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女교수는 아니지? 다음에 뽑읍시다"

누바방 2017. 1. 31.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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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과학자다 난 계약직이다 난 엄마다-11] 결혼 전 명절 음식 담당은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신랑과 도련님이 했다. 난 결혼과 동시에 해보지도 않던 명절 음식 준비팀으로 편입됐다. 임신 기간 동안(임신 초기엔 거리가 멀어 친정에서 드라마 삼매경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바닥에 쪼그려 앉아 튀김 전을 시작으로 아침, 후식, 점심, 술상, 손님상, 저녁상, 술상 차림을 반복했다. 남편과 나는 결혼과 동시에 명절 음식 준비팀 교체 멤버였다. 도련님도 덩달아 탈퇴를 했다. 도련님은 결혼 전까지 명절에 보기 힘들 정도로 친구들만 만나러 다녔다. 이번 명절 출산 예정일을 3일 남긴 동서는 나와 함께 바닥에 앉아 전을 부쳤다. 도와주겠다며 설거지를 하는 신랑을 보고, 어머니는 "집에서도 자주 하니?"라고 조용히 물으셨다. "그래 뭐, 요새는 도와야 한다고 하더라"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명절 다음날 우리 신랑은 도련님께 장갑을 넘기며 '나도 했으니 너도 해라'라며 설거지를 시켰다. 그걸 본 아버님은 "뭐하는 거냐"라며 묻고 지나가셨다. 뭐하긴, 설거지하는 거지.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두 아이와 시간을 보내시던 시어머니는 손자에게 "네 동생은 여자라 겁이 많아 못하는데 넌 참으로 용감하네"라며 아들을 추켜세웠다. "동생은 아직 어려서 그래. 네가 오빠니까 도와 줄까?"라고 서둘러 끼어들며 '아, 난 이런 집안의 남자와 결혼했던 거구나'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난 가정주부인 엄마 밑에서 자랐고 아빠는 사업으로 늘 바쁘셨기에 항상 모든 집안 일은 엄마가 하는 걸로 알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집안 일을 하는 것이 그냥 당연하다 생각했다. 남편이 집안 일을 하면 "도와준다"고 표현해도 어느 정도는 기분 나쁘지 않게 넘어갔던 것 같다. 집안 일을 떠나 육아에서도 친정 엄마를 떠올리며 내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갖기도 했다. 나의 엄마는 늘 집에 계시며 나를 반겨주셨고 늘 끼니를 챙겨주셨다. 갑작스런 수술로 일주일을 비우셨던 딱 한번 할머니에게 나를 맡기셨다. 난 매일 남에게 나의 아이를 맡긴다. 내가 만약 직업을 가진 엄마의 딸이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나의 경우 엄마와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에, 지금 내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행복한 기억이 많게 해주고 싶다.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내 딸이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려 남편과 살게 됐을 때 서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기를 바라며 매일 남편에게 잔소리를 한다. "딸은 아빠 같은 남편을 만난대. 우리 아빠는 바로 옆에 정수기 있어도 물 달라고 하시는데 내가 딱 그 꼴이다. 우리 딸 나중에 편하게 살게 하려면 자기가 나한테 하는 걸 보여줘야 해. 사회생활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야." 입만 아프지 않길 바랄 뿐이다.

 여성의 역할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직장 생활을 할 때도 크게 나타난다. 어딜 가나 내 나이를 물어서 대답하면 "1~2년 안에 승부를 봐야 겠네"라고 답한다. 대체 왜! 젠장. 기관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지만 공공기관의 경우 나이 많은 여성 과학자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상하 관계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하고 반면에 남자는 군생활도 하고 선천적으로 나이를 불문하고 상하관계에 적응을 잘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군대 다녀와서 사람 된다는 말이 많은데, 그럼 우리나라는 남자 대부분이 다 군대를 다녀왔으니 범죄율도 줄어야 하고 정말 살 만한 세상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군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대를 다녀왔기에 사회생활을 잘 할 것이라는 편견은 없어지면 좋겠다. 말이 샜다. 어떤 기관의 높은 사람은 여자는 나이에 문제가 없으나 되려 나이 많은 남자 과학자는 성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크지 않은 규모의 학과는 더러 여성 교수 수는 제한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동 대학 출신 몇 퍼센트 미만'이라는 규정처럼 드러내놓고 제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 집단에서 주축이 되는 이들은 남성이고, 이들의 남성주의는 일반적으로 여성을 배척한다.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의 이공계 학과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규 교수 임용을 위해 면접이 끝난 뒤 학과 교수들끼리 이야기를 했단다(이 자리에 참석했던 선배 교수가 말해줬다). 나이 지긋했던 한 교수가 "여자는 아직 좀 그렇지? 남자로 뽑지. 분위기 망치지 않게"라는 말을 남겼다. 다른 교수들도 수긍했다. 원서를 냈던 여성 박사의 능력은 다른 남자 박사와 비교했을 때 전혀 뒤지지 않았지만, 이 한마디에 배제되고 말았다. 대체 그 '아직'은 언제까지 아직일까.

 이 글을 쓰던 중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발견했다. 한국사회에서 끔찍하게 좋아하는 '사이언스'에 실린 최신 논문이다. 미국 뉴욕대에서 5~7살이 된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6살 밖에 되지 않은 여자 아이들은 이미 남녀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여자 아이들의 경우 남자 아이들보다 덜 활동적이며 '여성'이 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보다 그나마 능력 위주의 사회로 평가받는 미국에서조차 남녀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렸을 적부터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 한국은 어쩌랴. 이제 갓 3살이 된 내 딸에게 끊임없이 "넌 여자니까 조신해야 돼"라고 말하는 어른들을 보며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엄마·계약직·과학자 누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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