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6월항쟁기념사업회 정성헌 대표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2017. 1. 21.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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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유와 평등을 넘어 생명과 평화로 가자”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이 남영동 치안분실에서 죽었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는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고문치사임이 드러났다. 6월 10일 정치·사회·재야세력이 연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박종철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 시민대회’(6·10대회)를 열었다.

바로 그 전날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군이 집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다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정치인·학생·재야인사들만의 시위에 이른바 넥타이부대라고 일컫는 보통시민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결국 6월 29일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항복선언을 했다. 역사는 이것을 6월 민주항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 반성 너무 안 해“

지난해 10월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이 6월 민주항쟁 30년사업추진위원회(6월민주항쟁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1월 14일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모제에서 선포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포문에서 “짧게는 박근혜 정권 5년, 이명박 정권 5년의 적폐를 전면 혁파해야 한다”면서 “6월 민주항쟁 이후 30년의 성취와 좌절을 헤아려 ‘새로운 나라’ ‘바른 나라’ 건설의 토대를 새로 구축하자”고 밝혔다. 이들은 또 ‘독점에서 공존으로’ ‘차별에서 대동으로’ ‘차단에서 순환으로’ ‘분단에서 하나됨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대결에서 화해로’ ‘죽음에서 생명으로’라는 구호를 만들었다.

이 모임 상임공동대표가 정성헌 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이다.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던 그는 1987년 국본에 파견나가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한 중심에 있었다. 정 공동대표는 이 위원회의 목적과 활동에 대해 먼저 소개했다.

“14일 발표한 선포문에서 우리가 경각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과 ‘우리 내부’에 있다. 분열주의와 파당성, 대중의 삶과 현실에서 배우지 않으려는 관념적 과격성과 교조주의, 일은 조금 하고 공을 독차지하려는 이기주의와 소영웅심 등등…. 6월민주항쟁위원회는 일단 6월항쟁을 기념하고, 앞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가 잘 정착하는 데 역할을 하고, 특히 잘못한 것을 반성하려고 한다.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 반성 너무 안 한다. 반성 없이 변화가 없다.”

인터뷰 시작이 반성 얘기니 1987년에 대한 반성부터 해보자. 공교롭게 30년 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얻은 노태우의 6·29 항복은 지금 민중총궐기를 통해 얻은 박근혜 탄핵과 유사하다. 당시 김영삼(YS), 김대중(DJ) 두 야당 지도자의 분열로 인한 4당 체제는 지금과 똑같다. 당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는 노태우가 차지하는 군정 연장으로 나타났다.

흔히 87년 체제의 문제로 제왕적 대통령제 문제나 소선거구제 문제 등을 얘기하는데, 기자가 볼 때 87년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민주화세력의 양분이다.

“그렇다. YS는 제도권에서 활동하게 하고, DJ는 제도권 밖으로 내쫓는 이간책을 썼다. 두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알면서 분열했다. 그때 얘기하면… 처음 듣는 얘기도 많을 것이다. 정치권 분열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운동권마저 분열됐다. 분명히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단일화 실패의 요인은 YS·DJ 두 사람의 욕심, 정권욕 때문 아닌가.

“욕심과 불신이다.”

정치인은 정권욕 때문이라 해도 운동권과 재야가 분열한 이유는 무엇인가.

“국본은 5개 세력의 연합체였다. 재야의 민통련과 YS의 상도동계, DJ의 동교동계, 그리고 천주교·개신교 세력이다. 민통련에는 23개 단체가 가담해 있었다. 문익환 목사가 민통련 상임고문으로 사회를 봤는데, 처음에는 ‘비판적 지지’라는 말이 아닌 ‘특정인 지지정략’이라는 말을 썼다. 민통련 회의에서 비판적 지지에 대해 찬반 표결을 했는데, 표수는 기억 안 나는데 동수가 나오고 나머지는 판단 유보였다. 재야단체 대부분은 ‘지금 국면에서는 민주화 투쟁 열심히 하자, 비판적 지지는 운동권 분열로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 내가 먼저 퇴장하고, 다음 백기완 선생, 계훈제 선생이 퇴장했다. 한참 있으니 이재오(현 늘푸른한국당 대표)로부터 특정인 지지전략으로 결정됐다고 연락이 왔다.”

후에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가장 잘못한 것이 바로 그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한 것이라는 회한을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그때 후배들이 4자 필승론 얘기를 하길래, 내가 ‘국민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도 야권이 분열하면 진다고 하는데, 서울대 나온 너는 어떻게 4명이 나와도 승리한다고 하느냐’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이돈명 변호사는 ‘나는 DJ 지지니까, 우리 의리는 변하지 말자’고 말했다. 4자 필승론과 같은 괴이론을 펴는 것보다 이 변호사가 훨씬 솔직하지 않나.”

“대의민주주의, 광장민주주의 받을 능력 없어”

1987년 많은 학생·민주인사들의 분신과 투옥, 해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은 쟁취했지만 정치인의 욕심 때문에 군정은 연장됐다. 이후 분열된 민주세력은 각자의 길을 갔다. YS는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DJ는 1997년 DJP연대를 통해 각자 ‘소기의 목적’인 대통령이 됐다.

YS와 DJ는 대통령이 되고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것은 처절한 민주세력의 분열이다. 그 분열의 갈등은 지금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정치에서 대의와 명분은 사라지고, 목전의 이익만 따지며 이합집산이 횡행하는 더러운 문화가 이식됐다. 정 공동대표가 201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할 때다. 이때 6월 민주항쟁사를 정리하려 했지만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는 “국본의 5개 세력을 대표하는 실무자 1명씩이 나와서 협의해 정리하려고 했는데 못했다”면서 “올해는 균형 잡히고 정확한 6월 민주항쟁사를 마무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그 반목의 골이 깊은 것이다.

1987년의 4당 체제 비슷하게 지금도 4당 체제다. 여당도 분열됐지만 야당도 분열돼 있다. 비단 30년 전뿐일까. 1979년 부산·마산 시민이 유신체제에 항거한 부마항쟁에 이은 대통령의 암살로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이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난맥으로 다시 전두환의 신군부가 등장했다. 1960년 4·19 학생혁명도 장면 정권의 무능으로 군부 쿠데타를 초래했다. 학생·시민들이 퇴행하는 민주주의를 바로 잡았지만 번번이 정치권의 무능·분열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다. 2017년 지금 이 순간에 30년 전 1997년, 38년 전 1979년, 56년 전 1961년의 불행을 다시 만나는 듯한 기시감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987년에는 강력한 독재세력에 강력한 민주세력이 맞서는 구도가 확실하고 단순했다. 또 경제는 상승국면으로 민주주의만 이루면 된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 경제는 하강국면이고, 미래권력도 불확실하다. 대의민주주의는 광장민주주의를 받아낼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최선이 아니면 차선, 그도 아니면 3선이라도 택해야 한다. 기회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대권주자들은 국민주권과 나라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 6월민주항쟁위원회도 다양한 의견을 모을 것이다.”

1월 14일 서울 남영동 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모제에서 정성헌 박종철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위원장이 선포문을 읽고 있다. / 박종철 기념사업회 제공

6월민주항쟁위원회는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우선 보통사람의 지역민회(民會)와 전문가 중심의 정책민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공식화해서 정치권에 전달·촉구할 예정이다. 또 4·19 학생혁명에서부터 이번 11월 촛불혁명까지를 문명사 혹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정리할 계획이다. 이밖에 자발적인 응모를 통해 610명의 풍물패를 모아 지역순회 마당극을 펼치는 등 다양한 행사도 기획하고 있다.

정 공동대표는 1946년 강원도 춘천 남상면에서 태어났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했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박 정권은 계엄령으로 시위학생을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이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나섰다가 구속돼 당시 4학년생인 이명박 전 대통령과 나란히 재판을 받았다. 한·일 국교정상화라는 목표를 달성한 박 정권은 구속된 학생들을 모두 풀어줬다.

“박씨 집안과 악연 53년간 이어지고 있어”

그는 정계진출의 제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홍천·삼척고등학교에서 잠시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때 제자가 지금 김양호 삼척시장이다. 이 인연으로 그는 삼척원전유치찬반투표관리위원장을 맡았는데, 덕분에 벌금 70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박근혜 정권에서 벌금 70만원을 선고받고, 그 아버지 박정희 정권 때는 구속까지 됐다”면서 “박씨 집안과의 악연은 53년간 이어지고 있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1977년에는 가톨릭농민회(가농)에 가입해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는 가농에서 국본으로 파견돼 민주화운동에 가담했지만, 가농으로 돌아와 부회장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장으로 농민운동을 계속했다. 이번 민중총궐기에서 희생된 백남기 농민은 그의 절친한 1년 후배로, 가농과 우리밀살리기 운동의 동지였다. 백남기 농민이 죽었을 때 신문에 장문의 조사를 쓰기도 했다.

그는 “백남기 집에 가서 같이 잠도 자고. 참…(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촛불시국에서 열한 달 동안 백남기 농민을 지킨 것이 바로 농민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1979년 도시에서 YH노동운동이 있었고 농촌에서는 오원춘 납치사건이 있었는데, 오원춘 납치사건은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면서 “이번 촛불시국에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살해당하면서 엄청난 기여를 했는데,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고 있다”고 씁쓸해 했다. 그는 백남기 농민에 대해 “정의감이 많고, 꽹과리를 잘 다룬, 신명이 많은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정 공동대표는 YS·DJ 양쪽에서 같이 정치를 하자는 제안을 모두 뿌리쳤다. 그가 한 유일한 관직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은 것이 전부다. 그는 1998년부터 강원도 인제에 DMZ평화생명마을을 만들었다. 평화·생명을 가꾸는 교육장이자 체험장이다. 그는 평화생명마을에 있는 탱크에 색동옷을 입히고, 탱크 포신에 진달래와 무궁화를 만들어 넣었다.

그는 사회운동가다. 스스로도 ‘운동가’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는 “요즘 운동가라는 말을 안 쓰고, 활동가라는 말을 쓰며 정치 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선 안 된다”면서 “사회운동은 항심을 가지고 평생 꾸준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광장민주주의가 대단하다고 세계에서 칭찬하지만, 막상 광장을 벗어나 전철에서는 떠들면서 전화하고 무질서하다고 비판했다. 광장에서는 휴지를 줍지만 휴일 강원도에 놀러와 쓰레기를 잔뜩 버리고 간다고 꼬집었다. 그는 “그렇게 광장에서 성숙한 사람들이 1년에 책을 0.8권밖에 안 읽는다”면서 “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 진정한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기자가 ‘학생운동-농민운동-민주화운동-사회운동-통일운동-생명운동으로 이어지는 삶을 관통하는 인생의 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20년 훨씬 넘은 내 강의 주제는 ‘자유와 평등을 넘어 생명과 평화로’이다. 참여정부 시절 나는 ‘인간사회 민주주의를 넘어 생명사회 민주주의로’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사회 민주주의가 거꾸로 갔으니…. 지금부터 10년 전력투구해 생명사회·생명문명의 토대를 굳건히 만들어야 한다. 생명운동은 단순한 환경문제만이 아닌, 복합위기를 극복하려는 인류 공동의 노력이다. 생명문제는 인간 존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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