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전략]폭락장보다 힘든 '상대적 박탈장'
[머니투데이 오정은 기자]
1949년 미군의 태도와 사기를 조사하기 위해 50만명의 군인을 연구한 사회학자 스투퍼(Stouffer)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미군 최정예 집단인 항공대(미 공군의 전신)에서 근무하는 군인의 조직 만족도는 최저인 반면 환경이 열악하고 진급률도 최악인 헌병대 군인의 만족도는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헌병대는 군대 내 모든 분야를 통틀어 진급률이 최저인 반면 항공대는 최고 중 한 곳이었다. 항공대의 사병은 헌병대의 사병보다 장교가 될 확률이 두 배에 달했다. 그런데 왜 헌병의 군대생활 만족도가 더 높았던 것일까.
스투퍼의 설명에 따르면 헌병대에 속한 헌병은 진급할 확률이 낮으니까 진급을 못 해도 불행하지 않았다. 운이 좋아 진급을 하면 크게 행복했다. 반면 항공대 출신은 장교가 될 확률이 50% 이상이었기에 진급해도 별로 기쁘지 않았고 반대로 진급을 못할 경우 좌절감이 컸다. 즉 우리가 느끼는 박탈감은 우리가 속한 집단에서 상대적이란 것이다.
최근 한국 주식시장의 상대적 박탈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삼성전자는 사상 최고가이고 코스피 지수도 2080대로 올라 '한국 증시 탄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속사정은 정 반대다. 특히 중소형주에 투자하고 있는 개인 투자자들에겐 작년부터 악몽 같은 상황이 끝나지 않고 있다.
26일 코스피 지수는 전일대비 16.65포인트(0.81%) 오른 2083.59에 마감했다. 코스피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2만5000원(1.27%) 오른 199만5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장중 200만원을 터치하며 상장 42년 만에 200만원의 첫발을 디뎠다.
하지만 빛나는 삼성전자 질주의 그늘에선 개미가 탄식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일부 시가총액 상위 종목만 오르고 나머지는 부진한 흐름이 계속되면서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내려야 개미가 산다"는 얘기까지 들리니 삼성전자의 200만원 돌파에 비애를 느끼는 투자자가 태반인 현실이다.
게다가 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지만 블랙홀 삼성전자의 기라성같은 급등으로 정치테마주마저 기를 못 펴고 있다. 2017년 대선을 기다리며 테마주에서 크게 한 건 해보려 했던 개인투자자들은 힘이 빠진 상태다.
날씨가 추워지면 성수기를 맞는 게임주도 '한한령(한류금지령)'에 묶여 속수무책이다. 수익률을 좇는 불나방 뿐 아니라 가치투자자도 맥을 못 추는 건 마찬가지. 굴뚝 가치주 가운데 일부는 신저가를 거듭하며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전문 투자자인 펀드매니저 사정은 더 열악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일자리의 위기를 크게 느끼고 있을 터다. 펀드매니저는 폭락장보다 강세장에서 자리를 지키기 어려워서다. 코스피가 20% 폭락했을 때 펀드가 30% 하락해도 원망하는 투자자는 많지 않지만, 코스피가 10% 올랐는데 펀드가 1%밖에 못 하면 원성이 쇄도한다. 폭락장에서 시장보다 더 빠지는 고통은 크지 않지만 강세장에서 시장을 못 따라간다면 펀드매니저는 옷을 벗어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모든 걸 다 잃었다 생각하고 한강 다리까지 올라갔다"고 말했던 한 증권맨은 "나는 코스피가 1500에서 이미 깡통을 찼는데 지수가 960까지 밀리자 기분이 나아졌다"고 고백했다.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죽는 걸 확인하며 큰 위안을 받았던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삼성전자 급등에 너무 낙담하지 말자. 삼성전자는 외국인 지분율이 50% 넘고 18%는 최대주주 지분, 나머지도 대부분 기관 지분이다. 삼성전자로 돈 번 개미는 별로 없단 얘기다. 적어도 내 옆자리 동료의 주식 계좌는 퍼런색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겠다.
오정은 기자 agentlittl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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