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게만 살아서는 안된다

김기철 2017. 1. 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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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기자
[김기철의 책으로 세상읽기-10]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한나 아렌트의 말'을 다시 꺼내 읽은 것은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가 쓴 '문체부 A과장의 죄'라는 칼럼 때문이었다. A과장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블랙리스트 작성의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다. 그사이 장관도 바뀌고 담당 간부들도 바뀌었지만 A과장은 자리를 지키며 이 임무를 맡았다.

 9급 공채로 시작해 4급 서기관으로 승진한 A과장은 32년간 헌신적으로 일했다고 한다. '국민 앞에 진실을 밝혀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A과장은 "저는 잘 몰라요. 맨 밑에서 일했던 사람이에요. 죄송해요"라며 수차례 거절했다. 기자의 요청이 반복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직에서 지시하면 나가겠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A과장뿐 아니라 '최순실 게이트'로 구속된 대부분의 공직자와 교육자들은 모두 자기 임무에 성실했던 사람들이고 조직의 요구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다.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영화 '자백'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부부와 최승호 PD가 공항에서 마주치는 모습이었다. '간첩조작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느냐'는 최 PD의 질문에 '모르는 일'이라고 답하면서 김 전 실장 부부가 자리를 피하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그 부부는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김 전 실장은 부인을 보호하려고 했고, 부인은 김 전 실장을 막아주려고 했다. "김기춘 전 실장도 집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존경받는 가장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에는 시국사건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쓴 '오기섭'이 수사관 '최달식'에게 고문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설 속에서 오기섭이 가장 괴로워할 때는 최달식에게 고문을 당할 때가 아니었다. 온갖 고문으로 오기섭이 탈진해 있을 때 최달식은 자기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들과 통화한다. 밥은 먹었는지,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았는지, 밤에 뭐 먹고 싶은지, 다른 어떤 아버지보다 다정하고 상냥하게 묻는다. 오기섭은 자신을 잔혹하게 고문했던 자가 '악마'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울부짖는다.

 물론 '악(惡)'은 히틀러 같은 '악인'에 의해 기획되지만 그 '악'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이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정의했다.

한나 아렌트. /사진출처=마음산책
 독일 태생의 유대계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인터뷰해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내놓는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행을 '악의 평범성'으로 개념화한다. 흔히 '악의 평범성'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는 '오독'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그 사람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기를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85쪽)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이에요. 그래요. 그런 무능력."(86쪽)

 그러니까 악은 공감 능력을 상실한 메마른 가슴에 깃드는 것이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악의 참모습인 것이다. 얼마 전 타계한 지그문트 바우만도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악은 애국심이나 의무감을 지닌 첩보요원이 어느 평범한 시민의 삶을 단호하게 파괴할 때 존재할 수도 있다"고 일갈했다.

 아이히만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애국심'이니 '충성'이니 하는 맹목적 가치들(특히 독재정권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사들)이 악의 자양분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아이히만은 그저 '성실한 공무원'이었을 뿐이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도 '성실한 공무원'일 뿐이었고, 댓글부대를 이끈 '좌익효수'도 사실은 '성실한 국정원 공무원'이었을 뿐이다. 세월호 유족들을 고발하라고 배후 조정한 해수부 관리도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성실한 공무원'이었고 블랙리스트 작성에 가담한 사람들도, 최순실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사람들도 모두 '성실한 공무원'들이었다.

 아렌트는 말한다.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아이히만은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여기에 이데올로기는 그다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봐요."(77쪽)  "망설임은 있었죠. 그들은 망설임을 가진 공무원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의 망설임은 인간이라면 그저 한 사람의 공무원으로 존재하기를 멈춰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명확히 보여줄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어요."(95쪽)

 나쁜 권력은 이 한계를 넘는 공무원을 가만두지 않는다. 한직을 떠돌았던 윤석렬 검사가 그 표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겨냥해서 옷을 벗긴 노태강 전 국장이 그 전형이다. 박 대통령은 윤 검사와 노 전 국장을 본보기 삼아 전국의 공무원들에게 "너희들은 그냥 공무원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니까"라고 했다.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숙명을 예견한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하나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 전체와의 불일치 대신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선택한다.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마저도 '자기합리화' 기제를 통해 무력화시킨다.

 아이히만을 비롯해 전범재판에 넘겨진 누구도 잘못을 뉘우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권위있는 조직의 일부일 때 부당함에 대한 인식은 얼마나 많이 증발할까요? 개인에게 주어진 책임은 그저 부분적인 책임일 뿐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의 도덕적 통찰을 얻지 못하게 할까요? 아이히만은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나한테 주어진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99쪽)  "관료제가 본질적으로 익명성을 갖는다는 사실 말고도, 무자비한 행위는 무엇이건 책임이 증발되는 것을 허용해요."(100쪽)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내비치지 않았던 아이히만이 심문 과정에서 괴로워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아이히만은 그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그 어떤 일에도 괴로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그도 한 가지 사소한 사건에 괴로워했어요. 빈에서 유대인 공동체 회장을 심문하다가 그 사람 뺨을 때린 일이죠. 사람 얼굴을 때리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일들이 많은 이들에 일어났다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요, 하지만 그는 뺨을 때린 자신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그걸 대단히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194쪽)
법정에 선 아이히만. /사진출처=한길사
구속되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사진출처=연합뉴스
 예루살렘 법정의 판결문은 이랬다.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 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102쪽)

 무릇 책임이라는 것은 이렇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책임은 권한의 크기에 비례해야 한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에서 법적 책임은 정확하게 반비례했다.

 국정원 댓글 사태는 말단 직원의 책임일 뿐이고, 세월호 구조 실패도 출동한 해경들의 잘못일 뿐이다. 메르스 같은 전염병이 터져도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복지부 장관은 전혀 책임지지 않고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해 갔다. 박 대통령 본인 스스로도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더 걱정인 것은 우리 사회가, 우리 기업이, 우리 교육시스템이 점점 우리들에게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돼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직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행위는 '충성'으로 포장되고 부당한 지시라도 빈틈없이 수행하는 태도는 '성실성'으로 포장된다.

 아이히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유를 하는 거예요. 전문적인 사유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를 말하는 거예요."(98쪽)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180쪽)

 악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인과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는 피해자가 감내한 고통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피해자의 '명예와 품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가 피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명예 및 품위와 관련된다고 말했어요. 이건 피해자가 감내한 고통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무엇인가 올바로 세우는 것하고도 전혀 관계가 없고요. 이건 정말로 명예와 품위의 문제예요. 독일인들이 그들 가운데 살인자를 두고서도 추호도 동요하지 않으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유대인의 명예와 품위에 반하는 생각이에요."(104쪽)

 현재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 부끄러운 상황들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도 우리 사회의 명예와 품위에 관련된 일이다. 그들에 대한 법적 처벌은 우리 사회의 명예와 품위를 세우는 일이다.

[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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