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된 조선인의 아픔 다 담겠습니다"
도쿄 변두리서 자란 재일동포 2세.. 1·2편, 일본에서 매년 50회 상영
"내게 관동대지진은 현재진행형.. 그들에게도 가족과 삶이 있었죠"
"관동대지진은 1923년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희생자의 이야기를 그려내야 6600명의 죽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모여 역사가 될 것입니다."
'감춰진 손톱자국-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1983)과 '마을 사람들에게 불하된 조선인-관동대진재와 나라시노 수용소'(1986)에 이어 '1923년 제노사이드-93년간의 침묵'(2017)까지. 관동대지진(일본 명칭은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다큐를 세 편째 만들고 있는 재일동포 오충공(62) 감독은 "학살당한 한국인은 일본 정부 주장처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가족과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과 기록으로 복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23일 저녁 서울 시청별관에서 다큐 상영회를 열기 전 만난 그는 지방을 돌며 다큐 상영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더 많은 유족을 만나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제 손을 잡으며 희생된 조상의 흔적을 찾으러 함께 일본에 가자고 약속한 유족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어요. 일본에서 학자로 시민운동가로 학살을 알려온 이들도 이제 70~80대가 됐고요. 더 늦기 전에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오 감독은 도쿄 변두리 주택가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2세다. 당시 1만5000여명이던 관동 지역 조선인 중 6600여명이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독립신문에 남았을 뿐,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그에게도 먼 옛날 얘기였다. 20대 중반 영화학교에 다닐 때 처음 이 사건이 그의 삶에 들어왔다. "마침 도쿄 동쪽 아라카와(荒川)강 제방에서 학살자 유골 발굴이 이뤄졌어요. 촬영 장비를 빌려 동료와 현장으로 달려갔죠. 일단 발굴 모습과 주민 증언부터 촬영했어요." 그가 학창 시절 운동부 활동을 했던 강둑 공터가 참극의 현장이었던 것도 그제야 알았다.
학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재일동포의 증언을 중심으로 첫 다큐가 완성됐다. 두 번째 다큐는 대지진 당시 군부대에 수용된 조선인들이 마을 자경단에 넘겨져 학살당한 사건을 추적했다. 이를 밝히는 과정에서 극작가 고(故) 김의경,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 주도로 시민 모금 운동이 벌어져 일본 현지 사찰에 추모 종루 '보화루'와 범종이 설치됐다. 그 뒤에도 일본의 대학교·시민단체 요청으로 중단 없이 매년 50회쯤 상영했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은 다큐 작업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였다. 아버지께 물려받아 운영하던 이바라키의 집이 지진으로 반파됐다. 생활고에 시달릴 때 재일사학자 강덕상 선생이 "당신의 다큐를 이제 완성할 때"라고 권했다. 오 감독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유족들을 만나며 오히려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했다.
그에게 관동대지진은 현재진행형이다.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 않는 시민 모임)' 같은 일본 극우 단체는 지금도 공개적으로 "좋은 조선놈도 나쁜 조선놈도 모조리 죽여라"는 구호를 외친다. 관동대지진 때 구호와 판박이다. 오 감독은 "일본 정부와 경찰에는 분명히 학살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정부가 나서야 더 늦기 전에 진상을 규명할 수 있다"고 했다.
"작년 미국 10개 대학 상영회 때 LA의 작은할머니에게 제 할아버지도 메이지대 유학 시절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저도 세상에 없겠죠.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재일동포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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