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를 반팔 입히면 어떡해요" 난 지하철이 두렵다
[오마이뉴스구진영 기자]
|
▲ 경전철 노약자석 유모차 때문에 한 칸만 옆으로 가 달라는 요청을 받아주지 않는 모습 |
ⓒ 구진영 |
둘째를 임신하고 첫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의정부 경전철을 이용한 날이 있었다. 노약자석 끝자리를 양보해주면 나도 앉아갈 수 있고 유모차도 붙잡을 수 있어서 끝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에게 자리를 한 칸만 옆으로 가주실 수 없냐고 물어봤다. 할머니는 자신이 유모차 봐 줄 테니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유모차가 경전철이 설 때 밀릴 수가 있어서 계속 잡고 있어야 하는데요'라고 했더니 안 밀린다며 자신이 잘 보고 있다가 밀리면 잡아준다며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 했다. 한 칸 옆으로 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그 날은 자리에 앉는 걸 포기하고 서서 올 수밖에 없었다.
작년 9월 초였다. 한낮 기온이 24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첫째 문화센터 수업이 끝난 후 경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는데 6개월 차에 들어서는 임신부가 유모차까지 밀고 타니 노약자석에 앉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나보다. 그때부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아니, 애를 반팔을 입히면 어떡해요? 감기 들게?"
"지금 기온이 24도예요. 반팔 안 입히면 더워서 울어요."
"내 손자는 어제 반팔 입혀서 감기 걸렸다니깐? 반팔을 왜 입혔어?"
"한여름에 태어난 아이라서 더위를 심하게 타서 오늘 같은 날 반팔 입어야 해요."
아. 나는 한낮 기온 24도에 반팔 입힌 죄로 등산복 입은 아저씨의 시비를 고스란히 받아줘야 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시비를 걸었다.
"얘 배고파하는데?"
"방금 먹고 왔어요. 졸려서 그래요."
"이거 손수건 물고 있는데 빨리 빼요!"
"이 나려고 간지러워서 그러는 거예요. 괜찮아요."
나는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일어나기 싫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 날은 도무지 짜증을 참기 힘들어서 보건소로 직행했다. 더 큰 임산부 배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
▲ 임산부배지 항공사에서 받은 작은 배지에서 보건소에서 주는 큰 배지로 바꿨다.( |
ⓒ 구진영 |
그 모습을 보며 3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운이 좋았는지 노약자석에 자리가 있었다. 앉은 지 5분 정도 됐을까. 그 순간이 공포가 엄습했다. 술 취한 아저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역시나 표적은 나였다. 일어나라고 일부러 내 다리에 짐을 내려놨다. 그 순간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전화번호 하나를 주문처럼 외우기 시작했다.
'1544-7769. 1544-7769. 1544-7769. 저 아저씨가 시비를 걸다가 혹시라도 내 배를 때리면 바로 문자 해야지 그런데 문자할 시간이 있을까? 미리 써놨다가 전송되게 해놔야지. 그것보다 차라리 서서 가더라도 옆 칸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
▲ 메시지 전송 비상상황이 생길까 두려워 전철을 혼자 탈 때마다 남편에게 미리 연락해놨다. |
ⓒ 구진영 |
'아. 다행이다. 지금 일어나면 40분은 서서 가야 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에이~ 설마 그 정도겠어?"라는 반응이 많다. 그런데 전철을 10번 타면 8번은 이런 일이 발생한다. 요즘엔 워낙 캠페인을 많이 해서 인식이 개선됐지만 그것도 젊은 사람에 한해서다. 자리 전쟁은 '임산부 vs 비임산부'가 아니라 '임산부 vs 노인'이 된 지 오래다. 나는 '임신하고도 밭을 매지 않은 죄'로 노약자석에 앉든 핑크의자에 앉든 노인들의 표적이 됐다.
유모차를 가지고 전철을 탈 때마다 매번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전철에서 내린 후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가면 항상 첫 번째에 타지 못한다. 유모차도 휠체어도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데 그런 사람들을 제치고 빨리 올라가려는 노인들이 엘리베이터를 먼저 장악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가기 힘들어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을 때도 꼭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간다. 그것도 휠체어와 유모차를 밀어내고 말이다.
|
▲ 전철 엘리베이터 유모차도 휠체어도 항상 기다려야한다. |
ⓒ 구진영 |
핑크의자를 졸업하며, 다시는 그곳에 앉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간절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낙서협동조합 빅힙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hipbig.tistory.com/212)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장] '노약자석'을 없애자
- 지하철 노약자석 "약자도 앉을 수 있다"
- "노통 그런 모습 처음" 20년 넘게 회자되는 노무현·김장하 짧은 만남
- 벚꽃 위에 쌓인 눈... 2020년대생 아이들이 걱정된다
- '몰표' 현실화에 이재명 집중견제... "다음 농사 어쩌려고" "이대론 안 돼"
- 건진법사 비닐 뭉칫돈 미스터리... 그때의 '관봉권' 출처는 청와대였다
- 극단시대 한국 대통령의 숙명... 정치보복하면 막장정치 반복
- '학교 가는 게 즐거운 아이들'이 넘쳐나는 곳, 바로 여깁니다
- 미국서 기적 쓴 한국 애니, 다들 엄지를 치켜세웠습니다
- '윤석열 수사방해' 증언했던 검사장 징계... "보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