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염치(廉恥), 이승엽이 따지는 불편한 것들

조회수 2017. 2. 22. 10: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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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괴상한 폼이다. 다리를 번쩍, 팔꿈치 각도도 유별나다. 온 몸을 한껏 뒤로 틀었다가 푼다. 도대체 공 나오는 지점이 보이질 않는다. 포인트를 못찾는 타자들은 허둥거린다. 힘 한번 못 써보고 (타석에서) 강퇴 당한다. 2아웃.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 그의 차례가 됐다. 초구. 숨 쉴 틈 없이 빠른 볼이다. 하지만 타자의 반응도 거침없다. 배트가 구속을 이겨낸다. 타구는 까마득히 솟아올랐다. 그리고 에인절 스타디움 외야에 모여있던 태극 응원단까지 아름다운 비행을 계속했다. 불의의 일격이었다. 투수는 아연실색했다. 모자를 벗고 흐르는 땀을 닦는다. 그는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이었던 돈트렐 윌리스였다(2005년 22승 10패, ERA 2.63). 무엇보다 2년간 좌타자에게는 홈런 3개 밖에 맞지 않던 철벽이었다.

2006년은 WBC 첫 대회였다. 미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드림팀이었다. A 로드, 데릭 지터, 켄 그리피 Jr…. 경기장은 올림포스 신전에 비유됐다. 신들과의 대결이었다. 상대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을 모독하는 ‘건방진 인간’이 하나 있었다. 1회에 터진 그 ‘인간’의 홈런은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버렸다. 주눅 따위를 모두 날려 버린 한 방이었다.

                                                                     2006년 WBC 대회 당시 SBS 중계 화면

WBC가 임박했다. 과거의 하이라이트가 여기저기서 회자된다. 단연 그의 장면들이 꼽힌다. 특히 1회 대회는 압도적이다. 도쿄돔 1라운드에서는 8회 역전 투런으로 일본을 침몰시켰다. 본선에서는 멕시코전, 미국전에서 연달아 결정적인 한 방을 터트렸다. 합계 5개를 넘겨 초대 홈런왕에 등극하기도 했다. 어찌 WBC뿐이겠나. 시드니 올림픽, 베이징 올림픽. 소름과 감동은 늘 그가 담당했다. 

마지막 봄 

듣고 보니 그럴듯 하다. ‘마지막 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본 오키나와에 차려진 스프링캠프 말이다. “전성기 때보다 더 스타가 된 기분이네요.”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정도다. 카메라 렌즈와 취재진의 마이크가 집중된다. 수 많은 미디어가 홍보팀을 채근하고 있다. 인터뷰 일정을 받아내기 위해서다. 아마도 2017시즌 KBO 리그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는 그의 은퇴일 것이다. 전설의 퇴장을 앞두고 벌써부터 야구판이 시끌시끌하다. 이미 작년부터 얘기가 시작됐다. 소속팀으로 한정할 일이 아니다. 10개 구단 모두가 나서야한다는 생각들이다. 각 팀을 돌며 마지막 경기를 장식해주자는 의견이다. 이를테면 작별 투어(Farewell Tour)다. 데릭 지터나 빅 파피(데이비드 오티즈)가 그랬다. ‘굿바이’를 외치며 전국을 돌았다. 가는 곳마다 부츠, 서핑보드, 기타, 와인, 박살난 인터폰 등을 기념품으로 받았다. 우리도 그렇게 폼 나는 퍼포먼스가 생기면 얼마나 좋겠나.

36번에게 그런 자격은 차고 넘친다. KBO 리그에서 그보다 뛰어난 업적을 이룬 선수가 어디 있겠나. 상상하기도 싫다. 그가 빠진 한국야구 현대사는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 그 덕에 병역 특례의 수혜자가 된 후배들도 수두룩하다. 명실상부한 (합법적) 병역 브로커 아닌가. 어쩌면 예비군복을 선물하는 곳도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난감한 표정이다. “KBO 총장님(양해영)께서 먼저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마지막 원정 경기 때 홈 플레이트 앞에서 팬들께 고개 숙여 인사하는 짧은 시간만 주어졌으면 좋겠다. 상대 팀에도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겠나.”

은퇴식도 방해되면 안 할 태세 

늘 그런 식이다. 충분히 누려도 된다. 더 해달라고 요구한들 욕할 사람 없다. 그런데도 항상 멈칫거린다.

“(은퇴식이) 너무 거창해지면 팀에 안좋은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냥 그만둘 것이다. 혹시라도 우리팀 선수들이 집중력을 잃거나, 산만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즌 막판) 팀에 중요한 시기가 온다면 은퇴식을 안 하는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나중에라도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은퇴 결심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상당수 팬들이나 관계자들은 말리고 있다. 몇 년 더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왜 벌써 떠나려고 하느냐는 의문이다. 3살 많은 이치로도 아직 멀쩡히 뛰면서 ‘50살까지 했으면 좋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는 데 말이다.

“냉정하게 따져봤다. 다른 팀에 좋은 1루수나 지명타자들이 많다. 이대호나 김태균 같은 후배들이다. 과연 그들보다 (현재의) 내가 더 나은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적당한 시기인 것 같다. 사실 이 나이(42세)까지 하는 선수들이 많지 않다. 36번을 달고 36살까지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길게 했다. 지금도 많이 행복하고 감사하다.”

무엇보다 목소리에 힘을 주는 부분이 ‘약속’이다. “은퇴는 약속이다. 프로는 약속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번에는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 그러면서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렸다. “원래 메이저리그 진출을 하지 못하면 무조건 삼성에 남으려 했다. 당시 단장님도 그렇게 알고 위에 보고하셨다. 그런데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단장님께서 무척 곤란한 상황이 되셨던 것 같다.” 따져보면 그렇다. (은퇴에 대해) 약속은 무슨 약속인가. 그냥 혼자 선언하고, 혼자 다짐한 것이다. 아무도 동의하거나, 고개를 끄덕인 적 없다. 자기가 뱉은 말을 지키려고 그냥 저러는 거다. 14년전 일까지 들먹이면서.

남들과 다른 그의 행동들 

사실 그는 몇 차례 <…구라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처음은 5년 전이다. 일본에서 유턴한 해였다. 그 해 4월 한 달간 도루를 3개나 기록했다. 홈스틸도 하나 있었다. 말도 안되는 ‘오버’였다. 심지어 비 오는 날 방수포 슬라이딩까지 했다. 클럽하우스 최고참이 말이다. 왜 저러나 싶었다. 그 때 <…구라다>는 그걸 염치(廉恥)라고 표현했다. ‘잘 나갈 때는 돈 벌러 나갔다가, 힘 떨어지니까 돌아왔다는. 괜히 밥 숟가락 하나 얹어, 있는 식구들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그런 자괴감 말이다.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남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행동 패턴들이 있다. ▶ 홈런 치고 고개를 푹 숙인다든지 ▶ 배팅볼 투수를 자처한다든지 ▶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야구장에 출근한다든지 ▶ 데드볼 맞고 투수한테 눈길 한번 안준다든지 등등. 그런 행동들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건 염치라는 단어로 조명할 때 비로소 명확한 실체가 드러난다.은퇴에 관한 일련의 입장도 그렇다. 혹시 창창한 후배들 앞길을 자신이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 번거로운 이벤트(은퇴식)가 팀에 방해되지 않을까. 따위의 쓸 데 없는(?) 걱정들 많이 할 것이다.

체면, 염치. 남들은 그 딴 거 없이도 잘들 산다. 그런데 그는 자꾸 그걸 따진다. 훨씬 불편할 텐데 말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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