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먹잇감 될 판".. 재계 '상법 개정안' 공포증

이성훈 기자 2017. 1. 2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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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주 영향력 제한하려다, 외국 투기 자본 배만 불릴 가능성]
- 감사위원 분리 선임·집중 투표제
주식 많아도 의결권 3%만 인정
2.9% 지분 헤지펀드 몇곳 뭉치면 대주주보다 더 큰 영향력 행사
- 헤지펀드가 이사회 장악하면
사내 유보금 많은 기업들 대상, 투자 대신 배당금 확대 요구
신사업·M&A 등 기회 놓칠수도

최근 한 대기업은 법무·기획·홍보팀이 주축이 돼 '상법 개정안 대책' 태스크포스팀(TFT)을 만들었다.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반(反)기업 정서가 높아진 상황에서 '대주주 경영권 제한'을 목적으로 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19대 국회 때도 상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 때문에 해당 상임위도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회 의석의 과반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찬성 입장을 밝힌 상태다.

이 법안은 감사위원 선임 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고, 소액 주주를 대변할 이사를 좀 더 쉽게 선임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사내 유보금이 많고, 대주주 중심'인 한국 기업의 특수성과 맞물려, 헤지 펀드(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 자본)들이 이를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재계에서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교수(법학)는 "상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단기 차익을 노리는 헤지 펀드들이 뭉쳐 기업들에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며 "결국 국내 기업들은 배당 확대냐, 투자 확대냐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헤지 펀드 3~4개 합치면 이사회 장악"

'상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 상임위(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이 법의 핵심 쟁점 사항은 감사위원 선임 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무조건 3%로 제한하는 것이다. 보통 기업 이사회는 7~9명의 이사로 구성되는데, 이들 가운데 3명 이상은 반드시 감사위원을 맡게 돼 있다. 현재는 대부분 사외이사들이 감사위원을 맡는다. 감사위원은 다른 이사와 달리 '업무 재산 상태의 조사권과 영업보고 요구권' 등을 갖고 있다. 회사 경영과 관련한 비밀스러운 부분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상법 개정안은 이런 막강한 권한을 가진 감사위원을 주총에서 선임할 때, 의결권은 지분이 아무리 많아도 무조건 3%만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현대모비스(지분 21%)와 정몽구 회장(지분 5.2%), 정의선 부회장(지분 2.3%) 등 현대자동차 대주주는 감사위원 선출에는 8.3%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모비스와 정 회장의 지분이 3%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2.9% 지분을 가진 헤지펀드 3곳이 연합해 8.7%의 의결권을 확보하면, 대주주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최 교수는 "대주주 의결권 3% 제한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집중투표제(보유 지분에 선임할 이사 수를 곱한 만큼 의결권 행사)까지 도입되면 헤지펀드는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만약 주총에서 이사 3명을 신규 선임한다고 하면, 헤지 펀드 6곳이 2.9%씩만 갖고 있어도 총 52%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헤지펀드들이 상법 개정안을 활용하면 이사회에 자신들을 대변해 줄 사람을 거의 무조건 들여보낼 수 있는 것"이라며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장기 투자 등 주요 의사결정에 반대할 뿐 아니라, 회사의 내부 정보도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헤지펀드 공격에 배당 늘리면 투자 감축 불가피"

재계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한국 기업이 헤지펀드의 집중 타깃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헤지펀드는 중요한 현안이 있는 기업의 지분을 확보한 후, 이에 반대하면서 배당금 확대 등을 요구하는 전략을 많이 쓴다. 삼성·현대차·SK 등 한국 대표 기업들은 그룹 지배구조 개편과 경영권 승계, 기업 분할·합병 등 민감한 이슈가 많다. 여기다 최근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면서 사내 유보금은 많다. 작년 상반기 기준 10대 그룹 계열사의 사내 유보금은 550조원으로 사상 최대 수준이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재원 부연구위원은 "헤지 펀드들은 최근 사내 유보금이 많아 배당 여력이 많은 아시아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다"며 "특히 서구 기업들과 달리 아시아 기업들은 저평가돼 있어, 헤지펀드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말했다.

실제 2015년 6월 헤지펀드인 '엘리엇'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하면서 배당금 확대 등을 요구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지난해 배당 확대 등 엘리엇의 요구안을 수용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재계에선 배당금 확대가 주주친화적인 정책이긴 하지만, 배당을 늘리다 보면 4차 산업혁명과 사물인터넷(IOT) 등 산업 구조의 대대적 전환기에 투자 여력이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재계 관계자는 "사내 유보금이 많이 쌓인 이유는 그동안 신사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최근 기업마다 자동차 전장(電裝)과 바이오 분야에서 대규모 인수 등을 준비하는데, 자칫 배당 확대로 돈이 없어 투자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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