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대포통장 계좌정지되자 눈치 챈 모집책 잠적해 전화..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은 살아 있었다

윤성민 기자 입력 2017. 2. 23.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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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검거과정 동행 취재

“D기업(주류회사) 세무팀입니다. 주류는 부가세가 80%가 넘어 세금 감면을 받아야 하는데, 저희에게 계좌를 빌려주시면 2개 기준 월 500만원, 1개 기준 월 200만원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15일 기자의 휴대전화로 이런 내용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발신지인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중국동포 말투는 아니었다.

“퀵서비스 기사를 통해 체크카드만 전달해주면 돼요.”

보이스피싱 사기에 사용할 대포통장을 모집하고 있다는 직감이 왔다. 지난달 서울 성북경찰서에 덜미가 잡힌 대포통장 모집 일당의 수법과도 같았다(국민일보 2월 14일자 13면 참조). 경찰 수사를 비웃듯 대포통장 모집책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기자는 17일 성북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에 이 문자를 신고하고 검거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

오창도 지능범죄수사팀장은 신분을 위장하고 대포통장 모집책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좌 2개를 빌려주고 싶다”고 하자 모집책은 반색하는 눈치였다. 모집책은 경찰서 팩스로 그럴 듯한 임시근로계약서와 사업자등록증을 보내왔다. 오 팀장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계약서”라고 설명했다. 사업자등록증에 나와 있는 주소를 찾아가봤지만 주류회사가 아닌 렌터카업체 사무실이었다.

모집책은 전화로 “퀵 기사를 보낼 테니 체크카드를 박스에 포장해서 전달해 달라”고 했다. 본격적인 검거 작전이 시작됐다.

오청교 경위 등 3명의 수사관이 퀵 기사가 오기로 한 장소로 출동했다. 조경호 수사관이 약속 장소에서 빈 종이박스를 들고 대기했다. 멀리서 퀵 기사가 미소 띤 표정으로 걸어왔다. 위장한 전달책이었다. 그는 “잘 전달하겠습니다”며 박스를 받고 돌아섰다. 그 순간 나머지 수사관 2명이 앞을 막아섰다. 오 경위가 “지금 당신은 보이스피싱 대포통장 사기에 연루됐습니다”라고 말했다. 퀵 기사로 위장한 김모(44)씨의 얼굴이 굳었다.

김씨는 조사 과정에서 체념한 듯 털어놨다. “자식 둘 키우는 입장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는 무역회사가 물건 전달할 사람을 구한다는 인터넷 광고를 보고 검거 전날 전달책 일을 시작했다. 첫날부터 서울 강남구, 경기도 수원·남양주, 강원도 홍천을 돌며 체크카드를 수거했다고 한다. 수거한 체크카드를 서울 곳곳에 설치된 택배보관함에 넣어두면 모집책이 가져간다고 했다. 모집책에게 20만원을 받기로 돼 있었지만, 검거돼 그 돈은 받지 못했다.

경찰은 김씨가 갖고 있던 대포통장 계좌 6개를 거래 정지시켰다. 계좌에는 1700만원이 들어 있었다. 피해자 3명의 돈이 사기단에게 흘러가는 것을 막았다.

경찰은 김씨가 택배보관함에 체크카드를 넣어놓도록 해 총책을 추적하려고 했지만, 연락이 없었다. 피해를 막기 위해 계좌를 정지시킨 때문이었다. 오 팀장은 “김씨를 ‘꼬리 자르기’한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돼 22일에도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전화는 김씨가 아니라 오 팀장에게 걸려왔다. 발신자가 추적되지 않는 인터넷 전화였다. “약속한 500만원은 다음주 월요일(20일)에 입금해 주겠습니다”라고 했다. 오 팀장은 “어차피 줄 돈이 아니기 때문에 확인도 안 하고 말하는 것”이라며 “피해자들을 안심시켜놓고 이틀 정도 대포통장을 사용하고 버리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글=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삽화=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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