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는 문화적 진화"

김슬기 입력 2017. 1. 22. 18:50 수정 2017. 1. 2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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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그린 동물무늬 넥타이 매고 한남동 북파크 카오스홀서 특별강연
"과학이 있기에 인류의 미래 낙관해"
"중요한 건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베스트셀러 '이기적 유전자' 저자 리처드 도킨스 첫 내한

'세계에서 가장 뇌가 섹시한 남자'의 넥타이에는 사슴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펭귄, 얼룩말, 임팔라 등 아내가 직접 그린 동물 무늬 넥타이만 맨다는 사실은 그의 자서전에도 적힌 일화다. 학자로서의 인생을 온전히 동물학과 진화론을 연구하는 데만 쏟아온 이 논쟁적인 진화생물학자는 의상을 통해서도 '다윈이 옳다'는 신념을 전하고 있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과학자이자, 가장 악명 높은 무신론자. '이기적 유전자'의 세계적 석학 리처드 도킨스(76) 영국 옥스퍼드대 뉴칼리지 명예교수가 처음으로 내한했다.

첫 일정인 21일 오후 서울 한남동 북파크 카오스홀에서 열린 특별강연에는 300여 명의 유료 관객이 몰렸다. 강연은 인터파크와 카오스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했다. 1시간30분에 걸친 강연에서 그는 거침없는 달변과 유머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2008년부터 옥스퍼드대의 교양 과학 강연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만큼 그는 최고의 연사이기도 했다. 강의 주제로 선택한 것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었다는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였다.

그는 "이 질문은 진화학자라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것"이라며 서두를 열었다. 어떤 종의 진화는 학문적으로 예측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 어떤 종도 멸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인류 또한 그럴 것이라는 게 그의 답. 6500만년 전 공룡은 시속 4만마일로 돌진한 유성과 충돌한 뒤 멸종했다. 당시 충격에너지는 수백만 개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비할 정도다. 그는 "다만 인류의 기술은 운석 충돌이 일어나도 지하에 벙커를 만들고 대피하거나, 운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공룡과 같은 운명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일론 머스크가 꿈꾸듯 화성 이주도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는 사고실험을 통해 인류가 처음부터 다시 진화를 시작하는 시뮬레이션을 1000번 반복한다고 해도 인류가 등장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가설을 들려줬다.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수백만 년에 걸쳐 각자 진화했음에도 호주와 아프리카에는 각기 동일한 모습을 지닌 설치류나 두더지과 등의 동물들이 나타났다는 사례를 통해서다.

예를 들어 지금은 멸종했지만 20세기 초반 북반구에는 고양이과 맹수인 세이버투스 종이 살았다. 남반구에도 똑같은 모습을 지닌 맹수가 발견됐는데 이는 유대류에서 진화한 종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독립적으로 진화한 동물들의 모습이 결과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진화는 '패턴화된 방향성'을 지닌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기장의 왜곡을 통해서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탐지하는 전기물고기는 생물계에서 단 두 가지의 진화 형태만을 보였다. 반면 눈은 생물계를 통틀어 40가지 형태로 진화했다. 그는 "시력에 관한 기관은 굉장히 유용하기 때문에 계속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인류가 멸종해도 눈은 진화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인류가 멸종한다면? 듀걸 딕슨이 쓴 '애프터 맨'을 통해 그는 "번식력이 왕성한 쥐와 토끼가 인류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소개했다. 남미에는 실제로 기니피그 등 코뿔소만 한 설치류가 이미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진화는 정교한 예측을 할 수 없다. 어떤 종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만 예측 가능하다"고 했다.

인류가 300만년간 가장 큰 진화를 보인 기관은 뇌였다. 그는 "진화의 역사에서 300만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인간의 뇌용량은 놀라울 만큼 커졌다. 기억력, 집중력, 미래 예측 등에 유리한 큰 뇌를 지닌 인간이 생존해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자연선택에서 큰 뇌가 선호되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또 "인류는 이미 장수하고 아이를 갖는 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향후 100만년을 생각한다면 뇌가 큰 사람만이 살아 남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인류의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문화적 진화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말했다. 진화는 지리적으로 격리된 상황에서 수백만 년에 걸쳐 다른 종이 분화하는 것인데, 전 지구적 이동이 가능한 인류가 더 이상 그런 종의 분화는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는 "중력이 약한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한다면 다리가 긴 인간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생물학적 진화를 대체하는 건 기술·언어·스포츠·패션 등 문화적 진화로 나타날 것이라는 게 그의 예측이다. 자동차나 집, 컴퓨터, 의상 등의 변화로 미뤄 문화의 진화는 유전자의 진화보다 수백만 배 빠르며 자연선택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 그는 인류가 영화 '엑스맨'처럼 돌연변이 발생 가능성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머리나 다리의 숫자가 달라지는 등의 극단적 진화는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했다.

인류의 두려움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과 대척점에 서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는 "인류가 자기 파괴의 씨를 뿌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된다"면서 "기술발전은 생물학적 진화와 유사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살아남은 로봇이 훗날 과거를 회상하며 탄소 기반 시대를 살다 사라진 인류를 회고할지도 모른다. 로봇에게 무언가를 빼앗기기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환경적으로 종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염려하기도 했다. "인류의 농업과 질병에 대한 위협이 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 독자가 세계적으로 문화적 다양성이 줄어드는 현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그런 질문은 사회학자나 역사학자에게 해 달라"면서 "전문 분야가 아닌데 잘 모르면서 결정하는 일 때문에 재난이 일어난다"고 말해 폭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생존 기계'에 불과하며, 자기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려는 이기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그는 "개개인의 행동을 보면 자손을 낳고 유전자를 남기는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유전자가 후대의 생존 도구가 되어 살아남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념도 드러냈다. 그는 "과학은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고 기술은 물론 끔찍한 일도 할 수 있다. 양날의 검이다. 선한 목적을 가진 과학도 나쁜 의도로 이용될 수 있지만 과학 그 자체는 중립적이고 우리는 더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고 말했다.

그는 "마틴 루서 킹과 스티븐 핑커의 말처럼 인류는 일반적으로 더 나아지고 있다. 역사의 바퀴는 낙관적으로 굴러가고 있다. 노예제가 폐지됐고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됐다. 과학이 우주를 이해하고 인류를 이해한 것이야말로 놀라운 성과"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의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열흘 일정으로 방한한 도킨스는 이후에도 한국 독자를 계속 만난다. 22일 세종대 대양홀에서 강연한다. 25일 고려대에서는 진화심리학자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와 '나의 과학 인생'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펼친다.

지난 21일 열흘 일정으로 처음 내한한 리처드 도킨스(오른쪽)가 북파크 카오스홀에서 `진화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인터파크도서]
■ He is…

리처드 도킨스는 1941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했다. 2008년 옥스퍼드대학의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위한 찰스 시모니 석좌교수'에서 은퇴했고, 이후에도 뉴 칼리지의 펠로로 남아 있다. 왕립학회 회원이자 왕립문학원 회원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1976년 출간 이후 30년 넘게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세기의 문제작이며, '만들어진 신'(2006)은 종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몰고오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확장된 표현형'(1982) '눈먼 시계공'(1993) '지상 최대의 쇼'(2009)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2011) 등이 있다. 2012년 스리랑카에서 물고기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도킨스가 진화과학의 대중적 이해에 공헌한 바를 기려 새로운 어류 속명을 '도킨시아'라고 지었다. 2013년에는 '프로스펙트'지가 전 세계 100여 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세계 최고 지성을 뽑는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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