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큰 아들이 보내온 참담한 소식

송성영 입력 2017. 1. 22. 19: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은 만신창이가 된 내 몸과 마음 상태나 다름없었다

[오마이뉴스 글:송성영, 편집:김대홍]

 3개월 여 만에 델리, 여행자의 거리 빠하르 간지로 다시 돌아왔다.
ⓒ 송성영
차창을 통해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도 잠시뿐이었다. 무덤까지 쫓아올 태양이 이글이글 떠오르자 창을 통해 후끈한 더위가 쏟아져 들어온다. 고락푸르에서부터 줄곧 목청을 높여 오다가 잠들었던 뒷자리의 인도 아줌마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힌디어를 쏟아내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화통을 삶아먹은 듯 우렁차다. 때로는 앙칼지다. 그녀의 목소리가 베일 듯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하면 말씨름 하던 남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한 남자가 겨우 목청을 높여 보지만 결국은 그녀의 목소리에 눌리고 만다.

아침 식사를 위해 버스가 휴게소에 잠시 머무른 사이, 입맛 없는 샌드위치 한 조각을 생존을 위해 먹었다. 다시 버스에 올라 보니 내 바로 앞자리에 늘어져 손전화기를 이용해 쨍쨍거리는 노래를 크게 틀고 제 세상 만난 듯 건들거리던 젊은 네팔 친구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휴게소 부근 어딘가에 일자리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지금 쉴 곳을 찾아가고 있지만 고락푸르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네팔 청년들은 이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안락한 곳을 향해 떠나고 있었다. 그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누리는 만큼 세상 어딘가에서는 그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다.

버스는 다시 델리를 향해 출발한다. 네팔과 다름없이 이곳 인도에서도 유월 중순경에 찾아온다는 몬순, 장마를 기다리고 있다. 메마른 논이 타들어가고 있다. 못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갈아엎은 논은 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로 푸석푸석하다. 우기가 닥쳐오려면 일주일 정도 남아 있다.

 빈민들이 살고 있는 델리 근교 도로가 움막집
ⓒ 송성영
대도시 델리에 가까워지자 도로 가에 움막집들이 늘어서 있고 사탕수수며 옥수수 밭이 길게 이어져 있다. 푹푹 찌는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일손을 놓지 않는 검은 피부의 농부들이 간간이 보이고 더러는 밭 가장자리 큰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 주변에는 바지를 까 내리고 똥 누는 사람이 보인다. 가뭄으로 졸아 붙은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사내가 보이고 저만치 강줄기도 보인다. 목선이 띄어져 있는 강줄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더위를 식히고 있다. 

등허리가 따갑다. 옷을 짜내면 물이 나올 정도로 땀에 절어 있던 온몸에 땀띠가 난 것이다. 엉덩이 또한 불에 데인 자리처럼 따갑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 엉덩이를 들썩거려 본다. 살 빠진 엉덩뼈가 앉은 자리에 닿을 때마다 고통스럽다.

대도시, 델리의 고층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후끈한 바람이 차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다. 차라리 창문을 닫는 편이 낫다. 싯다르타는 이 숨 막히는 길을 걷고 또 걸었을 것이었다. 나침반이 녹아내릴 듯 찌는 더위에 따끔한 온몸의 땀띠가 무감각해지는 내 의식을 일으켜 세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떠올리게 했다. 델리로 가고 있는 이유를 되짚어 보면서 내 의식을 메모했다.

'델리에서 뭘 어찌 할 것인지 아무런 계획이 없다. 그냥 이 더위에서 벗어나 다람살라로 가고 있을 뿐이다. 무력감인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존재감마저 내려놓고 싶어진다. 그냥 이대로 가는 데까지 가보자. 버스는 어느새 펄펄 끓는 대도시 한복판으로 들어서고 있다.'

혼잡한 버스 터미널에 도착할 무렵 나는 도로가 집 앞에서 푸석푸석 먼지 오르는 메마른 땅에 기도하듯 작은 생명체에 물을 주고 있던 어린 아이를 감로수처럼 떠올렸다. 조만간 이 펄펄 끓는 도시에도 감로수와 같은 비가 내릴 것이다.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오토 릭샤들이 들어찬 비좁은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헤쳐나가는 오토릭샤
ⓒ 송성영
그늘진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황량한 도시 한복판에서 쓰러지면 대책이 없다. 사력을 다해 배낭을 짊어졌다. 일단 익숙한 장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가 모는 오토 릭샤를 잡아탔다. 오토 릭샤는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오토 릭샤들이 꽉 들어찬 비좁은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헤쳐 나가면서 인도에 도착해 맨 처음 찾아갔던 곳, 여행자들의 거리 빠하르간지로 향했다. 3개월 전, 거기 어느 곳인가에서 다람살라 가는 버스를 탔었다.

인도에 맨 처음 도착해 첫날밤을 보냈던 빠하르간지는 3개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상승한 온도와 내 몸과 마음 상태였다. 다친 무릎으로 인해 패잔병처럼 다리를 절룩거리며 열병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몸과 마음 상태는 꼬질꼬질 찢겨진 옷가지만큼이나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오토 릭샤에서 내려 곧장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아갔다. 거기서 다람살라 가는 버스표를 구하고 겸사겸사 뭔가를 먹고 기운을 챙겨야 한다. 식당에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행객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반가웠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제 내가 국경 너머 고락푸르에서 열병으로 쓰러졌던 얘기를 꺼내자 그 중 한 사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은 괜찮습니까?"
"버틸만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제 델리 온도가 46도까지 올라갔답니다."
"아, 그랬군요... 오늘도 엄청 덥네요."
"아마 오늘도 40도는 훨씬 넘을 겁니다."

두 사람은 오늘 저녁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열흘 정도 잠시 잠깐 유적지를 둘러 봤다는 두 사람과 함께 한국 음식을 주문해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비를 지불하려 하는데 그들이 선뜻 나선다.

"저희가 내겠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떠나는데 선생님은 3개월 더 머무르신다면서요."

 한국인 식당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 이들은 내게 점심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 송성영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식비를 내준 고마운 사람들과 헤어져 다람살라로 출발하는 버스표를 구하고 네팔에서 내내 작동이 멈춰 있던 손전화기를 충전했다. 인터넷이 개통되자마자 곧바로 우리 집 큰 아들 송인효에게 '카톡' 메시지를 날렸다.

"다시 인도로 나왔다. 그동안 별 일 없었지?"
"아니 별일 있었어."
"무슨 일?"
"아빠도 세월호 참사 알지?"
"알지, 네팔에 들어가기 전에 페이스 북과 인도 신문을 통해 알고 있어."
"지난 번 집회 때 끌려갔다 왔어."
"다친 데는 없는 겨?"
"괜찮아. 이틀 동안 유치장에서 조사받고 풀려났어."

녀석과 '카톡'을 주고받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녀석은 집회 현장에서 친구와 함께 맨 앞줄에 서 있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것이다. 아픈 세상을 노래하는 송인효 녀석, 조막손으로 촛불을 들기 시작했던 녀석은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며칠 앞두고 촛불 집회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수장되어 가는 학생들을 텔레비전을 통해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추악한 현실에서 노래만 하는 것이 죄스럽다며 집회 현장 맨 앞줄에 나섰다가 유치장 신세를 지었던 것이다.

바른 세상을 꿈꾸며 아픈 세상을 노래하고 그 아픈 세상 앞에 당당해지고 싶어하는 녀석에게 애비로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평소 애비인 내가 부조리한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라 일렀고 또한 그 부조리한 세상을 대물림 해주고 있지 않던가. 나는 녀석에게 집회 때 맨 앞으로 나서지 말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맨 앞줄로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세월호 참상에 대한 대처가 그러하듯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철면피하고도 추악한 박근혜 정부는 폭력 사태가 일어나길 바라기 때문에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당부의 메시지만 전할 수밖에 없었다.

'비폭력이야 말로 가장 큰 힘이다. 비폭력은 추악한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폭력은 잠시 동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힘을 잃게 된다.'

내 자식이 귀하면 다른 집 자식도 귀한 법이다. 다른 집 자식이 어떻게 되든 말든 제 자식의 안위만 걱정하고 제 자식만을 사랑하는 것은 병적인 사랑이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잘 먹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 나보다 고통 받는 그 누군가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데 있질 않던가. 그 자비와 사랑을 억압하는 세력이 있다면 마땅히 저항해야 한다.

나름 그런 저항을 하고 있는 녀석이 대견했다. 한편으로는 녀석이 큰 곤욕을 치르게 될까 싶어 걱정이 앞섰다. 결국 애비인 나는 자식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시들해질 무렵에도 녀석은 거리에 나가 노래를 통해 꾸준히 세월호 참상을 알렸고 다음 해인 2015년 4월, 세월호 집회에 나가 또다시 맨 앞줄에 있다가 머리채 끌려 유치장 신세를 졌다)

한국의 참담한 현실은 만신창이가 된 내 몸과 마음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 해 여름, 머나 먼 인도 땅에서 제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면서 한국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폭력이니 비폭력이니 주절거리고 있었다. 참담한 한국의 현실 앞에서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을 녀석을 떠올리며 한국인 식당을 빠져나왔다.

 사람과 동물 자동차와 오토 릭샤가 혼잡하게 뒤섞여 있는 델리의 여행자거리 빠하르 간지.
ⓒ 송성영
다람살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푹푹 찌는 열탕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혼잡한 거리가 황량한 사막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동물 자동차와 오토 릭샤가 뒤섞여 있는 델리의 여행자거리 빠하르 간지. 이 혼잡한 도시에 아는 사람 하나 없다. 상처 입은 거리의 떠돌이 개처럼 비실거리는 내게 더 이상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다. 물건을 권하는 장사치들조차 다가오지 않는다.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땀줄기가 눈으로 흘러들어 눈알이 따갑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가고 숨이 턱턱 막힌다.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분명 다람살라 가는 버스 타는 곳, 목적지를 향해 비실비실 걸어가고 있었지만 정작 내 자신의 이정표를 잃어버렸다.

조금 전, 식당에서 만났던 한국인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한국에서 올 때 왕복으로 끊은 비행기 표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모른다. 6개월 비자가 만료되려면 70여일을 더 보내야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인도 네팔을 하루 한 두 끼로 떠돌아다니며 3개월 넘는 기일을 보내는 동안 갈빗대가 보일 정도로 살집이 빠졌지만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인도라는 나라가 더 이상 낯설거나 경이롭게 다가오질 않는다. 사막처럼 황량하다가도 살인적인 더위에 너저분하고 혼잡하게 다가온다. 목욕탕 한증막에서 좀 더 버티자, 좀 더 버텨보자 마음을 다잡아 나가듯 찜통더위 속을 걸어가고 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냉방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걸었다.

그동안 나름 소박한 삶을 지향하면서 세상 만물, 나 아닌 것이 없다 여기려 했다. 땀 흘리는 농사처를 신성한 사원으로 삼아 미생물조차 소중한 생명으로 여겼다. 하여 농약 한 방울, 화학비료 한 알 넣지 않고 직접 퇴비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자연에서 나온 것을 먹고 다시 되돌려 놓는, 순환농법으로 농사를 지어가며 농사처를 마음 다스리는 사원으로 여겼다. 농사처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비롯한 모든 곳이 마음먹기에 따라 신성한 사원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농사처와 가족을 통해 누렸던 행복감을 이웃들과 나누고자 했다. 그 힘으로 집회현장에 나가 고통 받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나름 함께 하고자 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찜통더위 속을 절룩거리며 걷고 있는 내 안에는 오로지 고통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고통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찜통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로서는 최상의 행복이라 여겼던 소박한 삶을 감당 못해 이혼을 요구해 왔던 그녀와의 갈등과 그 과정에서 쌓였던 분노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근원적인 그 어떤 고통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고통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나는 그 어떤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농사처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복만을 추구해온 나는 그 근원적인 고통의 원인을 애써 외면해 온 것이다. 내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고행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은 고개 돌렸던 그 근원적인 고통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인도 꼬살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일곱 명의 결발(結髮) 수행자와 일곱 명의 자이나교도, 일곱 명의 벗거벗은 수행자, 일곱 명의 한 벌 옷만 입는 수행자,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는 일곱 명의 편력(遍歷) 수행자에 대해 고타마 붓다에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저들 중에 거룩한 이와 거룩한 길에 도달한 이는 누구입니까?"

고타마 붓다는 '그들이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오랫동안 살아보아야 알 수 있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다. 청정한가 하는 것은 오랫동안 대화를 해봐야 알 수 있고, 지혜가 얼마나 견고한가는 오랫동안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 지혜가 있는가 하는 것 또한 오랫동안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무엇인가를 알려면 그 속에 깊숙이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의 원인을 알려면 고통의 바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봐야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머리로만은 알 수 없다. 내 몸과 마음을 온전히 던져 봐야 알 수 있다. 고타마 붓다가 중용의 가치를 알게된 것은 극심한 고행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행이 없었다면 중용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아기 새가 세상에 나오려면 알을 깨야 하는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그동안 행복이라는 안락한 알 속에 갇혀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알 속과 같은 행복이라는 애착에 사로잡혀 살아온 '나'로부터 깨쳐 나오기 위해 다리를 절룩거리며 고통의 바다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