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추첨으로 시민의회 구성해야"

백철 기자 2017. 1. 2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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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촛불 민주주의와 인터넷 민주주의는 대립한다?
1월 1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12차 촛불집회. / 이준헌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건 8할이 촛불의 힘이었다. 일상 속의 시민들은 랜선을 통해 흐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는 촛불집회 공지가 퍼져나갔다. 공지를 본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토요일마다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매주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촛불 민주주의와 온라인 민주주의의 결합은 여러 곳에서 목격됐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전국의 오프라인 촛불집회 현황을 취합해 만든 ‘대동하야지도’는 온라인에서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오프라인 촛불집회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유튜브, 페이스북 등 온라인 생중계를 통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촛불집회에서 울려퍼진 ‘송박영신’ 등의 구호는 순식간에 인터넷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촛불과 온라인 한몸 보여준 박근혜 하야 국면 온라인의 기세를 탄 촛불은 확산 속도도 엄청났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끌어낸 1987년 6월항쟁은 그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난 뒤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반면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에 100만명이 모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4주였다.

박근혜 하야 국면에서 촛불 민주주의와 온라인 민주주의는 한몸이었다. 하지만 ‘촛불’과 ‘온라인’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과정은 얼핏 보면 촛불 민주주의와 온라인 민주주의의 대립처럼 보인다. 비문재인계는 완전국민경선제(당원과 비당원이 가중치 없이 동등하게 참여 가능)를 주장하고 있다. 박원순, 김부겸 등 몇몇 대선주자들은 아예 ‘촛불 경선’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문재인계는 모바일 투표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의 영입인사인 김병관 민주당 의원은 1월 6일 경선룰 토론회에서 “컴퓨터와 모바일을 통해 은행거래를 하는 시대에 정당에서 온라인 투표를 배제할 필요가 있겠느냐. 배제하면 국민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취지에 어긋난다”고 발언했다. 얼핏 보면 비문계는 촛불 민주주의, 친문계는 온라인 민주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야당 인사 ㄱ씨는 “촛불 민주주의와 온라인 민주주의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광장의 촛불은 매주 수십만 명이 모여도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고 평화집회를 이어 왔다. 반면 온라인 민주주의는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특정 세력의 의견을 크게 보이도록 하는 왜곡된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1월 6일 민주당 산하 민주연구원의 ‘개헌 전략보고서’를 문제삼은 비문계 인사들이 일제히 문자 폭탄을 맞은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물론 촛불 민주주의와 온라인 민주주의는 각각의 한계를 갖고 있다. 오프라인의 촛불 민주주의는 평등한 소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퇴진행동 등 기존의 오프라인 시민단체들이 사전에 집회 내용을 기획하고 경찰에 미리 집회신고를 내지 않은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평화시위’가 발생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유발언이나 행진의 경우, 시간과 장소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집회 기획자들이 짜놓은 기본적인 틀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온라인 공간과 마찬가지로 촛불광장에서도 분위기를 이끌고 주도하는 세력 자체는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촛불 민주주의는 상시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프라인에서의 집회와 시위는 매일 일어난다. 때문에 평범한 이들의 폭발적인 참여가 결합될 경우에만 ‘촛불 민주주의’라고 인정된다.

촛불은 민주주의 무기력할 때 구원투수 역할 2008년 촛불집회 당시에도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등 기성 정치학자들은 촛불 민주주의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분석했다. 2008년 6월 최 교수는 한 토론회에서 촛불 민주주의에 대해 “민주주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이라며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다. 운동에 집중하느라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하면 반대편에서 파시즘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토론회에서 최 교수의 의견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 이남주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였다. 이 교수는 여전히 촛불 민주주의가 대의 민주주의의 일시적인 일탈이라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폭발적인 촛불집회가 한국 정치의 고유한 현상이라고 평가하는 편이다.

이 교수는 “정당정치를 중시하는 학자들은 운동정치를 낙후한 현상으로 봐왔기 때문에 촛불 민주주의를 ‘일탈’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촛불 민주주의는 한국 정치를 변화시켜온 현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1987년 6월항쟁은 물론이고 2000년대 들어 꾸준히 대규모 촛불집회가 이어져오고 있다. 촛불 민주주의를 일탈적 현상으로 보기보다 대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정치적 욕망을 소화시켜주는 유의미하게 정례화된 정치형식으로 보는 것이 맞다. 대의 민주주의를 극복하고 직접 민주주의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오랫동안 평화집회를 이어갔던 촛불광장에 비해 온라인 공간은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일각의 평가도 있다. 야당 인사 ㄱ씨도 “촛불 민주주의는 성숙한데 댓글민주주의는 왜곡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로 대표되는 오프라인 조직과 온라인의 시민들이 만나는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한 최재훈 연세대 사회학과 연구교수도 온라인 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감정성’을 꼽았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인터넷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다음 아고라 깃발. / 서성일 기자

최 교수는 온라인의 여론을 현실의 분노로 바꾸는 것은 이슈의 심각성이나 중요성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화제성이나 감정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양유업 대리점 사건이 온라인 여론을 폭발시키고 현실의 정치인들까지 움직인 결정적인 이유는 나이든 대리점주에 대한 욕설이었다. 최 교수는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인터넷 공간의 특징이 ‘양날의 칼’이라고 봤다. 남양유업 사건의 경우 인터넷 여론은 시민단체를 지지하지만, 기존의 미디어가 또 다른 화제를 만들어내면 순식간에 그쪽으로 이동한다. 즉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방향으로 가기는 어렵다는 게 최 교수의 해석이다.

온라인 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상대적으로 약한 결속력이다.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 오프라인 조직들은 오랫동안 인간적인 유대로 엮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이슈가 터져도 쉽게 받아들이고 함께 활동할 수 있다.

반면 인터넷 여론은 상대적으로 결속력이 약하다. 온라인 민주주의에 익숙한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슈를 꺼내는 것보다는 단일 이슈에 집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최 교수는 설명한다.

2008년 촛불집회는 뒤로 갈수록 미국산 쇠고기 문제 이외에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에 대한 규탄으로 이슈가 다양화됐다.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 타결 이후에도 촛불의 불씨를 살리려는 시민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쇠고기 재협상이 마무리된 뒤 촛불의 물결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현 민주주의 발전시킬 대안은 추첨민주주의” 최 교수의 설명을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입하면 이렇다. 국정농단 외에 국정교과서, 노동개악 등 다양한 이슈가 터져나오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여론은 쉽사리 분산되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온라인 민주주의에 익숙한 시민들도 촛불시민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문 연세대 SSK 연구교수(정치학 박사)는 촛불 및 온라인 민주주의로 나타난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제도적으로 소화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박사가 제시한 대안은 추첨민주주의다. 이 박사는 2012년 펴낸 저서 <추첨민주주의 이론과 실제>에서 추첨제가 지금의 민주주의를 한층 발전시킬 대안이라고 꼽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거치면서 이 교수는 추첨을 통한 시민의회 구성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제도로 안착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동안 야당뿐만 아니라 바른정당 등에서도 직접 민주주의에 가까운 국민소환제나 국민발의제 등을 도입하겠다는 논의가 있었다. 이 교수는 만약 양원제로 개헌이 된다면 상·하원이 아니라 국회와 시민의회가 공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촛불 및 인터넷 민주주의가 시민의 평등한 참여는 보장했지만, 의견을 나누는 ‘공론의 장’으로서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할 수는 있지만 결국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촛불 민주주의라고는 하나 박근혜 탄핵 촛불의 건너편에 맞불이 생겼고, 인터넷 민주주의가 펼쳐지는 인터넷 커뮤니티들도 정치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박사는 “선거는 형식상 평등한 참여가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엘리트 위주로만 참여가 가능하다. 이에 비해 추첨은 누구나 참여할 자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시민의회 구성원들은 공천이나 재선을 염두에 두고 활동할 필요도 없다. 또한, 추첨은 현재 정당정치가 대변하지 못하는 30~40%의 무당층을 대변할 수도 있다”며 “촛불광장과 온라인에서 분출된 민심을 제도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첨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나 쓰이던 제도는 아니다. 아일랜드에서는 헌법 개정을 위한 추첨 시민의회가 구성된 바 있고, 캐나다나 네덜란드 등에서도 비상설 추첨 시민의회가 생긴 적이 있다. 선거로 뽑힌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할 경우 비교적 국민 평균을 대표하는 시민의회가 법안 발의 등을 통해 견제할 수도 있다.

이 박사는 “직접 민주주의를 하고 싶다고 해서 나랑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만으로 결정하고 할 순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심사숙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적과 아군으로 사람을 나누고 판단할 게 아니라, 진보, 보수, 부동층, 노동자, 사업가 등 다양한 부류들이 한자리에서 의견을 경청하고 결정이 나면 승복하는 이런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자신이 온라인에 만든 추첨민회네트워크를 통해 구체적인 입법청원 법률안을 준비하고 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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