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평생을 '투견'으로 살아온 베토벤의 서글픈 말로

천선휴 기자 2017. 2. 1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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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투견'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베토벤. 베토벤은 현재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 케어 입양센터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 News1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 17일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 케어 유기동물 입양센터.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다른 개들과 어울리기 힘든 유기견들의 임시 거처인 일명 ‘환자방’ 앞에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김은일 입양센터 팀장은 그 방에 들어가려는 자원봉사자를 향해 뜻 모를 당부를 건넨다. “나오지 않게 잘 들어갔다가 나오셔야 해요.”

김 팀장이 자원봉사자에게 의아한 부탁을 한 이유는 입양센터 해당 방에 기거하는 덩치 큰 개 베토벤 때문이다. 베토벤의 몸무게는 약 40㎏. 김 팀장은 “힘이 얼마나 센지 베토벤을 옮기려면 성인 남성 두 명이 달라붙어야 한다”면서 “오랫동안 힘쓰는 훈련을 받아와서인지 저렇게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힘이 장사”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 베토벤이 이렇게 힘이 센 이유는 바로 일생을 싸우기 위해 일생을 살아 온 투견(鬪犬)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투견장을 벗어난 건 불과 한 달 전. 지난달 15일 경기 광명시의 한 공터 비닐하우스에서 벌어진 투견 도박판에서 급습한 경찰과 케어 관계자들에게 구조됐다.

김 팀장에 따르면 당시 베토벤은 수십명의 도박꾼들이 둘러싼 경기장 안에서 상대 개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도박꾼들은 베토벤과 상대 개가 피를 철철 흘리며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을 보며 판돈 수천만 원을 걸었다.

경찰과 케어 관계자가 급습한 투견 도박 현장에서 발견한 베토벤. 베토벤은 당시 심한 부상을 입은 채 경기장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사진 케어 제공) © News1

경찰이 들이닥치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이 도박판에 있던 사람들을 잡는 동안 베토벤은 케어 관계자들의 손에 구조됐다. 당시 베토벤을 구조한 케어 관계자는 “베토벤의 입가와 온몸에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고통스러운 듯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면서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베토벤의 모습이 가슴 아팠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모두 지켜본 수의사와 케어 관계자들은 베토벤이 승률 조작에 이용됐을 거라고 추측했다. 덩치만 클 뿐 성한 곳이 없는 데다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것처럼 비쩍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빨마저 몽땅 상해 나이조차 추정할 수 없었다. 현장에 있던 한 도박꾼이 “투견장에서 6년 전부터 봤다”고 증언한 것으로 미루어 여섯 살 이상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온몸 곳곳에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베토벤. 수의사가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 (사진 케어 제공) © News1

정밀검진 결과도 안 좋았다. 우선 신장이 정상이 아니었다. 신부전증으로 혈액투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투석하기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수의사는 일단 베토벤의 컨디션이 좋아지고 살이 쪄야 투석할 수 있다고 했다. 김 팀장은 “살을 찌우기 위해 자율급식으로 사료를 처방하고 약도 하루 두 번 세 종류를 먹이고 있다”면서 “덕분에 살이 많이 올랐다”라고 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미래는 밝지 않다. 나이가 많은 데다 이미 정신적·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때문에 입양 가정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한 번 투석을 받는 데 수백만 원이나 드는 상황에서 베토벤을 맡아줄 가족이 나타날 리 없다.

투석한다고 해도 건강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투석 받은 후에도 죽을 때까지 약을 먹고 정기적으로 피 검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슬픈 건 베토벤을 최소 6년간 투견장에 투입한 주인이 끝까지 베토벤을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 누구도 베토벤의 본명을 알지 못한다.

김 팀장은 “베토벤과 함께 구한 화랑이는 주인이 나타나 ‘화랑이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베토벤은 주인도 나타나지 않았다”면서 “화랑이는 나이가 어리고 건강해 몸값이 300만원 정도인데, 베토벤은 돈이 되지 않으니 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베토벤은 주인에게 끝까지 이용만 당하다 결국 외면당하고 버려진 아이”라며 씁쓸해 했다.

방 밖으로 나오려고 문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베토벤의 모습. 훤히 드러난 갈비뼈가 베토벤의 그간의 고생을 보여주는 듯하다. © News1

사람들 생각처럼 투견은 공격적이지 않다. 투견은 스테로이드제나 마약성 약물을 맞아 가며 근육과 공격성을 높이고, 상대 개를 물어뜯도록 오랜 동안 학대해 만들어진다. 경기장에선 으르렁거리며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지만 사람 앞에선 그저 순한 개다. 베토벤 역시 평범한 반려견일 뿐이다.

김 팀장은 “큰 덩치 때문인지 사람들은 물론 다른 개들도 다들 무서워하지만 베토벤은 만져주면 몸에 얼굴을 파묻고 체온을 느끼는 평범한 개”라면서 “사람을 좋아하는 베토벤이 이런 관심과 사랑을 이제야 받는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남은 생이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고 했다.

ssunhu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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