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 노인이 활을 쏘았다, 죽을 때까지 적장을 꾸짖었다

정만진 입력 2017. 1. 2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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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 전몰 김제갑 원주목사, 의병 모아 싸운 이신의 의병장의 화암서원

[오마이뉴스 글:정만진, 편집:김대홍]

 화암서원 전경. 외삼문과 강당 사이 담장 밖에 보이는 비석은 '군수 이신의 자혜염명비'이다.
ⓒ 정만진
충북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은 1622년(광해군 14)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이황, 이문건, 노수신, 김제갑을 모셨다. 서원이 처음 건립된 연도에서 짐작되듯이 이황, 이문건, 노수신은 모두 임진왜란 이전 사람들이고, 김제갑만 원주목사로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인물이다.

그 후 1738년(영조 14) 들어 허후, 박세무, 이신의, 전유형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 네 사람 중에서는 이신의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고, 허후와 박세무는 그 이전, 전유형은 그 이후 인물이다.

그 뒤 박세무의 손자로서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扈從)했던 박지겸, 허후의 아버지 허조, 유근을 다시 모시게 되어 화암서원에서 제사지내는 선비는 모두 열한 분이 되었다. 유근은 임진왜란 이후 인물이다.

제향된 열한 선현 중 세분이 임진왜란 때 공 세워

열한 분 중 이문건(1494∼1567)은 손자가 태어나 16세가 될 때까지 줄곧 <양아록(養兒錄)>을 기록한 특이한 경력을 보여주는 선비이다. 이 책은 나라 안에 전해지는 오래된 육아일기이다.

 서원을 중건하는 데 크게 기여한 박동찬 공과 함양박씨 한정공파 여러 분들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오른쪽)와 괴산군수 김문배 공적비가 서원 외삼문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 정만진
지금으로부터 500년도 더 지난 아득한 옛날에 남자가 육아일기를 적었으니 교육적 관점에서 볼 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남녀평등의 관점에서 이 책을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조선 시대 초기는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남녀 차별이 심한 사회가 아니었다. 고려 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는 남녀가 평등했고, 유산을 물려주는 데 있어서도 딸과 아들에 구분이 없었다. 제사도 윤회봉사(輪回奉祀)라고 해서 자녀들이 돌아가며 지냈다.
지금의 남녀 차별은 임진왜란 이후 사회를 통제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굳히려고 했던 왕과 지배 계층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그들은 왕과 왕이 아닌 자, 사대부와 사대부가 아닌 자, 남자와 여자, 맏아들과 맏아들이 아닌 자 등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이른바 사회 안정을 꾀하려 했다. 임진왜란의 피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전쟁 이후 오히려 권력과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열중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용 교과서를 창안한 박세무

박세무(1487∼1554)도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용 교과서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했다는 점에서 이문건 못지않게 특별한 경력을 자랑하는 선비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학교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유학 서적들을 그대로 교과서로 썼다. 하지만 현대 교육학의 이론에 따르면 성인이 보는 책을 그대로 어린이 교과서로 쓰는 일은 연령별 발달 단계를 무시한 교수·학습이다. 이 심각한 문제를 박세무가 창안으로 해결했던 것이다.

박세무는 <천자문>을 익혀 한자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어린이들에게 <동몽선습>을 주어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했다. 책에는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의 오륜(五倫)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실었다. 영조는 이 책의 필요성을 절감, 널리 배포하여 각종 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사용하도록 했다. 1541년(중종 36)에 쓴 저자의 친필사본(親筆寫本)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직산현 관아 호서계수아문 앞 직산초등학교 담장 옆에 세워져 있는 '이신의 시비'
ⓒ 정만진
오늘은 임진왜란 유적지로서 화암서원을 찾아왔으므로 특별히 이신의(李愼儀, 1551∼1627)와 김제갑에 대해 알아본다. 이신의의 자(字)는 경칙(景則), 호(號)는 석탄(石灘),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시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죽은 후에 쓰는 이름인 시호는 집안 어른이나 벗들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조정 고관들이 회의를 거쳐 내려주는 영광스러운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신의의 호가 석탄인 것을 보고 '아!' 하고 경탄하는 독자도 있을 법하다. 그런 독자는 매우 꼼꼼한 역사여행가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경기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1길 59-8 소재 직산현(稷山縣) 관아(官衙, 관청 건물)를 방문했을 때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 앞에서 본 '석탄 이신의 시비(詩碑)'의 '사우가(四友歌)'를 기억하고 있는 답사자이기 때문이다. 시비의 '사우가'를 못 본 독자들을 위해 13대손 이한창 선생이 번역한 전문을 옮겨본다.

'[소나무]
바위에 서 있는 솔 어엿하여 반갑구나
풍상을 겪었어도 여윈 흔적 전혀 없네
어찌해 봄빛을 쪼여도 그 모습이 같은가 

[국화]
동쪽 울밑 심은 국화 귀한 줄을 뉘 아는가
봄빛을 마다하고 된서리에 홀로 피니
오오라 청고한 내 벗은 너 말고는 없구나 

[매화]
하 많은 꽃 중에서 매화를 심는 뜻은
눈 속에 흰 빛으로 꽃이 피기 때문이라
더 더욱 그윽한 향기는 귀하고도 귀하네 

[대나무]
백설이 잦은 날에 대를 보려 창을 여니
온갖 꽃 다 져 버리고 대숲만 푸르구나
때 마침 부는 청풍을 반기면서 춤추네'

이신의는 1551년(명종 6)에 태어나 1627년(인조 5)에 타계했다. 전의(全義, 충남 연기)이씨로, 남원부사, 형조참의, 광주목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화암서원 강당과 그 뒤로 보이는 사당
ⓒ 정만진
이신의는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지만, 1582년(선조 15) 이후 학문이 높은 선비로 알려져 예빈시봉사·참봉·종묘서봉사 등에 임명된다. 그렇게 벼슬을 지내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스스로 의병 300명을 일으켜 왜적과 전투에 나선다. 관리는 관군을 이끌고 전쟁터로 가면 되는데 왜 의병을 일으켰는지 궁금한 독자에게는 아래의 <선조실록> 1592년 4월 17일자 기사 등이 큰 참고가 될 것이다.

실록은 '변보(邊報, 지방 소식)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상주에 가서 적을 막도록 했다'라고 증언한다. 부산 등지를 단숨에 짓밟은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 중이라는 급보를 들은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선택한 첫 번째 장수, 그가 바로 이일이었다.

그런데 대구 금호 강변 들판에서 노숙하면서 순변사를 기다리던 경상도 일원 장졸들은 이일이 오기도 전에 모두 흩어져버린다. 순변사가 언제 도착한다는 소식은 없고 적의 대군이 가까이 밀려온다는 소문이 먼저 들려왔기 때문이다.

관군 대장에게도 군사가 없었으니 일반 관리는 의병 모아야 

그런데 이일이 늦게 당도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이일은 임금으로부터 순변사 임명장만 수령했을 뿐 휘하에 군사들을 배당받지는 못하였다. 아무리 맹장 세평을 얻은 이일이라 해도 부하 장수와 병사들도 없이 전투를 치르러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일은 한양에서 이틀 동안 어떻게든 군대를 조직하려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60명에 지나지 않는 장졸만 데리고 한양을 떠나 4월 23일 상주에 도착했다.

이제 관리인 이신의가 의병을 모아 왜적에 대항한 까닭이 분명해졌다. 중앙군 사령관이 단 60명을 이끌고 출전하는 상황이었으니 이신의 또한 의병을 일으켜야만 했다는 말이다. 관군이 없으니 싸울 뜻이 있으면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를 해야 하는 것이다.

 화암서원 사당
ⓒ 정만진
어렵게 의병을 모은 이신의는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그 후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 종7품)으로 승진했고, 이어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는데, 1596년 7월 6일 이몽학(李夢鶴) 무리가 임진왜란 중 최대의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직산현감(종6품)으로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천 군사를 거느리고 진압 작전에 참전했다.

이신의는 전쟁이 끝난 뒤인 1604년 괴산군수(종4품)를 거쳐 광주(廣州)목사·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정3품)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1617년(광해 9)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강력히 항의하다가 회령으로 유배된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유배에서 풀려난 이신의는  형조참의·광주(光州)목사를 거쳐 1626년 형조참판(법무부 차관, 종2품)에 오른다. 하지만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나 왕을 호종해 강화로 피란 가던 도중 병으로 인천에 머물다가 수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눈 속에 흰 빛으로 피어난 꽃'과 같은 생애였다.

7세 때 수준급 시를 지은 김제갑, 임진란 땐 적과 맹렬한 전투

김제갑(金悌甲,1525∼1592)은 안동김씨로, 자가 순초(順初), 호가 의재(毅齋), 시호가 문숙(文肅)이다. 나이 일곱 살 때(1531년) 앞산의 나무에 소가 묶여 있는 광경을 보고 '黃牛繫靑山(황우계청산) 靑山一點黃(청산일점황)'이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태생적 선비이다. 시는 '황소가 푸른 산에 매여 있으니, 청산에 누른 점 하나가 찍혔구나'라는 뜻이다. 일곱 살 김제갑의 2행 운문은 압축과 상징을 특징으로 하는 시의 표현법을 날카롭게 드러낸 수작이라 할 만하다.

1553년(명종 8) 29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正字, 종9품)을 시작으로 1558년 병조좌랑(정6품), 1562년 옥천군수(종4품)로 올랐다. 그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했는데, 1582년 황해도 관찰사(종2품), 1583년 좌승지(정3품), 1591년 대사간(정3품) 등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원주목사(정3품)로 부임했다.

중앙정부의 고위 관리가 시골 수령으로 나간 데 대해 원주 충렬사 뜰의 '김제갑 원주목사 충렬비문' 안내판에는 그가 '스스로 외직을 구했다'라고 해설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신경(申炅, 1613∼1653)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장남 시헌(時獻)이 이조정랑(정5품, 행정자치부 인사담당관)에 천거되자 본인은 스스로 외직에 나가기를 자원하였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영원산성 성벽 너머로 치악산이 보이는 풍경
ⓒ 정만진
김제갑이 원주목사로 부임한 1591년 11월 19일로부터 약 아홉 달 지난 1592년 8월 24일, 모리길성(毛利吉成, 모리 요시나리)이 이끄는 3천여 일본군이 원주로 쳐들어왔다. 그 무렵 원주목에는 군사가 거의 없었다. 지난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당도하여 침략을 개시한 일본군이 대구, 경주, 상주, 새재 등을 거쳐 4월 27일 충주에서 신립 부대와 일전을 겨룰 때 모두 지원군으로 보냈던 탓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아직 왜적들의 침탈이 없었으므로 그런 대로 원주는 평온했다.

적들은 서울로 곧장 진격했다. 전라도로 가는 길은 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뭍에서 곽재우·김면·정인홍 등 경상우도 의병들에게 막혔다. 그래도 왜적들은 경상북도 북부 동해안 일대와 강원도는 돌아보지도 않고, 전라도까지 그냥 둔 채 북진만 거듭했다. 서울을 함락하면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평소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을 빼앗아도 조선은 항복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전쟁을 하는 군사 집단이 따로 있고, 백성들은 전투에 참전할 권리도 없는 신분에 머물렀지만, 조선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의병이 되었다. 일본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군대가 조선 국토 전체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서울 점령 이후 다시 남쪽을 침탈하기 시작하는 일본군

게다가 조선 수군에 막히고, 경상우도 의병들에게 차단된 탓에 일본군은 군량미를 비롯한 군수 물품을 수송해올 수가 없었다. 결국 적들은 곡창 지대인 전라도에서 곡식을 구하고, 후방에서 방해를 하는 의병들을 섬멸하기로 했다. 강원감사 벼슬이 모리길성에게 주어졌다.  

 영원산성 성벽 일부
ⓒ 정만진
모리길성은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 지점인 안변에서부터 동해안을 타고 남하했다. 삼척을 점령한 일본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경상북도로 내려가고, 다른 일부는 강원도 남부를 짓밟았다. 그 후 다시 뭉친 일본군은 백화령(삼척군 북삼면)을 넘었다.

일본군은 정선과 영월을 침탈한 이후 재차 군 일부는 경상도 영주·봉화로 갔다. 그러나 안집사 김륵(金?) 부대를 제압하지 못한 일본군은 다시 합세, 죽령을 넘어 원주로 달려들었다. 군사가 없었으므로 김제갑은 사람들을 이끌고 영원산성(?原山城)으로 옮겨갔다. 이내 일본군들이 몰려와 산성을 에워쌌다.

하루 종일 전투가 이어진 끝에 이윽고 아군은 화살까지 떨어지는 지경이 되었다. 군관 오항(吳杭)이 김제갑을 등에 업고 피신하려 했다. 김제갑은 돌처럼 굳게 앉은 채 오항에게 말했다.

"내가 평생 동안 나라의 큰 은혜를 입으며 살아 왔는데 지금 이 상황에 어찌 도망을 칠 수 있겠느냐. 다만 젊은 너희들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구나."

깁제갑은 고위 관리들이 조정에 들어갈 때 입는 조복(朝服)을 단정하게 걸친 후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했다.

"신이 살아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여기서 오늘 죽습니다만,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기어이 이 추적(醜敵, 더러운 적)을 쳐서 국토를 지킬 것입니다."

절을 마친 김제갑이 큰 활을 휘어잡고 적들을 향해 발사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북향재배(北向再拜)를 하는 동안 지켜보고 있던 적의 화살이 먼저 김제갑의 가슴을 꿰뚫었다. 적의 화살촉이 그의 등 뒤에까지 튀어나왔다. 그래도 그는 무너지지 않고 대궁(大弓)을 날려 자신의 몸에 화살을 박은 적병을 쓰러뜨렸다. 이어서 또 다시 활을 잇달아 쏘아 여러 명의 적군들을 관통하여 죽였다.

온몸에 피가 흐르고 이제 기진맥진한 찰나, 적의 장수가 달려들어 김제갑을 두 팔로 옭아매었다. 적장은 그를 바위 아래로 끌어내려 무릎을 꿇리려 했다.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제갑은 있는 힘을 다해 적장을 꾸짖다가, 마침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그를 찌르려 했다. 하지만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반죽음의 68세 노인이 팔팔한 적장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적장도 칼을 뽑아 김제갑의 목숨을 거두었다.

 영원산성에서 바라본 치악산
ⓒ 정만진
후처 이씨가 남편의 전몰 소식을 들었다. 부인은 한참을 울다가 이윽고 시녀를 보며 "대감께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돌아가셨다. 이 몸이 죽지 않고 혼자 살아남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뱃속의 어린 것이 가엾기는 하지만 남편을 따라 죽은 제 어미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칼을 물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이때 이씨는 임신 중이었다.

둘째아들 시백(時伯)이 이때 성 안에 있었다. 줄곧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적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시백은 산성 마지막 구석까지 왜적들로 가득 차 형세가 아주 기울었으므로 지니고 있던 활과 화살을 종에게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오늘 소식을 전하여라. 나는 부모님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셨으니 혼자 떠날 수가 없다."

하지만 부모의 시신을 거두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던 그도 끝내는 왜적의 창칼 아래 죽고 말았다.

'死非難處死則難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나니)
惟君子捨生取義 (오직 군자만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수 있으리라.)
當危急是如平素 (위험을 당해도 평소와 같이 태연자약하고)
勵忠憤不移終始 (충성스러운 분노에 힘써 처음과 끝이 같으니)
臣死忠婦貞子孝 (신하로서 충을 위해 죽고 부인은 정절로 아들은 효도로 목숨을 바치니)
扶植萬古之綱常 (만고에 빛나는 사람의 바른 도리를 심었도다.)
雉岳東峙兮鳳川西流 (치악이 동쪽에 우뚝 솟아 있고 봉천이 서쪽으로 맑게 흐르나니)
先生之名與之俱長 (선생의 높은 이름은 이 산천과 더불어 길이 남으리라.)'

이형석의 <임진전란사>에 실려 있는 김제갑 비명(碑銘, 비에 새겨진 글) 일부가 자못 눈물겹다. 그를 기려 1966년 6월 29일 원주 역앞에 세워진 충렬비의, 박종화가 글을 짓고 김기승이 글씨를 쓴 '문숙공 김제갑 충렬비명'도 읽어본다.

 1966년에 원주역 앞에 세워진 '김제갑 충렬탑'
ⓒ 정만진
'오오 당신은 원주의 빛이며,
강원도의 의기요,
겨레의 스승이요.
아들과 아내의 별이오이다.
임진왜란 가등청정의
불의의 군사를 무찔러
최후의 일각까지 이 땅을 지켰고
마침내 시체를 말가죽에 싼
그 높고 씩씩한 정신 갸륵하다.
아들과 아내마저
효와 정을 지켰네.
왜란이 지내간 지 삼백칠십사 년
자주 자립의 얼에 불타는
강원도민은 이 탑을 세워
천만대 후손에 빛을 전한다.'

화암서원은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만 1956년 박동찬(朴東燦)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의 노력에 힘입어 칠성면 송동리에 재건된다. 그 후 2004년 현 위치인 괴산읍 괴강로 313으로 이건된다.

그리고 오늘날, 누군가가 서원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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