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엔딩' 부르기 전에 끝내고 싶어! 촛불 100일 인터뷰

[한겨레] 5일로 촛불이 타오른 지 100일째다. 단풍이 절정이던 지난해 10월말 시작해 어느덧 봄을 알리는 ‘입춘’이다. “이게 나라냐”는 황망함으로 광장을 찾은 시민들은 “촛불은 바람 불면 다 꺼진다”는 비아냥에 거센 들불처럼 분노했다. 국회가 결국 광장 민심을 좇아 대통령을 탄핵했을 땐 기뻐 울기도 했다. 하지만 견고한 대통령의 버티기에 시민들은 다시 광장에 모여 “탄핵”을 외친다.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큼 멀리 와 있는지를. 광장을 채웠던 진짜 주인공들의 힘 덕분이라는 것을. 그들의 힘으로 맞은 ‘입춘’이다.

■ “첫 집회 끝나고 ‘촛불 커질 것’ 예감” (1차 촛불 준비한 곽이경 국장)

"처음 시작 때 백만 촛불은 농담으로나 이야기했던 희망사항이었죠."

지난해 10월29일,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시민 촛불’을 주최했다. 지금은 1차 촛불로 불리는 집회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실무자인 곽이경 민주노총 대외협력국장은 “1차를 준비하면서 ‘2000~3000명만 와도 많다’고 생각해 최대 5000명 정도가 들을 수 있도록 음향설비를 갖췄다. 그런데 몇 만명이 모였다”고 회상했다. ‘폭발적인 운동이 되겠구나.’ 그는 어렴풋이 직감했다. 일주일 뒤 ‘촛불’은 10배로 불었다. 다시 일주일 뒤에는 농담 속에나 존재했던 ‘백만 촛불’이 현실이 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때 ‘이 판은 우리가 주도하는 판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곽 국장은 3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수많은 투쟁 실무를 맡아온 곽 국장은 “‘이번 촛불을 통해 민주주의가 확장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이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수용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사드, 노동, 여성, 장애인 등 정말 우리사회의 모든 이슈가 제기됐는데, 시민들이 정말 경청하고 공감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100일간 곽 국장은 토요일 촛불 집회를 치르고 일요일 새벽에 집에 들어간 뒤 잠깐의 꿀잠을 맛보고 일요일 오후에 출근해 일주일 꼬박 집회를 준비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동안 준비한 회의 자료만도 5000쪽이 훌쩍 넘는다. 집회 당일에는 100명이 넘는 실무진이 실시간으로 점검해도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아 정신이 없다. 곽 국장은 “지금까지는 시민들 덕분에 순항해왔다. 문제는 지금부터”라며 “박 대통령 쪽은 탄핵 지연전략을 쓰고, 보수단체의 반격이 거세지는 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처하느냐가 가장 큰 고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수의 입은 박 대통령, 실사판도 보고싶어요” (박대통령 등신대 만든 최황 작가)

“잘못에 대해 죄값을 치르는 모습을 ‘실사판’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나름대로 표현해 본 것인데 가는 곳마다 생각지 못한 주목을 받았네요.”

미술작가 최황(32)씨는 지난해 11월26일 파란 수의를 입은 박근혜 대통령 등신대(실물크기로 제작된 조형물)를 들고 5차 촛불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광장에 나왔다. 6차 촛불집회에는 최씨가 만든 것과 같은 모양의 박 대통령 등신대 수십개가 촛불집회에 등장했다.

그가 만든 최초의 수의 입은 박 대통령 등신대는 지난해 12월31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보수단체 집회에서 부숴졌다고 한다. 최씨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들어 저를 밀쳐내며 등신대의 머리와 몸을 뜯어내더니 누군가 ‘용안’만 가슴에 품고 달아나셨다. 집에는 몸통만 보관하고 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최씨는 촛불 100일 동안 광장에 넘친 해학과 풍자의 풍경을 만든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최씨는 지난 100일동안 자신이 느낀 광장을 “단순한 정치혁명을 넘어 모든 권위적인 것들과 꼰대스러운 것들을 거부하는 문화적인 움직임”이라고 표현했다. 100일 동안 다채로운 색깔로 표현된 광장은 단일한 정치적 구호가 반복된 이전의 시민혁명과 사뭇 다른 풍경을 빚었다.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스티커, 조형물, 음악이 주말마다 광장에 넘쳐났지만, 소수자에 대한 비하나 노골적인 폭력성이 담긴 것들은 외면받았다. 최씨는 “정치적인 이슈로 시작됐지만 ‘거악’에 대응하는 우리의 방식을 성찰해 볼 기회를 얻은 것이 무엇보다 뜻 깊었다”며 “대통령 퇴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고민들을 통해 진짜 민주주의로 사회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요즘은 특검 연장 메시지가 많아요” (‘박근핵닷컴’ 개발한 강윤모 지사장)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시민들이 지역구 의원들에게 대통령 탄핵 관련 의견을 전할 순 없을까?’

2016년 10월29일 1차 촛불집회가 시작됐을 때 아이티(IT) 스타트업 피스컬노트의 강윤모 한국 지사장은 스마트폰으로 시위 중계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곧장 다른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3명을 모아 ‘인터넷 광장’ 개발에 착수했다. 특별한 섭외 기준은 없었다. “페이스북으로 집회 생중계를 함께 보던 ‘페친’ 중에 개발자 2명이 있어서 ‘같이 하자’고 연락했습니다.” 박근핵닷컴에 강씨와 함께 로빈, 알렉스, 제인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와있는 이들은 모두 아이티 스타트업에서 근무 중이지만 자세한 소속이나 신분을 밝히긴 꺼려했다.

한달이 조금 지난 12월1일, ‘박근핵닷컴’이 등장했다. 대통령 탄핵에 관한 의견을 국회의원에게 청원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이 누리집은 공개되자마자 큰 화제를 모았다. 이튿날 실시간검색어 1위에 올랐다. 누리집은 쉽고 직관적이었다. 92만건이 넘는 청원메시지가 ‘박근핵닷컴’을 통해 국회의원들의 전자우편함으로 날아갔다.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이 5만8000여건으로 가장 많은 청원메시지를 받았다. 의원들은 실제로 큰 압박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어쩌면 탄핵 가결의 1등 공신일지도 모른다. 국회의원들이 “청원을 보내준 분들과의 직접 소통을 원한다”며 ‘박근핵닷컴’팀에 알려와, 현재 누리집엔 18건의 의원들 답변 전문도 게재돼 있다. 구글이 발표한 ‘2016년 한국의 뉴스·사회 분야 인기 검색어’에서 ‘박근핵닷컴’은 1위 ‘지진’ 2위 ‘알파고’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초기엔 사비로 서버 비용을 감당했다. 사람이 몰리면서 서버 비용이 폭증해 온라인 결제 서비스 페이팔과 개인계좌로 후원을 받았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7000여만원이 모여 페이팔로 받은 4000만원은 나중에 되돌려줘야 할 정도였다. 강씨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올렸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돈을 보낼지 몰랐다. 정말 많은 분들이 탄핵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탄핵안 가결 뒤 서비스 개편을 바라는 이용자들의 제안이 쏟아졌다. 헌법재판소나 특검을 응원하는 서비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서비스 등이다. ‘박근핵닷컴’팀은 헌재의 탄핵 결정을 지켜보며 서비스 운영 방향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박근핵닷컴’팀은 ‘님들은 독립군입니다, 님들의 수고가 촛불시위의 화룡정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어느 시민의 메시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여전히 ‘박근핵닷컴’엔 ‘특검 연장’ 등의 청원메시지가 올라오고 있다. 국회의원들 전자우편함에도 쌓이고 있을 것이다.

강씨는 2014년 지방선거 때 후보 정보를 알려주는 ‘우리동네후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없다”며 지인들은 말렸다. ‘박근핵닷컴’으로 다시 한 번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열기를 확인한 그는 더이상 지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 “18살 투표권 꼭 얻어낼 겁니다” (고2 김혜나양)

“이전에는 학교 안에만 갇혀서 지내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력감을 많이 느꼈어요. 그런데 집회 나오면서 나도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바뀌는 게 있구나, 이게 제일 큰 것 같아요.”

김혜나(18·정의여고 2)양은 촛불 100일이 가장 크게 바꾼 것은 자기자신이라고 했다. 뉴스와 영상으로만 집회를 보던 김양이 처음 촛불집회에 나온 것은 지난해 11월26일 5차 집회였다. “대통령과 최순실한테 화가 난 것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냥 거기에 함께 있고 싶었어요. 텔레비전에서 촛불 파도타기하는 걸 봤거든요.”

수능을 치른 수험생들이 대거 참가했던 4차 촛불집회 생중계 영상에서 보게 된 촛불 파도타기는 김양의 마음을 흔들었다. 다음주 김양은 혼자서 광화문광장에 나왔다. 김양은 “한마디로 말하면 완전 신세계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니 신났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간 그날 저녁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이란 청소년 단체에서 ‘박근혜 하야 전국 청소년비상행동’ 준비위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바로 가입했고 며칠 뒤 다른 청소년들과 만났다. 김양은 “학교나 집에서는 다 허락을 받아야 되지만, 여기서는 누구한테 허락받지 않고 우리가 정해서 그렇게 하면 된다. 약간 걱정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양은 이번 활동을 통해 청소년들에게도 참정권이 필요하다는 걸 강하게 느꼈다고 했다. 그는 “촛불집회를 계속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툭툭 던지는 한마디들이었다”고 했다. ‘아직도 그런 데 나가냐’, ‘고3이 되니까 이제 공부 열심히 해야지’ 같은 말 속에서 김양은 자신이 어른들보다 미성숙한 존재로 얕잡아 보인다는 것을 느꼈다. 반대로 ‘기특하다’, ‘대견하다’는 칭찬도 마찬가지였다. 김양은 “어른들은 이게 우리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로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청소년이다. 우리도 당사자”라며 “청소년에게 정치적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표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청소년들이 나서서 대통령을 쫓아냈는데, 정작 청소년의 삶이 그대로면 안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허승 방준호 박수지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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