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돔 대신 랩? 10대에게 피임 접근권을 허하라
[경향신문] 청소년 지원단체에서 일하는 김선희씨(가명)는 최근 한 청소년과 상담을 하다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이성교제를 하는 10대들 중 애인과의 성관계 시 콘돔을 구하지 못해 ‘비닐봉지’나 ‘랩’을 피임 자구책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콘돔은 비싸고, 고등학생이 막 사기도 부끄러운데 피임을 안 하기엔 임신이 걱정되니까”라는 것이 이 학생의 설명이었다. 김씨는 “‘깔창 생리대’는 들어봤지만 콘돔 대신 랩을 사용한다는 얘기에 경악했다”면서 “청소년들의 피임에 대한 접근성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말했다.
‘랩 콘돔’은 피임법이라고 볼 수 없는 데다 여성의 몸에도 매우 위험하지만, 네이버 지식인 등 주요 포털사이트 게시판엔 이미 몇 년 전부터 청소년들의 관련 문의들이 줄을 잇는다. “콘돔을 못 구해서 랩으로 싸고 했는데, 너무 불안해요”, “남자친구랑 비닐을 끼고 관계를 했는데, 비닐이 살짝 찢어진 것 같은데 임신 가능성이 있나요?”, “비닐봉지로 피임하면 비위생적이라고 하던데, 그럼 봉지를 깨끗이 씻고 하면 괜찮아요?”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든, 청소년 중 일부는 이미 섹스를 하고 있거나 멀지 않은 미래에 이를 선택지로 받아들게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성적 실천은 여전히 ‘금기’다. 청소년의 성에 대한 관심과 실천은 유예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사회가 인정하는 10대의 연애 역시 성적 행동이 배제된 관계로 한정된다. 그러나 이 ‘금기’로 인해 청소년과 성인을 막론하고 피임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여전히 견고하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정확한 피임지식, 자기결정권이 중심이 된 성지식이 성교육의 중심이 돼야 하지만 한국의 성교육은 대부분 10대의 성행위를 억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과적으로 피임에 대한 무지는 더욱 위험한 10대의 섹스를 부를 것”이라며 “‘랩 콘돔’은 그 하나의 예일 뿐”이라고 말했다.
편의점이나 슈퍼마켓 등에서 판매자들이 청소년도 콘돔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청소년이 무슨 불장난이냐’는 선입견으로 판매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슈퍼마켓 직원은 “술·담배와 마찬가지로 미성년자에겐 콘돔을 팔 수 없다”고 했다. 콘돔 진열대에 아예 ‘미성년자 구입 금지’ 딱지를 붙인 편의점도 있었다. 반면 서울 송파구의 한 편의점 주인은 “중·고등학생들도 종종 콘돔을 사간다”면서 “이런 것도 사가는데, 요즘 애들을 옛날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며 계산대 옆에 놓여져 있던 임신진단키트를 흔들었다.
온라인에서는 더 어렵다. 네이버·다음 등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콘돔’을 검색하면 뉴스 등 일부 항목을 제외하고는 정보 접근이 차단돼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하려면 로그인 등 성인 인증을 거쳐야 한다. G마켓, 11번가 등 대형 인터넷 쇼핑몰에서 콘돔을 검색해도 ‘19금’ 마크와 함께 “본 상품은 청소년 유해매체물로서 19세 미만의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다”는 문구가 뜨며, 연령 인증 절차를 밟도록 하고 있다.
이는 청소년에 대한 특수형 콘돔 판매를 금지한 여성가족부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청소년 유해물건 고시’(2011년 4월)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여가부 고시가 정한 청소년 유해물건은 요철식 특수콘돔(돌출형 콘돔), 약물 주입 콘돔(사전지연형 콘돔) 등 특수콘돔이다. 이외에 일반형·초박형 콘돔은 청소년도 살 수 있다.
여가부의 설명도 비슷한데, 여가부 관계자는 2015년 말 한 언론에 “청소년들이 성관계를 할 때 쾌락을 느낄 우려가 있어 판매를 금지했다”고 말해 논란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해당 발언이 보도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그럼 청소년이 쾌락을 느끼려고 섹스하지, 임신을 목적으로 섹스하냐.”
문제는 여가부가 “누구나 접속할 수 있다”고 해명했던 온라인 콘돔 판매 사이트에 대한 청소년 접속은 여전히 어렵다는 점이다. 일반 콘돔과 특수형 콘돔을 일일이 구분해 팔기 어렵다보니 개별 쇼핑몰은 물론 주요 포털사이트들도 일괄적으로 ‘19금’ 인증장치를 해둔 탓이다. 한 콘돔 판매업체 관계자는 “대부분의 판매회사들이 여러 종류의 일반형·특수형·초박형 콘돔 등을 동시에 판매하는데, 이를 분류하기가 쉽지 않아 통으로 검색 제한을 하는 것”이라며 “일단 걸려서 벌금을 내는 것보다는 판매자 입장에서 안전한 선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소년 피임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보다 청소년의 성과 피임, 그 자체에 대한 사회적 시각일 것이다. 누구나 안전하게 임신을 선택하거나 피할 권리가 있지만, 이는 유독 청소년들에게는 예외다. 그만큼 청소년에게 성과 욕망은 ‘있지만 없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올해 초 충북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여고생이 아기를 출산하고 곧 숨지자 이를 소화전 등에 숨겨오다 사체유기 혐의로 경찰에 입건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물론 10대의 출산과 영아 유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일제히 ‘철없는 10대’, ‘무지해서 비정한 모정’ 등의 제목을 달아 이를 보도했다.
그만큼 청소년의 임신과 출산, 혹은 낙태는 소수의 비행이나 비극으로 여겨지고, 임신한 청소년에 대한 자퇴 권유가 공공연하게 이뤄질 정도로 이들은 사회에서 수용 불가능한 존재로 취급된다. 청소년의 임신, 출산, 낙태가 정말 심각한 사회문제라면 이를 예방하기 위한 피임교육이 무엇보다 강조돼야 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여전히 피임보다는 순결교육이 우선된다.
그렇다면 교육 현장의 성교육 실태는 어떨까. 다음은 교육부가 체계적인 성교육을 하겠다며 2년간 6억원가량의 연구비를 쏟아부어 2015년 내놓은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내용이다.
성폭력 대처법 생각하기-이성 친구와 단둘이 집에 있을 때/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초등 3·4학년 교사용 지도서)
남성은 돈, 여성은 몸이라는 공식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서는 데이트 비용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원치 않은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등)
남성의 성에 대한 욕망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충동적으로 급격하게 나타난다.(초등 1·2학년)
이런 식의 성교육은 어떤 국가에선 ‘불법’이 될 수도 있다. 미국 8개 주는 성교육의 내용이 문화적으로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며, 13개 주는 성교육 내용이 의학적으로 정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남성의 성은 충동적’이라는 교육이 그 자체로 불법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얘기다. 논란이 커지자 교육부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해 표준안 수정을 위한 정책연구를 진행하고 3월 새학기부터 새 표준안을 각 학교에 배포할 계획이었지만, 정책연구 결과 표준안 자체는 수정하지 않고 일부 교사용 참고자료만 고치기로 해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특히 성소수자와 동성애 관련한 내용을 표준안에서 제외하는 기존 방침을 유지키로 해 비판여론이 거세다.
한국은 피임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의료적 행위가 비급여로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10대 피임약 처방의 65%(2015년 기준)를 차지하는 응급피임약(사후피임약) 역시 비급여인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 처방과 구입에 3만~4만원이 들어간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현재와 같이 피임에 대한 교육과 인식이 척박한 상황에서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것은 응급피임약 의존을 더 높일 수 있어 당장은 시기상조일 수 있으나, 피임에 대한 의약품 접근권은 궁극적으로 높아져야 한다”면서 “장기적으로는 피임약에 대한 보험급여화와 함께 피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공적 재원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표지]10대 때 못배운 피임 이제라도 배워보세
- 윤 대통령, 이재명 대표에 총리 후보 추천 부탁하나…첫 영수회담 의제 뭘까
- 조국혁신당 “윤 대통령, 4·19 도둑 참배” 비판···이재명·조국은 기념식 참석
- 이미주-송범근 ‘열애’ 팬들은 알고 있었다···이상엽도 응원
- 조국·이준석·장혜영 “채 상병 특검법 통과를” 공동회견… 범야권 ‘1호 공조법안’ 되나
- “선거 지고 당대표? 이재명식 정치문법” 한동훈 조기 등판에 부정적인 국민의힘
- 국정원 “‘강남 학원가 마약음료’ 필로폰 총책, 캄보디아서 검거”
- 이스라엘의 군시설 노린 재보복, “두배 반격” 공언 이란 대응 촉각 …시계제로 중동 정세
- [단독]해병대 사령관·사단장, 비화폰으로 수차례 통화…추가 검증은 미제로
- 김재섭 “국민의힘 지지층, ‘젊은 당대표’에 트라우마···난 제2의 이준석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