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뉴스]'박근혜 교과서'는 사라질까

장은교 기자 2017. 1. 2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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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설 연휴가 끝난 뒤 31일 교육부가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을 공개합니다. 2018학년도부터 국정교과서와 함께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검정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도 발표합니다. 지난해 11월 28일 국정 역사교과서의 현장검토본이 공개된 후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실패를 선언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습니다. 정권이 역사관을 독점해 만든 하나의 교과서를 학생들에게 강요한다는 것만으로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는데, 1년여동안 수십억원을 쏟아부어 만들었다는 국정교과서의 질이 수준이하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미화 등 편향적 서술이 가득할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이 됐고, 역사학계는 역사적 사실관계 오류조차 수백개 이상 발견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부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정책을 추진할 동력도 잃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의지의 교육부’는 ‘의리의 돌쇠’마냥 국정 역사교과서를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를 향한 무엇을 위한 의지와 의리일까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상황을 정리해봤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0일 국무회의에서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대통령이 가도 교과서는 지키겠다?

지난 23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신년기자간담회를 가졌습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다 책임지고 해결할 것 같은 발언으로 논란이 일었죠. 그중 황 권한대행이 직접 언급한 정책이 세가지 있습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그리고 역사교과서입니다. 황 권한대행은 이 세가지 현안을 두고 “면밀히 관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황 권한대행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애착을 보인 것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2015년 11월 연단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직접 발표한 것도 황 총리였습니다. 지난해 12월 27일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2017학년도 연구학교에 적용, 2018학년도부터 국·검정 혼용실시”라는 계획을 발표하기 직전에도 황 권한대행과 협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황 권한대행측과 교육부 모두 “통상적인 업무협의”라고 설명했지만, 교육부 안팎에서는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해도 “국정교과서 적용 유예”였던 두루뭉술한 안이 황 권한대행의 ‘의견’을 거쳐 바뀌었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참고 대통령처럼…황교안 ‘신년 회견’

지난해 12월 9일 오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황 권한대행,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지윤 기자

황 권한대행뿐만이 아닙니다. 바른정당 의원 29명은 새누리당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에 찬성한 인사들이 많습니다. 김무성 의원은 “역사학자의 90%가 좌파”라는 말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하게 주장했던 대표적 인물입니다. 국회 탄핵소추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성동 법사위원장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론자로 지난 20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금지법안’의 법사위 통과를 막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생명력이 다한 박 대통령 탄핵은 지지했지만, 박 대통령이 남긴 ‘정책 유산’은 지키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교육부가 여론의 반대에도 무리하게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들의 든든한 지원을 믿기 때문일 겁니다.

■뒤늦게 드러난 ‘박근혜 교과서’의 증거

국정 역사교과서를 지키고 싶어하는 이들은 역사교과서는 박 대통령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준식 부총리도 여러차례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검정역사교과서를 두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나, 검정역사교과서의 어떤 부분이 문제냐는 질문에 “전체 책을 보면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한 것도 그저 원론적인 입장일뿐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지난 16일 공개된 안종범 전 청와대정책조정수석(구속중)의 업무수첩에는 박 대통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과 관련 꼼꼼하게 구체적으로 내린 지시가 적혀 있습니다. ‘편찬과정 관리 부실 점검’, ‘연구진 43명 개인 입장 관철 위해 중요 자료 유출 가능성 차단’, ‘외부 인쇄과정 관리’, ‘오탈자 근절’, ‘교과서 임시정부 법통 계승-광복 이후 수립과정, 6·25전쟁, 이·박 대통령 평가, 북한 정권’ 등 박 대통령은 집필과정 관리부터 교과서 내용까지 주문했습니다. 또 ‘국정화저지네트워크 민중총궐기 대비’ ‘학부모 설득’ ‘전교조 12월 초 선거, 과잉진압 유도’ ‘교과서 쟁점 사항 대응논리 개발’ ‘교학사 사례 사소한 실수 방지. 비판세력 빈틈없이 관리’ ‘언론, 유력인사 사전준비’ 등 국정화 반대 여론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지시한 내용도 나왔습니다. 안 전 수석은 헌법재판소에 증인으로 출석해 “업무수첩의 내용은 박 대통령의 지시대로 적은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참고안종범 수첩에 ‘박 대통령 국정교과서 지침 15가지’

일부 독재국가에서나 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학계, 교육계, 시민사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진하며 1년의 짧은 개발기간을 거쳐 2017학년도부터 적용하려 한 것은 2017년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기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를 위한 ‘효도교과서’라는 것이죠. 국정역사교과서는 박 대통령의 주문제작품이라는 증거가 줄줄이 드러나고 있지만, 교육부는 ‘박근혜 교과서’를 지키기 위해 폭주하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운명의 2월

국·검정교과서 혼용은 현행규정상 불가능합니다. 교육부가 2018학년도부터 국·검정역사교과서를 같이 쓰겠다고 발표하지 않았냐구요? 맞습니다. 교육부는 규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참 편리한 의사결정이죠? 교육부는 지난 4일~24일까지 교과용도서 국·검정혼용에 대한 입법예고기간을 거쳤습니다. 입법예고의 경우 최소 40일을 거쳐야 하지만, 그런 규정따위 간단히 무시했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봐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역시나 참 편리하죠? 황 권한대행은 2월 중순께 국·검정혼용안을 통과시킬 계획입니다.

지난해 11월 28일 공개된 국정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 |강윤중 기자

국정과 검정을 같이 쓰도록 법을 바꾸는 것이 왜 문제냐구요? 얼핏보면 교육부가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면 안된다는 여론을 받아들여 학생과 교사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죠. 2018학년도부터 국·검정을 혼용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국정교과서를 폐기하지 않고 강행하겠다는 뜻입니다. ‘디테일’을 살펴볼까요. 2018학년에 국정교과서와 경쟁할 검정교과서는 현재 없습니다.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부가 국정역사교과서를 2017년도부터 적용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출판사들은 준비하지 않았던 거죠. 보통 검정교과서 개발에는 최소 2년이 걸리는데, 교육부는 1년 안에 해내라고 출판사와 저자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벌써 1월이 다 갔고 올해 안에 검정 심사까지 다 마쳐야 하니 실제 집필기간은 6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습니다. 졸속제작을 강요하는 것이지요.

빨리 잘 만들면 되는 것 아니냐고요? 함정을 하나만 만들정도로 만만한 정부가 아닙니다. 검정교과서의 검정심사는 교육부가 합니다.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민간 검정교과서들과 경쟁하겠다는 바로 그 교육부입니다. 교육부는 올해 검정심사를 강화하고, 검정교과서 집필기준도 국정교과서 편찬기준에 맞춰 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친일독재미화, 건국절 반영 등으로 학계에서 온갖 비판을 받은 국정교과서의 잣대로 검정교과서를 심사하겠다는 것입니다. 100m달리기에 나선 옆라인 선수가 알고보니 호루라기도 불고 시간도 재고 비디오판독까지 하겠다는 것이죠. 정부는 이미 권한이 차고 넘칩니다. 대법원은 지난해 1월 검정역사교과서 저자들이 교육부의 수정명령을 거부하며 낸 소송에서 교육부 손을 들어줬습니다. 교육부가 검정교과서 내용을 고치라면 고쳐야 한다는 겁니다. 중·고교 검정역사교과서 저자 104명은 지난 20일과 24일 ‘국정교과서 폐기, 충분한 집필과정 보장, 2015 교육과정 개정’ 등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집필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국정교과서 폐기를 위한 교육시민사회정치 비상대책위가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즉각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참고 ‘국정교과서 금지법’ 국회 교문위 통과···검정교과서 집필진은 “거부 선언”▶참고 중학교 역사교과서 저자들도 집필거부선언 “무늬만 검정교과서 만들 수 없다”

교육부의 폭주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사용을 원하는 모든 학교를 ‘연구학교’로 지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연구학교는 원래 특정한 연구목적으로 시범운영하는 것인데 교사들에게 승진가산점도 주고 연구비도 1000만원까지 지원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합니다. 교육부는 국정교과서라는 미끼를 던지고 학교들이 미끼를 확 물어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각 교육청을 통해 2월 10일까지 연구학교 신청을 받고 2월 15일까지 지정을 마치겠다고 했습니다.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가 국정화 강행을 위한 연구학교 지정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하자, ‘제재’하겠다고 엄포도 놓았습니다. 방학중인 학생, 학부모, 교사들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이 부총리는 이 모든 것이 학교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라니, 대단한 정신승리입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은 2월 안에 역사교과서 국정화금지법을 통과시키겠다고 합니다. ‘박근혜 교과서’를 지키려는 이들은 가진 힘과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헌재의 탄핵심판결과는 빨라야 3월에 나올 예정이고 학교는 그 전에 새학기를 시작합니다. 5년 전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어른들은 ‘박근혜 교과서’로부터 미래세대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운명의 2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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