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잉어왕>-남성중심 서사로 애꿎은 여성 만 질타하네

2017. 2. 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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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왕>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간극은 매우 큰 편이다. ‘나쁜 년’ 아니면 ‘천사’ 두 부류로만 나타난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은 매우 고전적이고 폭력적인 사고방식이다.

명절이 끝났다. 명절이 지나자마자 나는 친한 친구 A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결혼 후 첫 명절, 고달픈 차례상을 이제 막 치우자마자 시어머니가 다음 달 예정된 시부모님 생신 때 꼭 ‘며느리가 차린 생일상’을 받고 싶다 했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힘들긴 하겠지만 아들을 결혼시킨 후 맞는 첫 생일인데 외식으로 ‘때울’ 수 없다며 시어머니는 강고한 의지를 내비치셨다고 했다. ‘며느리가 차린 생일상’이라니 언제 적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웹툰에서도 이런 구시대적 유물이 발견됐다. 다음에 연재 중인 웹툰 <잉어왕>에서였다.

아내·며느리는 아들 책무를 대리할 사람

문제는 주인공인 30대 싱글 남성 ‘잉어’가 부모님댁에 내려가 김장을 돕는 장면에서 촉발됐다. 작중에서 ‘잉어’는 어머니에게 “엄마, 다른 집은 이때쯤 되면 며느리 들여서 같이 김장할텐데… 미안하우~ 좀 더 기다려줘” 하며 멋쩍게 웃는다(251화). 김장철에 처음 내려와 일손을 돕는 아들이 하는 말치고는 너무나 옹색했다. ‘그동안 못 내려와서 미안하우’가 아니라 며느리가 돕게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잉어의 대사 속에, 아내·며느리는 아들의 책무를 대리할 사람이자 시댁의 무급 노동자였다. 독자들이 댓글을 통해 난투극을 벌이는 가운데에도 작가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연재를 묵묵히 이어갔다. 다음 화에는 설상가상 동네 아줌마들끼리 모여 함께 김장을 담그는 장면에서 ‘석이 집 며느리는 김장을 하러 오지 않는다’는 뒷담화가 등장했다. 같은 화의 수다 내용에서 유추하기로 ‘석이네 며느리’는 이제 막 세 살이 된 애가 한 명 있는 데다가 둘째까지 임신한 상태다. 재작년, 작년, 올해도 육아와 임신 중인 ‘석이네 며느리’를 ‘김장하러 오지 않은 며느리’로 비난하고 있었다. 최근 도입된 웹툰 미리보기 서비스에 의해 이 에피소드가 미리 그려져 있던 회차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지난 화 독자들의 반응을 조금이라도 존중한다면 이 대사는 수정되어야 했다.

<잉어왕>은 30대 싱글 남성 ‘잉어’가 주인공인 생활툰으로, 원래 남초 커뮤니티에서 연재되다가 다음으로 옮겨 와 정식 연재를 시작했다. ‘평범한 일상을 통한 공감과 인간애’(‘작가의 말’ 중)를 꾀한다는 <잉어왕>은 연재 초창기 때부터 비슷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잉어왕>의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민폐갑’이거나 ‘천사’다. 이를테면 차가 없어 BMW(Bus-Metro-Walking)를 애용한다는 남성들에게 ‘꺼져’라고 일침을 날리는 여성들이 길거리에 주차된 벤츠는 보며 감탄한다(20화). 컴퓨터공학과 출신인 ‘아프로’(잉어의 친구)에게 대뜸 PC를 추천해달라고 한 뒤, 이후 6년 동안 새벽녘에도 전화해 컴퓨터 AS를 요청하는 누나도 있다. 어떤 여성은 비 오는 날 ‘잉어’가 건네준 우산을 길거리에 버리고 가버린다.

피터몬 작가의 만화 「잉어왕」의 한 장면. / 다음웹툰

그런 반면 돈 없는 남자친구를 늘 배려하여 대신 계산하거나 먼저 걷겠다고 하는 훈훈한 여자친구도 등장하고(이 여자친구는 ‘잉어’와 헤어진 이후에도 완전한 ‘천사’로 그려진다. 이별마저도 애틋해서,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잉어’의 꿈속에 그리운 연인으로 등장한다), 본인도 육아·가사일에 지쳐 있지만 자주 아프고 쓰러지는 남편 ‘곰과장’을 배려해 홍삼을 달여 먹이고, 늘 웃음으로 대해주는 너그러운 와이프도 있다. <잉어왕>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간극은 매우 큰 편이다. ‘나쁜 년’ 아니면 ‘천사’ 두 부류로만 나타난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은 매우 고전적이고 폭력적인 사고방식이다. 자의적인 기준으로 여성을 분류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성은 ‘천사’로, 그렇지 않은 여성은 ‘악녀’로 호명하는 것이다.

남성 캐릭터들 한결같이 ‘인간적’으로 묘사

반면 남성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이다. 여성들에게 속없이 이용당하거나 도끼병이나 멋모르는 판타지에 심취하기도 하고, 그 옛날에는 풋풋한 첫사랑을 나누기도 했던 건전한 남성들이다. 기부도 많이 하고, 생색내지 않으면서 모르는 척 남을 배려하기도 한다. 한참 나이가 어린 편의점 알바생에게 대시하고, 고속버스 옆좌석에 앉은 여성에게 대시하기도 하는 추태를 부리기도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그저 ‘웃픈’ 에피소드 정도로 가볍게 다루어진다.(여성 입장에서 봤을 때, 처음 보는 남성이나 모르는 남성이 대시하는 건 결코 가벼운 소재가 아니다. 때로 그건 위협적이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여성 캐릭터를 이분화하여 표현하는 <잉어왕>은 여성 억압적인 현실을 작품 속에서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 바텐더, 개발자, 직장인 등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남성 캐릭터에 비해 여성 캐릭터는 직장동료(미혼)와 전업주부로 한정되어 있다. 워킹맘, 자영업 여성, 공대 여성 등은 <잉어왕>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캐릭터를 단지 평면적으로 그려내는 건 윤리적으로도 맞지 않지만 작품성 측면에서도 좋은 길이 아니다. 캐릭터에게 갈등이 있고 고민이 있어야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남성이 배치해놓은 세계 안에 모든 답이 정해져 있는 <잉어왕>의 여성 캐릭터들은 갈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남성의 서사에 맞추어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역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잉어왕>의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은 ‘왜 나는 연애를 못할까?’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 자체는 유용하다. 가장 사적인 계기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세계를 탐구해나가는 발판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어왕>이 오랜 연재 기간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유사한 논란에 휩쓸리는 것은, (그리고 논란이 일 때마다 ‘찌질한’ 남성들의 모습은 한층 더 강화된 건전함, 성실함 등으로 무장된다.) 기본적으로 이 질문을 탐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늘 유사한 에피소드를 반복시키다보니 전체적인 서사가 관성적이게 되고, 캐릭터들의 일상 역시 깊어지지 않는다. 감동이 필요할 땐 가족과 직장에 헌신적인 ‘곰과장’과 ‘곰과장’에 더 없이 헌신적인 아내를 빚어내어,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로 ‘깊이’의 빈 자리를 채운다.

나는 ‘잉어’가 효심 깊은 아들, 배려 깊은 직장 동료, 속으로 참는 남성에 머무르기보다 스스로를 성찰하며 자신의 여성관을 탐구했으면 한다. 자신이 연애하지 못하는 이유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거나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찾지 말고, ‘왜 나는’이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 좀 더 깊이 있게 파고들었으면 한다. 여자들은 BMW족을 싫어해서, 여자들은 벤츠를 좋아해서… 남성이 지니는 불안정한 감정에 왜 항상 여성이 원인처럼 지목되는가. 이제는 스스로도 대답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이성과의 섹스보다 관계에 집중하면서 순간마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깨달아가며 발전하는 ‘잉어’를 보고 싶다. 애꿎은 여성을 질타하지 않고도 남성만의 서사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좀 봐도 될 때가 아닌가.

<조경숙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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