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책임투자 좀 하세요.."투자한 만큼 목소리내야"

백철 기자 2017. 1. 2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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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공적 기금의 책임투자 제도화가 답··제2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방지 위해 절실
1월 1일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국정농단 특검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이석우 기자

1월 16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팀은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구속기소했다. 문 이사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를 받고 있다. 문 이사장의 기소를 전후로 야당 의원들은 정부나 국민연금 이사장이 독단으로 기금운용을 결정할 수 없게 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제2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막기 위해서는 공적 기금이 사회적 책임투자를 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공적 기금이 평소에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등 비재무적 요소들을 고려해 투자한다면 기업도 평소에 체질을 개선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미 국민연금법에 ESG가 명시돼 있다. 2015년 개정안에 따라 국민연금은 투자할 때 ESG 등의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 ESG는 유엔이 후원하는 책임투자원칙(PRI) 등에서 채택한 사회적 책임투자의 핵심 요소다. 여러 공적 기금의 기금자산 운용 원칙을 명시한 국가재정법 63조도 기금 운용 시 공공성을 고려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법 상의 ESG 원칙은 권고사항에 가깝다. 국가재정법 상의 ‘공공성’은 지나치게 모호한 조항이라 역시 강제성이 거의 없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건의 경우, ESG 중 ‘지배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합병 찬성이 결정된 2015년 7월 10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서는 지배구조 등 ESG 원칙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대주주 거수기 노릇 말고 적극적 관여해야 합병 전까지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1%, 제일모직 지분 5.04%를 보유했다. 국민연금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두 회사의 합병이 성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합병이 확정된 직후 국민연금이 책임투자의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2015년 7월 17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는 “국민연금은 삼성그룹의 ESG, 특히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해왔나”라며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데에는 투자만 하고 기업 관여를 소홀히 한 국민연금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비판했다. 또한 네트워크는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그룹 승계문제에 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재벌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후진적이고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네트워크는 시장의 큰손인 공적 기금이 기업에 투자할 때 ESG에 대한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 기금이 책임투자에 민감할수록 기업들도 스스로 체질을 개선하려 들 것이고, 결과적으로 단기자금인 헤지펀드에 휘둘리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네트워크 참여단체인 사회책임투자포럼의 이종오 사무국장은 국민연금에 보다 적극적인 기업 관여를 주문했다. 그는 “기업 관여를 빼면 사회책임투자는 있을 수 없다. 과거 정부에서 공적 기금의 기업 관여를 늘리겠다고 하니 ‘연기금 사회주의’라는 논리까지 들며 기업 쪽에서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10을 투자해놓고 1의 목소리만 내라는 것은 오히려 자본주의 원칙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국민연금은 그동안 기업 관여는커녕 대주주의 거수기 노릇만 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CEO 스코어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해 11월 말까지 투자기업 752곳의 3018개 주주총회 안건에 의결권을 행사했다. 이 가운데 반대를 행사한 비율은 9.6%에 그쳤다. 2015년의 반대 의결권 행사 비율인 10.1%보다도 오히려 낮아졌다. 국민연금을 제외한 공적 기금의 반대 의결 비율은 2%대로 더욱 낮았다. 국민연금은 정관, 임원 변경 등 경영에 민감한 사안에 있어서는 대체로 찬성표를 던졌다.

법적으로 사회책임투자를 강제하지 않다보니 공적 기금의 책임투자 비율도 매우 낮다. 지난해 6월 투자 리서치회사인 모닝스타코리아가 작성한 국회 예산정책처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책임투자 규모는 약 6조8500억원으로 국민연금 전체 규모의 1%를 약간 넘는 수준이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의 책임투자 규모는 1000억원 내외였다. 이종오 사무국장은 “현행 국민연금법에서 책임투자가 권고조항이다보니 규모가 매우 작다”며 “PRI의 가입 기구인 국민연금뿐만 아니라 모든 공적 기금의 사회적 책임을 제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책임투자를 대하는 국민연금의 소극적인 자세는 지난해 6월 국민연금의 PRI 보고서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국민연금은 2009년 6월 PRI에 가입했지만 7년간 이행보고서를 낸 바가 없다. 지난해 5월 말 국민연금이 가습기 살균제 관련 업체에 투자한 사실이 밝혀지며 여론의 공분을 사자 그해 6월 29일 갑자기 PRI에 처음으로 책임투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국민연금은 “ESG 요소에 대해 투자한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국민연금은 투자 결정과정에서 책임투자를 시행하는 자산의 종류를 적으라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묻는 PRI의 주관식 질문에는 국민연금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ESG 성과 높은 기업일수록 재무성과 우수 이미 사회책임투자포럼은 지난해 9월 국회 사회책임투자정책 연구포럼 세미나에서 책임투자 활성화를 위한 법률 개정안을 제안한 바 있다. 사회책임투자포럼은 국민연금법이 아니라 모든 공적 기금을 관장하는 국가재정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포럼 측은 ‘원칙준수 예외공시’ 방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일단 국가재정법에 ESG 원칙을 고려하도록 권고하는 조항을 넣는다. 이후에 ESG를 고려하지 않은 투자에 대해서는 해당 연기금이 공시를 통해 설명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미 지난해 9월 12일 노웅래 민주당 의원이 국가재정법에 국민연금법과 마찬가지로 ‘기금을 운영하는 경우 ESG 등의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의 반대로 이 개정안은 발이 묶여 있다. 지난해 11월 1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는 노 의원의 개정안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수석전문위원이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설명하자 송언석 기획재정부 2차관은 “현재 규정 자체가 안정성·수익성·공공성을 고려해 자산을 운용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이미 책임투자의 개념이 포함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국가재정법이 아닌 개별 연기금법에 책임투자 규정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뒤이어 최교일 새누리당 의원은 수익성을 이유로 개정안에 반대했다. 최 의원은 “자산은 기본적으로 수익을 얻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은 운용자에게 맡기는 것이 맞지 않나. 자꾸 이렇게 제한을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후 논의는 개정안을 계류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일단 최 의원의 주장은 앞서 언급한 국회 예산정책처 보고서에서 이미 반박된 내용이다. 예산정책처 보고서는 2015년 3월 영국 옥스퍼드대학이 작성한 보고서를 제시했다. 옥스퍼드 보고서는 200여건의 ESG 관련 최신연구를 종합한 보고서다. 옥스퍼드 보고서에 따르면 분석 대상인 연구 대부분에서 ESG 성과가 높은 기업일수록 재무성과와 주가수익률이 높게 나타났다. 그 외에도 예산정책처는 13년간 500개 기업의 주가수익률을 분석해 ESG 요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기업일수록 2008년 금융위기 기간을 포함해 초과수익을 달성한 다른 연구자료를 인용하기도 했다.

이 국장은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공적 기금이 원칙준수, 예외공시 방식 등으로 책임투자를 하도록 제도를 만들었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의 경우 기금 내부에 윤리위원회를 두고 비윤리적인 기업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투자 철회를 하기도 한다”며 “국민연금을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시키고, 기금 수탁자로서 위탁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기업의 활동에 관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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