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특파원 리포트] 영국에서 '갑질'의 최후

김덕원 2017. 2. 2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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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와 버스로 북적이는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버스와 승용차가 차선 다툼을 하다가 운전자끼리 말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화를 못 참은 승용차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버스로 다가갔고 두 사람은 더 심한 욕설을 주고받았다. 급기야 승용차 운전자는 버스의 열린 창틈으로 침까지 뱉었고 이 침은 기사의 팔에 맞았다. 이후 승용차 운전자는 자기 차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이 출동했고 승용차 운전자를 체포해 버렸다. 승용차 운전자는 체포 과정에서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승용차 운전자는 기소돼 1,130파운드(우리 돈 160여만 원)의 벌금을 낼 것과 버스 기사에게 500파운드(우리 돈 70여만 원)의 위로금을 줄 것을 판결받았다.

영국에서 대중교통 운전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위법 행위이다.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니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경우 승용차 운전자에 대한 처벌이 실제 행위보다 좀 과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버스 기사에게 침을 뱉었지만 침은 팔에 뭍은 정도였다. 직접적인 신체적 접촉 또한 없었고 승용차로 버스의 운행을 방해하거나 이로 인해 승객들이 위협을 느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버스가 승용차 앞으로 갑자기 나아가면서 승용차의 진로를 방해한 것 아닌가 하는 정황도 있었다. 특히 승용차 운전자는 체포 당시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의 태도까지 보였다. 그런데도 승용차 운전자는 기소를 피하지 못했고 벌금과 위로금 지급 판결을 받았다.

알렉스 포운즈라스(38살). 현재 다국적 투자 은행인 ‘바클레이’의 고위직. 버스 기사에게 침을 뱉은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가해자인 승용차 운전자의 신분이 공개되면서 사건은 단순 사건이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승용차 운전자인 '알렉스 포운즈라스'(38살)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메릴린치 등의 은행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유명한 투자 은행인 바클레이 은행의 부사장(vice president)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35억 원이 넘는 방 3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고 9만 파운드(우리 돈 1억 2천여만 원)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살사 댄스를 잘 추며 쿵후의 유단자이고 6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상류층, 즉 우리로 치면 이른바 '갑'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레온 데라하이(44살). 2005년부터 런던 시내버스를 운전해온 기사. 어렵게 일하는 버스 기사는 은행가 같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모욕을 참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은 사회적 '갑'이 사회적 '을'에게 행패를 부린 사건으로 변했고 '알렉스 포운즈라스'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피해자인 버스 기사는 "알렉스가 받는 월급을 고려하면 벌금 액수가 너무 적다"며 "런던 시내에서 버스를 모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냐. 그런데 버스 기사가 (잘 나가는) 은행원에게 모욕을 받는 것은 참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체포될 때 울면서 후회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악어의 눈물이다. 속아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미첼 전 보수당 원내총무. 2012년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다 경비원과 말싸움을 벌였고 결국 거액의 소송금을 지급해야 했다. 또 고위직 복귀가 어려워졌다.


영국은 아직도 왕과 귀족이 있는 사회이지만 사회적 지위를 무기로 '갑'질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는 것 같다.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 2012년 9월 국회 의사당에서 일어난 이른바 '평민게이트'(Plebgate)사건이다.

당시 보수당 서열 3위인 앤드루 미첼 보수당 원내총무가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면서 정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정문을 지키고 있던 로랜드 경관이 도보 출입구로 나가라 했다. 미첼 원내총무와 로랜드 경관이 서로 말싸움을 주고받았고 이 과정에서 미첼 원내총무가 "*할 평민(pleb) 놈아"라고 욕설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미첼 원내총무는 그 말을 한 적 없다고 주장하면서 법정 싸움으로 번졌다.

2년여 동안의 재판 끝에 결국 미첼 원내총무가 패소했다. 주변에 있던 로랜드 경관의 동료들이 '평민'이라는 단어를 들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미첼 원내총무는 소송 비용 300만 파운드(당시 환율로 53억 원)을 배상했고 '평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거만한 정치인이 돼 권력 핵심부로의 복귀도 힘들어졌다.

김덕원기자 (kim0526@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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