 화성시 관광진흥과장은 “수원비행장이 오면 화성시는 미래의 희망을 잃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간척지와 붙은 호곡리에서 태어나 계속 살고 있는 우정읍 사회단체협의회 김국진(61) 회장 역시 “군 공항 이전은 천혜의 자연환경에 의존한 우리의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비행기 소음피해에다 노인들이 다수인 농촌 공동체의 해체도 걱정했다.

국방부의 예비이전 후보지 발표로 바통을 넘겨받은 화성시의 고민도 깊다. 4조원이 들어갈 수원 군 공항 이전사업은 제주 강정해군기지처럼 정부가 군경을 동원해 강행할 수 있는 국책사업이 아니다. 민관합동의 기부 대 양여방식의 사업이다. 수원시가 군공항 이전 터를 개발한 수익금으로 화성에 새로운 군 공항을 건설해 국방부에 넘겨주는 방식이다 보니 화성 주민들의 의사가 중요하다.

수원시는 5111억원의 막대한 지원금을 이전 예정지역에 지원하겠다며 화성 주민 설득에 나서는 한편 2025년까지 이전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반면 화성시는 군 공항 이전을 놓고 주민 간, 지역 간의 갈등이라는 더 큰 난제를 만났다. 화성시와 시의회,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군 공항 이전 반대에 적극 나섰지만 수원비행장 주변과 화옹지구 일대 일부 주민들은 군 공항 유치위원회를 꾸리는 등 주민 사이 내부 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안치환이 노래한 ”되찾으리라 매향리의 봄”을 화성 사람들이 되찾을 수 있을까?

화성/글·사진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페이스북][카카오톡][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