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광장을 일상으로

조현철 서강대 교수·신부 2017. 2. 16.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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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불변한 것이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무관한 듯 보였다. 하지만 20세기 현대 우주물리학은 전혀 다른 모습의 우주를 보여주었다. 우주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없다가 생겨난 것이다. 138억년 정도를 거슬러 가면, 우주의 기원이 되는 사건 ‘빅뱅’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어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공동의 기원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것이 근원적 유대라는 그물망의 세계에서 존재와 생명을 얻고 유지한다. 서로의 덕분으로 존재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실상 나는 배타적 분리로 규정되는 ‘나’만 뺀 세상의 모든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보면, ‘나’를 타자와 분리해 인식하는 근대의 사고는 오만하기보다 어리석다. 근원적 유대로 맺어진 세상은 특정한 삶의 태도를 내포한다. 타자에 대한 존중과 포용과 배려. 내가 있는 것이 기본적으로 타자 덕분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무관심과 배제와 독점의 태도는 세상의 근본 질서인 존재와 생명의 끈을 부정하고 파괴한다. 한데 실제로 우리가 사는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근원적 유대의 세상에서 배타적 분리의 삶을 산다. 촘촘한 그물망에서 생겨난 우리가 모래알로 살아간다. 우리는 일찌감치 자기 생존과 확장의 경쟁으로 내몰린다. 이건 아니라는 의문이 올라와도, 이내 현실의 흐름에 압도된다. 순간의 만용으로 일생이 고달파진다는 우려가 발목을 잡는다. 무감각과 무기력은 세상의 근본 질서를 거스르는 현실에 우리를 순응시킨다.

‘광장’은 기존의 현실과 전혀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동기와 염원으로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같은 것을 요구했다. 모래알 같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존중과 관심과 배려를 자연스레 표현했다. 사람으로 빼곡한 광장에서 나만 빨리, 나만 편하게 움직이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광장은 만물의 근원적 유대가 요청하는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겪고 익히는 자리였다. 그렇게 섬과 섬이 이어졌다. 낯섦과 경계는 친밀과 환대에 자리를 내주었다. 벅참과 활력이 무감각과 무기력을 몰아내었다. 현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가 펼쳐졌다. 우리는 놀랐고, 경탄했다. 광장의 기운은 깨질 것 같지 않던 체념과 절망의 콘크리트에 균열을 냈다. 그 틈으로 변화를 향한 열정과 희망이 솟구쳤다. 광장은 근원적 유대감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광장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아직 그대로인 현실과 맞닥뜨려야 한다. 촛불집회 참여자가 천만을 훌쩍 넘어도, 기존의 현실을 떠받쳐온 주요 법제도는 그대로다. 재벌과 검찰과 언론도 그대로다. 세월호와 가습기 살균제,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일본군 위안부, 노동개악과 농업파탄, 핵발전소와 사드, 4대강과 산지개발 등 산적한 사회적, 생태적 현안도 그대로다. 아무런 실체적 변화도 없는데, 조속한 ‘국정 정상화’를 들먹인다. 이제 막 솟아오른 벅참과 희망의 싹을 재단할 통제된 현실, 안정이란 이름으로 무감각과 무기력과 무관심을 확대 재생산하던 익숙한 현실로 돌아가려고 한다. 막대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현실 권력의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다. 더 이상 광장을 내 일상 저편에 놓아두지 말아야겠다. 광장과 일상을 오가지 말고, 광장을 일상 속으로 들여와야겠다. 광장의 선물인 세상의 근원적 유대의 체험을 내 삶에서 받아들일 때, 광장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라는 현실을 뚫고 들어온다. 아주 작지만, 분명히 현실의 변화다. 나 혼자의 변화로 뭐가 될까, 지레 포기하지 말 일이다. 공연장이 떠날 갈 듯 만드는 관중 전원의 기립박수는 언제나 한 사람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지 않던가. 단 한 사람의 힘이다.

<조현철 서강대 교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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