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잘나갔는데.. 내 팬 다 어디로 갔지 말입니다"

입력 2017. 2.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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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군대 건빵 이야기

[동아일보]

○ 건빵 전성시대

“건빵 좋아하셨어요?”

1970년대 초반 강원 양구군 육군 2사단에서 복무했던 손갑섭 씨(65)에게 기자가 물었다. “건빵 보급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다 먹어치웠어요. 늘 배가 고팠으니까요. 관물대(병사들의 개인 보관함)에 넣어뒀다가 나중에 먹고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1970년대, 물론 당시 최고의 간식은 PX(국방마트)에서 파는 라면이었다. 여유가 있는 병사들은 생라면 조각을 전투복 주머니에 넣고 조금씩 부숴 가며 먹었다.

군에서 나오는 간식 중에선 건빵이 단연 최고였다. 건빵이 사실상 군이 보급하는 유일한 간식이었던 탓도 있었다. 손 씨는 “급식이라 해봐야 콩나물국에 김치 몇 조각이 전부였던 시절이었으니까 건빵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과거 건빵은 평범한 음식이었지만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나갔다. 1970년대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인근 기차역에 도착한 입영열차에서 입영자 수백 명이 내려 훈련소를 향해 열을 맞춰 걸어가면 동네 주민들이 몰려들곤 했다. 이들은 일제히 “건빵! 건빵”이라고 외치며 입영자들을 에워쌌다. 입영열차 안에서 저녁 겸 간식으로 보급받은 군용 건빵을 달라는 얘기였다. 군대에 이제 막 들어가는 입영자들은 군용 건빵 맛을 몰랐던 데다 많이 긴장한 탓에 얼떨결에 건빵을 던져주고 훈련소로 향했다.

이들이 건빵을 애타게 찾은 배경에는 빠듯한 살림살이에 보태려는 목적도 있었다. 과거 군용 건빵은 물물교환이 가능한 물품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군 대위 시절 형편이 어려워 단칸방 생활을 하면서 군용 건빵을 간장으로 바꿔 생활한 일화가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87년 12월에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엘리트 군인이었던 노 전 대통령에게도 건빵이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건빵의 이런 무시하지 못할 가치 때문에 과거 건빵 도난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1961년 군용품 수송 열차에 괴한이 침입해 건빵 30여 상자를 들고 도주한 이른바 ‘열차깽’ 사건이 대표적이다. 1960년엔 육군 중사가 부대창고에서 건빵을 훔쳐 민간업자에게 팔아넘기다 붙잡힌 일도 있었다. 병사들과 군 간부들이 먹을 군용 건빵을 아껴 수재민에게 기부한 일은 수시로 언론에 보도됐다. 당시 건빵은 가뭄 피해 지역 어린이들에게 특별 선물로 지급되는 등 ‘다목적 만능 간식’으로 인기를 누렸다.

○ 건빵 쇠락기

“건빵 좋아하세요?”

기자는 최근 서울역에 나가 휴가 나온 병사들에게 물었다. ‘별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과 함께 시큰둥한 답이 돌아왔다. 건빵을 즐겨 먹는다고 답한 병사는 100일 휴가를 나왔다는 이등병이 유일했다.

“이병 때부터 건빵 싫어했어요. 아침에 밥맛이 없을 때 우유에 건빵을 넣어 먹는데(일명 건플레이크) 그것도 가끔이고 거의 다 후임한테 줘버려요.”(김모 상병)

“PX 가면 다른 과자가 많으니까 건빵에 손이 안 가죠.”(손모 병장)

“다들 안 좋아해요. 받으면 안 먹고 그냥 놔둬요. 생활관에 건빵 많이 남아돌죠.”(이모 상병)

“생활관에 9명 있는데 3명은 아예 안 먹더라고요. 저는 옆에 건빵이 있으면 먹긴 해요.”(이모 이병)

천덕꾸러기가 된 건빵 신세를 증명하듯 남는 건빵을 처리하는 노하우까지 등장했다. 정모 병장은 “식당에 밥 먹으러 갈 때 남은 건빵을 가져가서 봉지를 찢어 내용물만 ‘짬통’(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곤 한다”고 전했다. 전역이 10여 일 남았다는 주모 병장은 “쓰레기통에 봉지째 버린다”고 말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지난달 논산훈련소를 찾아 건빵 맛을 보며 “건빵 맛 여전하다”고 했다. 하지만 맛과는 별개로 건빵 인기는 과거만 못하다. 한때 절도범이 노릴 정도로 인기를 누린 건빵은 이제 “그런 시절이 있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추억의 먹거리가 돼 가고 있다.

건빵의 위상 추락은 군이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간식 제공량 추이를 보면 잘 드러난다. 국방부는 지난달 올해 군 급식 및 간식 등에 관한 개선안을 발표하며 건빵 보급량 조정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병사 1인당 연간 36봉지를 지급한 건빵을 올해는 30봉지로 줄이는 내용이다.

2005∼2016년 군은 연간 36∼48봉지(월 3∼4봉지)의 건빵을 꾸준히 지급해왔다. 2013년 연간 24봉지로 줄인 적이 있었지만 이는 ‘특수 상황’이었다. 2010∼2011년 군용 건빵 납품업체들이 업체 선정 과정에서 가격을 담합한 비리가 불거져 방위사업청이 2012년 해당 업체들에 입찰 참여 제한 등의 제재를 가하면서 일시적인 공급 차질이 빚어진 까닭이었다.

건빵 보급 감축 결정에는 병사들의 의견이 크게 작용했다.

국방부는 지난해 8월부터 한 달간 병사 1583명을 대상으로 급식 및 간식 품목별 선호도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건빵 제공 횟수를 줄여달라는 의견이 30.3%로 나타났다. 건빵은 지난해 지급된 간식(컵라면·즉석 쌀국수·떡) 중 ‘감소 희망’ 1위에 오르는 굴욕을 당했다. 컵라면, 떡, 즉석 쌀국수를 줄여달라는 의견은 각각 10.9%(김치맛 컵라면 기준), 17.8%, 22.5%였다.

군 관계자는 “매년 말 전군 급식정책심의위원회를 열어 다음해 제공 품목 및 제공량을 조정하는데 건빵에 대한 병사들의 선호도가 낮고 ‘생활관에 남아 돌아 처치가 어렵다’는 민원이 많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건빵의 지위를 위협하는 요인은 또 있다. 새로운 간식이다. 올해 군은 신규 간식으로 쌀국수 비빔면을 도입하고, 병사 1인당 연간 12개를 지급하기로 했다. 20대 병사들이 열광할 피자빵도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군 당국의 급식 품목 채택·퇴출 심의 절차에 오르지도 못하고 탈락했다. 재도전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고구마타르트, 쌀눈 누룽지, 춘천닭갈비볶음밥 등 각종 용기밥도 군납 간식 시장으로의 진입을 엿보고 있다. 신규 간식 메뉴가 도입돼 간식 종류가 늘어날수록 인기 없는 건빵의 자리는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군용 건빵의 ‘주적’은 PX다. PX를 점령한 현란한 ‘사회 과자’들은 병사들이 건빵에 눈을 돌리지 않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PX 수는 2010년 1978개에서 올해 1월 기준 2194개로 7년 만에 216개 늘었다. 같은 기간 매출은 460억 원에서 860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로 뛰었다. 장병 복지 향상을 위해 만들어진 PX가 창군 이후 계속 보급돼 군과 역사를 함께한 건빵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는 셈이다.

○ 알고 보면 세계 최고 건빵

PX의 영토 확장으로 존재감이 줄었지만 알고 보면 군용 건빵은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이라는 게 군 당국의 설명이다.

현재 군에 납품되는 건빵에는 국내산 쌀이 30% 들어간다. 군은 1993년 쌀 소비 촉진 차원에서 군용 건빵에 쌀을 넣기로 결정한 이후 쌀 함량을 계속 높여왔다. 쌀 함유량은 점점 늘어 13.5%를 유지해오다 2009년 12월부터 30%까지 늘었다. 이 때문에 시중 건빵에 비해 단가가 훨씬 비싸다. “건빵 맛 여전하다”는 황 권한대행의 말은 국내산 쌀 사용량을 늘린 건빵 원료 배합비율 변천사만 놓고 보면 틀린 셈이다. 국방기술품질원 관계자는 “건빵도 빵이어서 쌀을 너무 많이 넣으면 빵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며 “넣을 수 있는 쌀 함유량은 최대치가 30%다”고 말했다. 이어 “쌀이 들어가지 않는 시중 밀가루 건빵이 ‘푸석’한 맛이라면 군용 건빵은 쌀 덕분에 ‘바삭’하다”며 식감의 차이를 설명했다.

쌀 함량이 늘면서 건빵에 5g가량 들어가는 별사탕의 역할은 줄었다. 별사탕은 밀가루 건빵이 입안에서 떡이 돼 목이 막힐 때 침 분비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지만 쌀 비율 30% 건빵은 먹어도 목이 잘 막히지 않는다. 별사탕의 할 일이 적어진 것이다.

군용 건빵에 31.5% 들어가는 밀가루는 고급 품질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계란은 축산물 등급판정기준 품질 2등급 이상을 쓴다. 영양성분은 413Cal(별사탕 20Cal)에 탄수화물 7%, 단백질 5%, 지방이 6%로 구성돼 있다. 품질이나 원료 비율, 영양분 등을 놓고 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중 건빵과 군용 건빵을 동시에 생산하는 A식품 관계자는 “군용 건빵은 원료 입고 단계부터 매달 납품 직전까지 국방기술품질원 직원들의 품질 검사를 일일이 받아야 하기 때문에 품질 검증 시스템이 시중 건빵보다 훨씬 엄격하다”며 “시중 건빵과 비교하면 품질이 비교가 안 될 만큼 좋다”고 말했다. 시중 과자보다 덜 자극적이지만 까다롭게 생산되는 건강식이라는 얘기였다.

알고 보면 참 괜찮은 군용 건빵. 건빵의 품질은 창군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건빵을 대하는 병사들의 관심은 창군 이래 가장 시들하다. 병사들의 선호도가 계속 떨어지면 건빵의 설자리는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결국 건빵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건빵은 전투식량으로서 입지가 나름대로 확고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군 당국은 설명한다. 군 관계자는 “건빵은 유사시 휴대가 편하고 잘 부식되지 않는 대표적인 전투식량이자 비상식량이어서 다른 품목으로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식품”이라며 “병사들이 우유에 넣어 먹거나 튀겨 먹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군의 상징인 건빵을 계속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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