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연설이 시작하자 내린 비, 연설이 끝나자 비도 멈췄다

이용인 2017. 1. 2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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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취임식 르포]
"지하철 만원이라 타기 힘들 것" 선배들의 조언에
침낭 메고 사무실서 새우잠 잤지만 지하철 혼잡 없어
8년 전 오바마 취임식때보다 인파 적어..참석자들도 거의 백인
힐러리 등장하자 "구속하라"..오바마엔 "거짓말쟁이" 구호도
환호와 시위 뒤엉킨 취임식 '트럼프 시대'의 두얼굴 보여줘

[한겨레]

20일 오전 취임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행사를 기다리고 있다.

잔뜩 겁을 먹었다. 하늘도 전날 밤부터 잔뜩 찌푸렸다.

8년 전인 2009년 1월2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 취재를 했던 선배들은 20일(현지시각)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 행사 ‘취재 노하우’를 묻자, “전날 밤에 워싱턴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일 날에는 대부분 특파원들의 거주지인 버지니아주에서 워싱턴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였다. 모든 차량이 통제되고, 지하철도 만원이라 가다서다를 반복해 제 시간에 도착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전날인 19일 침낭 하나만 달랑 들고 백악관에서 가까운 회사 사무실로 이동했다. 아침에 허겁지겁 움직이다 자칫 취임식 행사 참석을 놓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20일(현지시각) 오전 6시에 일어나 사무실이 있는 8층 화장실에서 간단한 세면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일반인들이 입장하는 보안 검색대에는 수백명이 줄을 서 있었다. 언론인 보안 검색대는 지하철을 타고 여섯 정거장을 더 이동해야 한다. 긴장을 한 채 지하철에 들어서니 빈 자리가 꽤 많았다. 오전 6시가 넘으면 지하철을 타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어리둥절했다.

언론인들 검색대가 설치된 ‘캐피틀 사우스역’에서 빠져나와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걸어가는 것도 힘들 것’이라는 얘기는 8년전 구문이었다. 철책 바리게이트을 10분 가량 걸어들어와, 외신들이나 전직 공화당 간부들이 앉을 수 있는 ‘섹션 16’에 오전 8시쯤 도착하니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취임식이 시작되기 직전인 10시50분쯤 <폭스 뉴스> 기자에게 살짝 물어봤다. 다음은 간단하게 주고받은 문답이다.

-8년전에도 취재했니?

“응. 그런데 내 이름은 적지 마”

-알았어. 참석자 수는 어때?

=오바마 때와 비교하면 반 정도 되는 것 같애.

-그때 180만명이 왔다고 하던데.

=저기 워싱턴 모뉴먼트(기념비) 보이지. 거기까지 정말 꽉찼어. 그때는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으니까.

-분위기는 어때?

=그때가 아무래도 더 익사이팅했지(들떠 있었지)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침낭에서 잤다.

참석자들 면면도 거의 백인이다. 유색 인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7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와 엇비슷하다. 외신들도 이날 행사가 끝난 뒤 참석자를 정확하게 집계하지는 않았지만, 8년 전 사진과 이날 사진을 비교하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트럼프 본인이 “사상 최대의 참가자들이 올 것”이라고 장담했기 때문에 이날 참석자수는 더욱 관심을 끌었다.

본격적인 취임식 행사가 시작됐지만 ‘섹션 16’은 연단에서 가까운 꽤 좋은 자리임에도 솔직히 말해 귀빈석에 앉아있거나 연설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세세하게 볼 수 없었다. 기껏해야 손을 흔드는 것 등의 큰 몸짓만 눈에 들어왔다. 세세한 표정들은 ‘섹션 16’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화면을 통해서만 잡을 수 있었다.

오전 10시56분터 전직 대통령들이 하나둘씩 호명돼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연단 뒷문을 통해 등장했다. 관객들 반응은 거의 없었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에다 오래 전에 퇴임한 탓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2009년 오바마 취임식과 2017년 트럼프 취임식 사진.

다음으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및 부인 힐러리가 호명돼 연단으로 내려왔다. 대형 스크린에 힐러리 얼굴이 크게 비춰지자, 박수와 야유가 동시에 나왔다. 잠시 뒤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이 ‘락업 허’(그녀를 구속하라)고 외쳤다. 구호가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공화당 및 트럼프 지지자들의 힐러리에 대한 ‘증오’ 수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 부부가 등장할 때는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 소리가 나왔다.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 금융위기를 촉발해 ‘최악의 미국 대통령’ 가운데 한명으로도 꼽히는 데도 ‘공화당 식구’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는 듯 했다. 곧바로 화면이 힐러리와 민주당 경선을 겨루었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비추자 다시 야유가 나왔다.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오바마가 등장할 땐 박수가 나오긴 했지마 소리가 아주 작았다. 의례적인 ‘물개 박수’와 비슷했다. 그래도 비록 민주당 소속이지만 현직 대통령 부인에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뒤 작고 짧지만 야유가 나왔다. 미셸이 힐러리에게 인사하자, 힐러리는 활짝 웃음을 보였다. 참석자들 사이에서 역시 야유가 나왔다.

11시25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존 바이든 부통령과 함께 연단으로 나오자 야유는 없었지만 박수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절제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참석자들 뒤쪽에서부터 “거짓말쟁이”이라는 구호가 물결을 타고 앞으로 번졌다.

마지막으로 이날의 주인공인 트럼프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특유의 ‘엄지 척’을 하며 참석자들을 좌우로 훑었다. 참석자들이 “유에스에이”(USA)를 외쳤다. “유에스에이”는 미국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공화당원들이 좋아하는 구호다.

이어 척 슈머 미국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연설을 하자 “내려와”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슈머 대표도 분위기를 눈치챈 탓인지 연설 도중 몇번 멈짓하는 모습을 보였다.

20일 취임식 행사를 1시간여 앞두고도 아직도 일부 구역엔 빈자리가 남아있다.

트럼프가 11시59분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취임선서를 마치자 해군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21발의 축포가 ‘트럼프 시대’를 알렸다.

하지만 공교롭게 트럼프가 연설을 시작하자마 비가 오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은 아니었지만, 그냥 맞고 앉아 있기엔 부담스러웠다. 참석자들이 일어나 우비를 입고 우산을 꺼내 쓰기 시작하면서 장내가 몇분간 어수선해졌다. 트럼프가 “이슬람 테러리즘을 완전히 뿌리 뽑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 박수 소리도 가장 컸다. 16분간의 연설이 끝나자 때맞춰 비가 멈췄다.

취임식이 끝나고 백악관 근처 사무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지하철도 붐비지 않았다. 사무실 앞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등의 구호가 새겨진 모자를 팔던 한 상인은 ‘많이 팔았냐’는 질문에 “별로 못팔았다. 다들 구경만 하고 사지 않는다”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취임식장에서 만난 린다 험플리(62)는 “트럼프가 중산층을 보호할 것”이라며 “트럼프 시대의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반면, 취임식 뒤에 백악관 근처 트럼프 항의 집회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제이콥스(64)는 “트럼프는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라며 “트럼프 시대에 희망도 미래도 없다”고 말했다. 분열된 미국을 더 분열시킨 ‘트럼프 시대’의 두 얼굴이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20일 오후 트럼프 반대 집회 참석자들이 바람을 넣은 코끼리상에 인종차별주의자는 구호를 붙인 채 운반하고 있다.
트럼프 항의집회 참석자들이 20일 백악관 근처에서 각종 분장을 한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푸틴과 트럼프의 관계를 비꼰 손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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