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총수의 '불구속 신화'는 계속된다

송진식 기자 2017. 1. 2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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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향후 박 대통령 진술, 최지성 부회장 사법처리 여부가 신변에 영향 가능성

거침없이 달리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시계가 삼성 앞에서 멈춰섰다. 특검은 1월 16일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의 총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뇌물공여, 횡령, 위증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18일 “현재로선 구속 사유가 불분명하다”며 기각했다. 이 부회장 구속은 박근혜 대통령을 사법처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최종 관문’이었다. 영장 기각으로 특검은 박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삼성은 이번 게이트에 ‘주연급 조연’으로 의심받을 만큼 깊숙이 사건에 개입돼 있다. 이미 수사를 통해 박 대통령을 매개로 한 삼성과 최순실 간 금전거래 사실이 확인됐다. 직접적으로 최순실 측에 돈을 건넨 기업도 삼성이 유일해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물주’가 삼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부회장 구속수사를 요구하는 여론도 거셌지만 영장이 기각되면서 삼성은 다시 한 번 재계의 ‘법꾸라지(법+미꾸라지)’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일단 구속은 면했지만 이 부회장이 혐의를 벗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당장 내달 초 예정된 특검 수사에서 박 대통령이 뭐라고 진술할지가 관건이다. 이 부회장과 같은 뇌물공여 혐의로 삼성의 또 다른 ‘피의자’ 신분인 최지성 부회장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도 이 부회장의 신변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삼성의 ‘불구속 신화’는 계속된다 고 이병철 회장부터 이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삼성은 3대에 걸쳐 거대 기업을 세습하는 동안 숱한 물의를 일으키고 처벌도 받았다. 이건희 회장만 해도 비자금 사건 등으로 실형만 두 번 선고받았다. 흥미로운 건 그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삼성의 총수 중 누구도 ‘투옥’ 경험은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투옥’이란 구치소나 감옥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벌범죄에 유독 관대한 사법체계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현대·기아차, SK, 한화 등 총수가 구속되거나 투옥생활을 한 다른 대기업과 비교해볼 때 이례적이다. ‘반도체 신화’, ‘휴대폰 신화’ 등 삼성이 쌓아올린 여러 신화 속에 ‘불구속 신화’도 존재하는 셈이다.

삼성의 총수가 사법처리 위기에 몰렸던 첫 번째 사건은 1966년 발생한 ‘사카린 밀수 사건’이다. 사카린은 설탕의 300~500배 단맛을 내는 인공감미료다. 삼성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 2259포대를 건설자재인 것처럼 꾸며 밀수입해 국내에서 4배가량 높은 가격을 받고 유통시키려다 부산세관에 적발되면서 사건이 알려졌다.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재벌의 밀수 범행’으로 공식화했지만, 당사자들의 말은 달랐다. 고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1993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정치 비자금 마련 등의 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이 결탁해 조직적으로 벌인 밀수”라고 주장했다. 고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지분을 넘기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도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밀수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던 이창희 한국비료 상무(고 이병철 회장 차남)가 구속돼 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룹 총수였던 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약속과 함께 한국비료를 국가에 반납하고 처벌을 면했다.

그룹을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은 1995년 터진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다른 재벌 총수 7명과 함께 기소됐다. 이 회장은 100억원의 정치 자금을 제공해 뇌물공여 혐의를 받았지만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됐고, 최종 판결에서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면했다. 이 회장은 2002년에도 불법 대선자금 제공 의혹을 받았지만 당시 그룹의 ‘2인자’였던 이학수 부회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법처리되면서 입건조차 되지 않았다.

2009년에는 삼성 특검 결과 불법 경영승계 및 조세포탈 혐의로 재차 기소됐다. 수사 결과 삼성그룹의 편법 경영승계, 비자금 은닉 등 국내 최대기업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하지만 이때도 이건희 회장은 불구속 수사를 받았고, 고법에서 조세포탈 혐의만 인정돼 징역 3년·집행유예 5년 판결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됐다.

두 차례의 집행유예 판결도 매우 이례적이라는 지적을 받았지만, 이건희 회장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 건 정권의 사면 처분이었다. 1997년에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개천절을 맞아 이 회장 등 경제인 23명을 특별사면 및 복권했다. 2009년에는 확정판결을 받은 지 불과 넉 달 만에 이명박 대통령이 이건희 회장만 ‘단독’으로 특별사면 및 복권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건희 회장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 역시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특혜”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삼성그룹의 선대 총수들은 옥살이는커녕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례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최초’라는 수식어와 함께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지만 결론은 역시나 불구속이었다. 이 부회장이 선대 총수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영장실질심사가 이뤄지는 약 12시간의 시간 동안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수의를 입고 대기하며 잠시나마 옥살이를 체험했다는 점 정도다.

특검이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조국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부회장이 불구속 상태에 있으면 삼성의 조직적 힘이 작동하면서 실체적 진실이 은폐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특검은 수사를 보강해 영장을 재청구하거나 다른 사장단급 인사에 대한 영장 청구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재용과 ‘죄수의 딜레마’ 뇌물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제공한 뇌물의 ‘대가성’이 있어야 한다. 법원에서 이 부회장의 영장이 기각된 주된 이유가 바로 이 대가성에 대한 입증이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뇌물죄 입증은 대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자료가 없는 한 뇌물을 제공한 사람과 받은 사람 간 ‘진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기본적으로 ‘죄수의 딜레마’가 적용되는 사안이다.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공범관계인 A와 B 두 사람이 ‘협조’해 모두 범행을 부인하면 둘 다 가벼운 형벌을 받는다. 반면 둘 중 한 명이라도 ‘배반’을 택해 A와 B 중 한 명은 자백을 하고, 한 명은 범행을 부인할 경우 부인한 사람만 중형을 받는다. 둘 다 배반(자백)할 경우 A와 B 모두 협조(부인)했을 때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다.

게이트 연루의혹 자체를 부인해온 박근혜 대통령이 뇌물죄를 인정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의 전략도 처음에는 박 대통령과 ‘협조’해 범행 자체를 부인하는 전략을 택했다. 실제 삼성 측이 처음부터 “최순실에게 금전을 제공했다”고 인정한 건 아니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승마협회 회장사로서 선수를 지원한 것”이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 부회장 측에 불리한 여러 진술과 증거가 잇달아 발견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핵심인물인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수첩에서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 관련 메모가 발견됐다. 노승일 K스포츠재단 부장은 최순실 지원금 문제로 삼성과 상의한 여러 정황과 증거를 폭로했고,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자료와 최순실의 조카인 장시호가 제출한 태블릿PC에서는 이를 입증하는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등이 다수 확인됐다.

이에 다급해진 이 부회장은 ‘배반’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최순실에게 돈이 건네진 점은 인정하되, 박 대통령의 강압에 의해 제공된 대가성 없는 돈이었다고 주장해 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떠넘긴 셈이다.

이제 박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자신만이라도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느냐, 박 대통령 자신도 이 부회장을 ‘배반’하느냐다. 박 대통령이 향후 특검 수사에서 죄를 토로할 가능성은 여전히 낮아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박 대통령 본인만 ‘강요죄’ 등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불리하다. 이미 검찰도 최순실을 기소하면서 강요죄의 공범으로 박 대통령을 지목한 바 있다.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박 대통령이 끝까지 입을 다무는 게 처벌을 면하기 위한 최상의 시나리오다.

반대로 박 대통령이 이 부회장을 ‘배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부회장이 독대 자리에서 먼저 ‘경영권 승계과정의 배려’ 등을 부탁해 왔고, 이 부회장이 ‘자가발전’으로 최순실을 지원한 것이지 박 대통령 본인은 지원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할 가능성이다. 이렇게 되면 최순실에게 건넨 돈의 대가성이 입증되는 셈이어서 이 부회장에겐 최악의 시나리오가 된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엑설로드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바로 ‘맞불작전’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배반했다면 자신도 배반하는 게 혼자만 협조했을 때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최지성은 특검의 ‘플랜B’인가 이 부회장의 영장이 기각되던 날 특검은 “최지성 부회장도 피의자”라고 밝혔다. 혐의는 이 부회장과 같은 뇌물공여다. 이 부회장 외 특검의 수사를 받는 삼성 고위 임원은 사내 2인자로 통하는 최지성 부회장(미래전략실 실장), 장충기 사장(미래전략실 차장), 박상진 대외협력담당 사장 등 3명이다. 특검은 영장이 기각되기 전까지는 언론 등의 요구에도 이 3명의 정확한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의 영장을 청구할 당시에는 “최 부회장 등 3명은 불구속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재계 등은 최 부회장 등이 참고인 신분인 것으로 추정해 왔다.

최지성 삼성 부회장(미래전략실장)이 1월 9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이 때문에 특검이 영장 기각과 동시에 최 부회장을 피의자로 언급한 것은 다분히 계산적이고 계획적인 순서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의 영장이 기각될 것에 대비해 최 부회장을 피의자로 올려놓고 ‘플랜B’를 그려왔다는 추정이다. 이 부회장을 통한 박 대통령의 뇌물죄 혐의 입증이 어렵다면 최 부회장을 통해 시도해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삼성이 최순실 측에 제공한 금전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한다는 이유도 있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최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가능성도 제기 중이다.

관건은 특검이 최 부회장에 대한 영장 청구에 나설 경우 최 부회장이 과거 이학수 부회장처럼 책임을 떠안고 갈 것인지 여부다. 최 부회장은 특검 소환조사 당시 상당히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학수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방패막이’가 돼 책임을 지거나 이 회장과 책임을 나눠 가졌다. 최 부회장도 이 회장이 발탁하고 중용한 인사다. 이 회장이 병석에 누운 뒤에는 이 부회장을 보필하며 그룹 구조개편이나 경영권 승계작업을 주도했다. 이 부회장 역시 최 부회장을 많이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끌게 된 이후에도 최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미래전략실의 큰 틀에는 이 부회장도 손을 대지 않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 부회장과 이 부회장의 관계가 돈독하다 해도 최 부회장은 어디까지나 이건희 회장의 사람”이라며 “최근 이 부회장이 미래전략실 해체를 거론하는 등 향후 최 부회장의 그룹 내 입지가 흔들릴 여지도 있어 특검이 구속영장을 청구할 경우 최 부회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라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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