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는 왜 '히로시마 원폭'을 사과하지 않았을까

입력 2017. 2. 12. 10:06 수정 2017. 2. 1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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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최고조 김영삼 정부 초기
군 위안부 문제 방향 전환
"금전 보상 요구 않겠다" 선언
'도덕적 우위 조치' 호평받아

지난해 오바마 히로시마 방문 때
일 "원폭 사과 요구 않기로" 발표
시오노 나나미 "국격 높여" 칭송

'개인보다 국가 우선주의' 산물
피해자 외면하는 외교 지양해야

[한겨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왼쪽부터),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해 3월29일 오전 청와대 인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과 함께 한-일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토요판]조세영의 외교클럽

24> 국가와 개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토록 오래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1991년에 처음으로 외교 문제가 되었을 때만 해도 몇 년 정도 노력하면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2015년 12월 한·일 양국 정부의 섣부른 합의로 인해 더욱 복잡하게 꼬여버리고 말았다.

1993년 2월 오랜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김영삼 문민정권이 출범했다. 군부 내 사조직의 척결,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 조치를 단행한 덕분에 김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직후의 71%에서 단숨에 80%대로 치솟았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에서도 과감하게 방향을 전환하여 일본에 대해 더 이상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시금 500만원(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추가로 3800만원 지급)과 매월 생활안정지원금, 의료비 지원, 임대주택 입주 등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 조치는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할 테니 그 대신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진상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후세에게 교육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보상 의무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한국 정부는 2005년이 되어서야 위안부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쪽에 책임이 남아 있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분명하게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법률적인 논리가 확고하지 않다 보니, 일본 정부를 상대로 강제성을 인정하고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한다고는 해도 실상은 당당하게 따지기보다는 뭔가 아쉬운 태도로 설득하고 부탁을 하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도쿄의 한국대사관에서 2등서기관으로 일하면서 이 과정을 지켜봤던 나는 가해자를 향한 피해자의 요구가 왜 이런 구차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늘 마음이 답답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굉장히 우호적이었는데도 말이다.

‘국가’만 생각하는 외교관들

김영삼 정부의 발상 전환은 이러한 나의 갑갑한 심정을 단번에 씻어내주었다. 그때부터 한국 정부의 자세가 180도 바뀌었다. 성의 있는 조치를 해달라고 구차하게 부탁하는 대신, 피해자에 대한 지원 조치는 한국이 해결했으니 일본은 알아서 해야 할 일을 하라는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한국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자구조치’라고 불렀다. 한국의 언론도 대부분 이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었다. 1993년 3월30일치 <한겨레>는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고 인도적인 배려도 병행하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이 조처는 일본 정부에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주는 외교적 효과를 겨냥하고 있기도 하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정책 전환에 자극을 받은 일본 정부는 5개월 뒤인 8월4일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고노담화를 발표했고, 드디어 위안부 문제를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1994년 3월 일본 근무를 마치고 예멘으로 떠나면서 나는 위안부 문제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뒤에 다시 한번 이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내가 대일외교에서 드물게 보는 훌륭한 결단이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1993년의 자구조치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다지 큰 평가를 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그런 조치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책을 쓴 어느 학자를 만났을 때, 책의 내용에 1993년의 자구조치가 포함되지 않은 이유를 물었더니 오히려 그런 조치가 있었느냐고 되물어오기에 적지 않게 놀라기도 했다.

대체 이유가 뭘까? 공직을 떠나고 3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외교 현안을 다루는 외교관으로서 국가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반면, 사람들은 국가보다는 피해자 개인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위안부로 끌려가서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일본 정부가 국가의 책임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있는데 왜 함부로 보상 요구를 포기해버리느냐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일본에 대해 제대로 책임을 따져 물은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더 이상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버릴 수 있느냐고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이렇게 피해자들이 선뜻 만족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의 조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나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체면이 구겨졌다는 데 마음 상했던 것이고 국가의 자존심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데 뿌듯함을 느낀 것일 뿐 실제로 피해자들이 얼마나 만족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외교 업무를 맡으면서 각자 처한 입장에 따라서 같은 일이라도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1993년의 자구조치에 대해서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경제통상 분야의 외교 협상에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해당사자가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전에 정부 간의 항공회담에 처음 참석해보니 회의장 밖의 복도에 민간항공사의 관계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신규 노선 개설이나 증편에 대해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상대국으로부터 양보안이 나오면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가서 항공사의 의견을 들어본 뒤에 다시 회의를 속개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협상 결과에 따라 항공사들의 이익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앞서 각 산업 분야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피폭자 의견 무시한 일본 정부

그러나 개별적인 이해당사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분야의 협상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가능하지 않다. 국민 개인이 아니라 국가 전체로서의 이익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정부가 사안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과거사 사죄 문제라든지 교과서 왜곡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 등이 대표적이고 국가 안보에 관한 사안도 마찬가지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 문제이면서도 이해당사자가 분명하다는 특징이 있다. 피해자들의 요구사항도 일본의 책임 인정과 보상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구체성이 있다. 2015년 12월의 합의 내용이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피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결과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엔의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양국 정부의 합의가 피해자 중심의 접근 방법을 충분히 취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2016년 5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인류 최초의 원폭피해지인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방문 계획이 발표되자 과연 미국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에 대해 사죄를 할 것인지 여부에 일찍부터 관심이 쏠렸다. 군인과 일반 시민을 구별하지 않고 10만명이 넘는 생명을 한순간에 앗아간 원폭 투하 행위는 국제법적으로나 인도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당연히 침략전쟁의 원흉인 일본에 대해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가 다수였다. 일본 정부는 오바마가 히로시마 방문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차원에서 일찌감치 미국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로마인 이야기>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오바마의 방문에 앞서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기로 한 것은 너무나 잘한 일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는 “사죄를 요구하지 않고 말없이 손님을 맞는 것이 큰 소리로 사죄를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품위 있다는 인상을 준다”면서, 이런 일본의 태도를 보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같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일본은 국가의 품격이 다르다고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상당히 공감했을 만한 내용이었을 텐데 인터뷰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원폭의 가공할 만한 피해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피폭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국격을 높였다는 시오노의 말이 어떻게 비쳤을까. 아무리 마음속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원폭피해자들의 마음속에는 미국으로부터 한마디 사죄를 듣고 싶다는 깊은 한이 남아 있지는 않았을까. 설사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하더라도 그런 결정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직접 피해를 본 개인들이 아닐까.

영화 <미션>의 아픔 재현되는 국제사회

국제사회에는 국내사회와는 달리 분쟁을 해결해주는 심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국가는 자력으로 국익을 지켜야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국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만일 국가가 없어지면 그 국민은 기댈 곳조차 없게 된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든 원폭 투하에 대한 사죄든 상대국에 그것을 요구해줄 국가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옳든 그르든 조국은 조국이다’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국가는 영원히 존속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류의 역사는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과 긍지가 갖는 무모함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수없이 보여주었다.

1986년 개봉된 영화 <미션>은 18세기 중반 남미의 정글에서 과라니족 원주민을 개종시켜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한 예수회 신부들의 이야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맺은 영토 교환 조약 때문에 과라니족 공동체를 포르투갈에 넘겨주게 된 신부들은 어렵게 쌓아 올린 선교활동의 성과를 모두 포기하라는 불합리한 지시에 저항한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교황청에서 파견된 대주교는 공동체를 넘겨주면 과라니족은 모두 포르투갈의 노예 사냥꾼들에게 희생되고 말 것이라는 신부들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국가는 영원히 존속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희생은 불가피하다’라고.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었고, 북한의 침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한국에서는 특히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토양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국가와 개인은 무엇인가 하는 고뇌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이익이 양보되어야 하는 경우라도 그에 앞서 정책 결정자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고뇌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냉정한 국익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끝까지 개인의 존재를 잊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국가와 민족을 생각한다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보다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망설이는 사람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외교 현장에 있을 때보다 떠난 뒤에 더욱 절실하게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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