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플러스] "저는 '커피 담당'입니다" 속앓는 직장여성들

이창수 기자 입력 2017. 2. 20. 19:49 수정 2017. 2. 27. 07: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직장여성 6개월 평균 33.2회 '젠더 괴롭힘' 겪어/ "재판부에 애교 떨라" 소리 듣는 여성 변호사들도/ 입법조사처, "한국, 성평등수준 144개국 중 116위"/ 성희롱 감시 '고용평등감독관' 10명 중 7명이 남성 / "비정규직 여성은 더 문제, 각계 인권감수성 필요"

“거, 비법이 뭐래? 하하하”

지난해 입사한 새내기 직장인 A(28·여)씨가 최근 부장과 함께한 회식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부장은 술자리에 우연히 나온 60대 성범죄자 뉴스를 보고서는 “나이를 먹고서도 저렇게 팔팔한 비법이 뭔지 궁금하다”는 등 성희롱적 발언을 일삼았다. 순간 얼굴이 벌개진 A씨였지만, 다른 팀원들이 내색하지 않았던 터라 어색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A씨는 “‘농담’이랍시고 한 것이겠지만 몹시 불쾌했다”면서도 “다들 웃으며 넘어가는 데 어쩌겠느냐”고 토로했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tvn 제공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B(25·여)씨는 어느 순간부터 팀에서 ‘커피 담당’이 됐다. 같이 일하는 팀장은 하루에 2∼3차례 휴식시간만 되면 B씨에게 “커피를 타 달라”고 요구했다. 직장에서 상대적으로 어린 축에 속한다는 B씨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못마땅하다”면서 “‘싫다’, ‘직접 타 드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상사와 얼굴 붉히기 싫어 내색도 못하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직장에서 성(性)역할을 강요받거나 외모 비하, 사생활 간섭 등 성차별적 괴롭힘, 이른바 ‘젠더 괴롭힘’에 속앓이 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젠더 괴롭힘이란, 성별에 관해 모욕이나 무시하거나, 적대적 혹은 굴욕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등 괴롭히는 행위를 이른다. 이에 포괄적인 의미의 젠더 괴롭힘을 제재할 근거를 마련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여성들, 1주에 한번 꼴로 젠더 괴롭힘”

20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한국과 일본의 성차별적인 괴롭힘 실태와 관련 법·제도’ 보고서에 따르면 직장에서 여성들은 6개월 간 평균 33.2회(주 1회 이상) 젠더 괴롭힘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17.5회가량 괴롭힘을 당한 남성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이번 보고서는 2015년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를 연구원에서 다시 분석한 결과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젠더 괴롭힘은 탕비실 정리같은 ‘성역할 강요’가 가장 많았고, ‘부적절한 호칭’, ‘연애 등 사생활 간섭·무시’, ‘외모 비하’,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괴롭힘 목격’, ‘육아·출산에 대한 비난’ 등 순이었다.

젠더 괴롭힘은 성비가 균등한 사업장일수록 자주 발생했는데, 이는 남성과 여성이 조직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슷할수록 업무와 관련해 접촉이 많고, 갈등 상황이 발생할 기회가 더 많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또 성별에 따른 불이익이 있는 조직일수록 다른 조직에 비해 젠더 괴롭힘 경험 횟수가 현저히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원은 “모든 유형에 걸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자주 젠더 괴롭힘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젠더 괴롭힘을 법적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제재할 제도나 정책을 마련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갈 길 먼 ‘남녀고용평등’

젠더 괴롭힘을 겪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을 현 상황에 맞게 고쳐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애초 성별에 따른 불이익을 주는 등 ‘직접적 차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1999년 개정에서 직장 내 성희롱을 고용상의 성차별행위로 규정하는 등 ‘간접적 차별’로까지 폭이 넓어졌다.

이 법에선 ‘직장 내 성희롱’을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인 언어나 행동 등으로 또는 이를 조건으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거나 또는 성적 굴욕감을 유발하게 하여 고용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했다.

문제는 젠더 괴롭힘이 단순히 성희롱만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성폭행이나 성추행같은 물리적 폭력이나 고용관계 상의 직접적인 불이익처럼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성별에 관한 상대의 발언에서 불쾌감을 느꼈다면 젠더 괴롭힘에 속한다는 게 여성계의 의견이다. 현행법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같은 젠더 괴롭힘은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최근 대한변호사협회가 여성변호사 70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면접에서 성차별적인 질문을 받았다’고 응답한 변호사는 380명(54.1%)에 달했다. 사회적 지위가 결코 낮지 않은 여성변호사들이지만 “미인계를 써라”, “애교를 떨라”, “재판부에 다 줄 것처럼 굴어야한다”는 등 젠더 괴롭힘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단체 등에선 남녀고용평등법에 ‘성별 등과 관련해 근로자의 존엄을 침해하거나 위협·비하·굴욕적 행위를 의도적으로 하거나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라는 내용을 명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젠더 괴롭힘의 명확한 규정을 통해 차별금지법제에서 규정하는 차별 구제신청 절차나 소송법상의 조항을 활용할 수 있다는 실익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성차별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아울러 사회 전체의 ‘젠더 감수성’이나 성차별적 관행, 인식 자체를 바꿔야한다는 지적이 높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12월 발간한 ‘국제성평등지수를 통해 본 성 불평등 실태 및 시사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평등 수준은 조사 대상 144개국 중 116위를 기록해 최하위 군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사회가 성차별에 둔감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명예고용평등감독관’이다.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이정미 의원(정의당)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등을 감시하는 ‘명예고용평등감독관’ 4790명 중 남성이 3595명으로 75.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성차별·성희롱 피해자 대부분이 여자인데다가, 감독관의 역할이 피해자에 대한 상담과 조언 등이란 점에 비춰봤을 때 여성 감독관 비율이 높아져야한다는 지적이 강하다. 이 의원은 “직장 성차별 등 불평등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높여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한편 최근 성차별 관행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도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해 직장 내 성희롱, 성차별, 압박 및 부당 면접, 업무시간 외 연락, 야근 및 주말 출근 등 총 5가지 사연을 선정해 직장인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는 ‘찾아가는 핵사이다 액션’ 캠페인을 벌였다. 사연에 따라 해당 상사 앞으로 성희롱 예방 안내서 배달, 행운의 편지 배달 및 회사 앞 피케팅이 실시됐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임윤옥 상임대표는 “여직원들이 커피타는 문제 등 ‘진작에 이 정도는 없어졌겠지’하는 성차별적 관행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며 “특히 비정규직 여성의 경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저항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성차별적 직장문화를 꼬집고, 각계에서 인권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