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도 알바뛰는 울산, '박정희 도시'의 현주소

정은주 2017. 1. 1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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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017 광장의 노래]
2부 우리안의 박정희들(5) - 무너지는 박정희 천국

[한겨레] 지난 11일 오후 4시께 울산시 동구 방어동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정문 앞.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오토바이 수백 대가 부릉 소리를 내며 조선소에서 빠져나왔다. 해가 지려면 한참 남은 시각에 서둘러 퇴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었다. 조선업 불황으로 일감이 줄어들어 잔업이나 특근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근처 도로에 빼곡히 주차돼 있던 출퇴근용 오토바이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 2년 새 현대중에서 일하는 원·하청 노동자 수가 4분의 1이나 줄었다. ‘수주절벽’의 직격탄을 맞은 해양플랜트 사업본부가 있는 방어동 꽃바위 아파트 주변 원룸은 텅텅 비었다. 2014년까지만 해도 빈방이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월 50만원 수준의 원룸은 10만원대로 떨어졌다. 퇴근시간이면 북적이던 마트나 식당도 한산하다. 노동자들은 퇴근길 술 생각을 애써 누르고 집으로 향하거나 ‘알바’를 뛰러 갔다.

‘박정희의 천국’ 울산이 흔들리고 있다. ‘동남권 공업벨트’에서도 ‘산업수도’로 불리는 울산은 대한민국의 수출입국을 선도한 전진기지로서 자부심이 남다른 지역이다. 수출공업화 전략이 성공하면서 일자리와 소득이 늘었고, 일부 노동자들은 중산층이 되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조선업이 위기에 빠지면서 사상 유례없는 고용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다.

# 정규직도 ‘대리 알바’ 뛰는 현실

내년 퇴임을 앞둔 현대중 정규직 노동자 이민선(가명·59)씨는 지난달부터 휴직 중이다. 1981년 입사해 35년간 장비·설비를 지원하는 업무를 맡아왔는데 지난해 7월 회사가 설비지원부 등 3개 부서의 분사를 결정했다. 설비지원부 노동자 994명 가운데 316명이 분사를 거부했다. 다른 부서에서도 220명이 거부에 동참했다. 이들 536명은 용접과 도장 교육을 6주간 받았다. 사내 자격증을 딴 노동자는 현장실습을 나갔지만 이씨처럼 자격증을 못 딴 사람은 자택 대기 명령을 받았다. 그 후 휴업 대기자로 발령나 한 달에 200만원을 겨우 받는다. 평달에 400만원, 상여금이 나오는 달에는 700만원까지 손에 쥐었던 그는 “가족들 얼굴 보기에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이들 학원비가 필요한 30, 40대들은 대리운전이나 치킨 배달 아르바이트로 버티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 울산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대리 알바’ 시장의 경쟁자다. 현대중 사내하청으로 일하며 대리운전을 병행하는 김상희(가명·37)씨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중이 있는) 방어진에선 대리운전 콜이 뜨질 않아요. 노동자들이 술 먹고 대리기사를 불러야 하는데 다들 어려우니까 안 먹는 거예요.” 정규직들도 대리운전에 뛰어들면서 가뜩이나 잡기 힘든 콜 경쟁이 더 심해졌다.

‘울산 토박이’인 김씨는 군 제대 후인 2002년 시급이 좋은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시급 4300원에 야근하고 주말 특근하면 월 200만원을 벌 수 있었다. 15년간 경력이 쌓였지만 그의 월급은 지금도 월 200만원이다. 일감이 줄어 월급이 반토막 났다. 잔업이나 특근은 꿈도 꿀 수 없고 무급휴가를 강요받고 있다. <한겨레>를 만난 지난 11일에도 이틀간 쉬다가 출근했는데 정상 근무시간(8시간)도 못 채우고 오후 3시에 퇴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노동시간과 임금이 줄어들자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해고하지 않아도 스스로 떠나갔다. 김씨와 함께 일하던 동료 260명 가운데 겨우 70~80명만 남았다. 김씨도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고 있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다. 9살, 7살, 5살인 세 아이를 키울 일이 막막해 아내는 도배 일을 배우고 있다.

# 한국적 신자유주의는 70년대부터 시작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1978년 한국을 방문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밀턴 프리드먼과 함께 20세기 신자유주의를 이끈 하이에크는 74년 경제학 노벨상을 받은 석학으로 우리나라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초청으로 9월10일부터 이틀 동안 울산 현대중공업 등을 돌아본 하이에크는 “한국은 개발도상국 중 자유기업체제가 가장 성공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나라다. 경탄을 금할 수 없다”고 칭찬했다. 박정희의 국가 주도 경제와 ‘작은정부-자유시장’을 주창하는 신자유주의는 언뜻 모순된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둘은 극단적인 경쟁을 장려하고 노조를 적대시하는 정책에서 궁합이 잘 맞았다.

박정희 시대에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개념이 이미 도입됐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위임관리제’다. 위임관리제는 공장의 일정 부분을 하도급업자에 넘기는 사내하청제도다.

1974년 9월19일 오전 8시께 울산 현대조선소(현대중 울산조선소). 출근하던 노동자 300여명이 건조부 앞 모래사장에 모였다. 조장(조원 위 관리직급)의 작업 지시를 받기 위해서였다. 조장들은 회사가 직영 노동자 2천여명을 위임관리제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알렸다. 노동자들은 반발하며 본관 사무실로 몰려가 유리창을 깨고 전화기, 장부, 책상 등을 부쉈다. 경찰이 도착해 제지했지만 연좌농성에 참여한 노동자는 2천명으로 불었다. 오후 5시30분께 정주영 회장이 도착했다. 정 회장은 단호했다. “위임관리제는 회사의 존폐 문제다. 종업원이 반대한다고 절대 철회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야유와 함께 돌을 던졌다. 정 회장은 머리에 상처를 입고 도피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 노동자들은 폭동 양상으로 치달았다. 오후 4시께 출근한 야간 조 노동자까지 합세해 시위대는 3천~4천명에 이르렀다. 공장 밖으로 나와 소방차, 시내버스, 택시 등을 공격하고 회사 앞 외국인 숙소를 습격해 티브이(TV) 등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외국인 기술자 47명은 뒷산을 넘어 달아났고 일본인 기술자 25명은 부산 수영 비행장까지 도주했다. 새벽 1시께, 18시간에 걸친 싸움에 지친 노동자들이 흩어졌다. 이때부터 경찰의 연행이 시작돼 아침까지 877명이 붙잡혔다.

시위가 끝나자 현대중은 3일 동안의 휴업을 거쳐 위임관리제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기능직 사원 중 직영은 3929명(26.6%)으로 줄었고 하도급 사원은 1만852명(73.4%)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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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시대, 국가가 비정규직 고용 앞장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 역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 새롭게 등장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1970년대에도 ‘비정규직’은 있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공공부문이 앞장서 이 제도를 활용했다. 철도 노동자의 경우 임시직 2874명 가운데 2473명이 매년 재고용하는 상용임시직이었다. 나머지는 겨울철에만 150일간 고용하는 일용임시직이었다. 임시직에겐 △해고예고 △퇴직금 △유급 휴가 △시간외근무수당 △승급·승진 등을 적용하지 않았다. 체신 부문은 3개월마다 재고용하는 형식을 취했고, 서울시·부산시·대구시 등 행정기관에 일하는 임시직 노동자도 3만명이 넘었다.

은수미 전 의원은 ‘사내하도급과 한국의 고용구조’라는 논문에서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하청계열화와 사내하도급을 결합하는 산업정책을 펼쳤다”고 밝혔다. 사내하도급을 활용하면 원청의 노무관리 능력이 취약하더라도 대규모 집적과 생산이 가능해진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이런 방식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포철은 포항공장이 완공되기도 전인 1971년 2월 ‘협력사업부’를 신설하고 6월에 사내하청 모집계획을 확정했다. 그 결과 포철에는 1973년 사내하청이 20개 업체, 노동자 3213명(전체 노동자의 44.7%)에 이르렀다. 은 전 의원은 “사내하청을 활용한 노무관리 모델은 손쉽게 퍼져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특징으로 정착했다”고 진단했다.

박정희 시대 공공부문이 비정규직 고용 앞장
포항제철, 현대중공업 등 기업들도 적극 도입 ‘새마을 성과급제’는 박근혜 성과연봉제 ‘원형’
저임금-장시간노동-재벌육성-수출 통한 성장
박정희 모델 유통기한 다해 성장엔진 꺼져가 박근혜 탄핵 촛불의 경제적 요구는
박정희 모델 탈피해 새로운 성장 공식 찾는 것 정규직도 ‘대리 알바’ 뛰는 울산에서
한국 경제의 앞날을 묻다

국가가 솔선수범하는데 기업들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리급들, 쪼금 과장급들 요런 사람들은 반짝반짝하는 알루미늄 화이바(안전모)를 썼고, 그다음에 직영들은 노란 화이바, 하도급은 파란 화이바. 모자 쓴 화이바만 보면 아 저게 누구라는 거 어디서나 다 알 수 있거든. (…) 직영하고 (하도급은) 천지 차이인데.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여자들이 대하는 게 벌써 달라요. 애들도 역시 직영 아들은 쫌 우쭐대고, 하도급 아들은 벌써 한풀 꺾(어지)고.” 1974년 현대중 사내하청에 입사해 용접공으로 일했던 윤석수(가명)씨의 말이다.(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 구술 자료, 2005년)

위임관리는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는 불안한 신분인데다 상여금, 퇴직금 등을 주지 않았다. 직영사원은 점심을 무료로 먹는데 위임기능공은 돈 내고 사먹어야 했다. 안전화, 안전모도 차별 지급했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유니폼으로 구별하고 처우도 차별하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현대중은 1970년대 말까지 위임관리 등 하청 비중을 60% 이상 유지했다. 그러나 하청이 생산성 향상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하청 인력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983년엔 하청이 직영(1만7114명)의 36.9%인 5423명에 그쳤다.

사내하청 제도가 현대중에서 잠시 사라진 것은 1989년의 일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이 ‘하도급 철폐, 하청의 직영화’를 요구했고 56일간의 파업 끝에 노사는 ‘하도급 직영화 합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길지 않았다. 현대중은 직영의 이직률이 낮아지자 신규채용을 중단하고 사내하청 비율을 점점 높여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 속도가 빨라졌다. 직영과 하청의 임금 격차가 커지면서 회사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사내하청 고용을 더욱 확대했다. 최근에는 기술과 경험 부족으로 노동력을 대거 투입한 해양사업부에 사내하청이 몰렸다. ‘수주절벽’이 본격화하자 사내하청 노동자가 ‘방패막이’로 활용됐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으로 현대중의 원청 노동자는 2만3400명, 사내하청 노동자는 2만6850명. 2015년 1월보다 원청은 15.8%(4400명), 사내하청은 31.1%(1만2120명) 감소한 수치다.

비정규직 고용형태는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대법원이 사내하청을 불법파견으로 최종 판결하자 새로운 직제를 만들었다. 촉탁 계약직(원청이 직접 고용한 비정규직)이다. 2013년 2월 현대차에 입사한 박점환(27)씨는 23개월 동안 울산공장에서 일하며 근로계약서를 16차례 작성했다. 계약 기간은 13일짜리부터 184일짜리까지 천차만별이다. 재계약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단 하루의 연차휴가도 쓰지 않고 박씨는 성실히 일했다. 상사들은 “성실히 잘하면 계속 일할 수 있다”며 ‘희망고문’을 했다. 그러나 근로기간 2년을 앞두고 계약해지 통보를 문자로 받았다.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 박씨는 “촉탁직은 일회용품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2015년 7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지만 회사가 불복해 법정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박씨는 씩씩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긴 싸움을 준비한다”며 “정규직이 되는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74년 경주의 방산업체 풍산금속에서 입사했다가 손가락을 3개를 잃고 정리해고됐던 김영석(왼쪽)씨는 울산과학대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다 3년 전 또다시 해고당했다. 2013년 2월 현대자동차 촉탁계약직으로 입사한 박점환씨는 23개월간 16차례 근로계약서를 작성했지만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2년 전 계약 해지당했다. 회사를 상대로 기나긴 싸움을 펼치고 있는 두 사람이 16일 오후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앞에 나란히 서있다. 울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노동귀족’과 ‘현금지급기’ 사이

동남권 벨트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이라 비난받기 일쑤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이 잔업과 주말특근 같은 초과근무의 대가라는 사실은 쉽게 무시된다. 노동자들에게 잔업은 강제적인 동시에 자발적이었다. 회사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잔업을 해야 하며, 불황기에는 잔업을 할당받기 위해 경쟁하기도 한다. 관리자는 노동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잔업 할당을 활용한다. 83년에 현대중에 입사했다가 3년 만에 현대차로 옮겨 31년째 근무하는 한승기(가명·58)씨는 “주말 특근 탓에 평생 놀러 다니지도 못하지만 잔업을 하지 않으면 살림이 빠듯하다”고 말한다. 29살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자녀가 넷이나 되는데다 이혼하며 전아내의 빚까지 갚아주는 바람에 형편이 어렵다. 29살 큰아들은 아직 취업하지 못했다. 퇴직이 2년밖에 남지 않아 마음을 졸이고 있다고 했다.

현대그룹 계열사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따른 임금소득 상승으로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한국적 기준으로 중산층에 편입된 것이다. 하지만 그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거주지의 공간성과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논문에서 “장시간의 육체노동이 지배하는 작업장과 중산층 주거지의 문화적 간격은 남성 노동자와 그 아내 혹은 자녀들 사이의 가치와 의식 차이로 나타난다. 한 노동자는 가족 안에서 자신의 처지를 ‘현금지급기’에 빗댔고 동료들은 이에 공감을 표시했다”고 밝혔다.

울산과학대에서 청소노동자 일을 하다 해고를 당한 김영석씨의 손. 김씨는 방산업체 풍산금속에서 일하다 산재를 당했다. 울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장시간 노동은 산업재해로 이어진다. 74년 경주의 방산업체인 풍산금속에 입사한 김영석(69)씨는 79년 3월23일 새벽 3시께 산재를 당했다. 19살 실습생이 졸다가 넘어지면서 스위치를 잘못 건드려 순식간에 김씨의 손가락 3개가 프레스 기계에 의해 잘려나갔다. 기절한 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봉합 수술은 실패했다. 잘린 손가락으로 다른 공장에 취업하지 못해 청소노동자로 살아온 김씨는 76년 풍산금속이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회사를 방문한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60~70년대 노동집약적 수출공업화 전략으로 산업재해가 급증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매년 13만명의 노동자가 재해를 입고 그 가운데 15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대중공업에서 8년간 일했던 조돈희(61)씨는 조선소에 대해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가는 막장과 다를 바 없는 곳”으로 회고했다. “컴컴한 배 안에서 거대한 환풍기가 돌아가는데 한쪽에선 불꽃을 뿜으며 용접하고, 다른 쪽에선 철판을 그라인더로 갈며 분진을 쏟아낸다. 떨어지고 부딪히는 안전사고는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전쟁터와 같았다.” 원영미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는 “(노동자들이) 현대차는 ‘철공소’ ‘똥구루마’ 현대중은 ‘조지나 공장’으로 불렀다는 것은 스스로 작업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선 산업재해가 발생한 공장에 발주를 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산업재해가 국제 경쟁력을 낮추는 주요 원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 ‘새마을 성과제’, 박근혜 정부 성과급제의 원형

1973년 10월 오일 쇼크로 성장이 주춤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공장 새마을운동’을 구상하고 노동생산성과 임금을 연결하는 ‘새마을 성과급제’를 실천 사항으로 내세웠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일방적으로 도입해 대규모 파업을 불러왔던 ‘공공부문 성과급제’의 원형인 셈이다. 새마을 성과제는 호봉, 입사연도에 관계없이 기능 정도에 따라 4등급으로 분리해 각각 4점, 3점, 2점, 1점을 배정하는 형식이었다. 이와 함께 ‘직장 점수’를 둬 상사가 노동자의 근무 태도 등에 따라 시간당 1점씩 부여하도록 했다.

“보통 시급이 약 30원 정도 올랐습니다. 요즘은 하향평준화되어 가지고 똑같이 정액, 정률로 올리지만 옛날에는 A, B, C, D 해가지고 차등을 뒀거든요. 그래서 많이 오른 사람은 약 30~40원, 적게 오른 사람은 20~25원, 이런 식으로 등급을 매겨 줬다고. 그때 상여금도 다 그렇게 줬어요.”(김상철, <울산 근로자들의 생애사>, 2013년)

공장 새마을운동은 ‘근무 기강 확립운동’으로 번져 갔다. ‘작업 중 잡담 안 하기’ ‘보행 중 담배 안 피우기’ ‘꽁초 안 버리기’ ‘안전모 안전화 착용하기’ ‘표준 삭발하기’ ‘인사 먼저 하기’ 등 다양한 운동이 펼쳐졌다. 이를 강제하는 통제 도구로 새마을 성과급제가 활용됐다. 인사고과의 덫에 걸린 노동자들은 노동통제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 같은 작업장에서 경비원은 헌병 노릇을 맡았다. 건장한 체구의 경비원은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짧은 머리 사진을 붙여놓고 그 기준에 따라 두발을 쟀다. 불량할 경우 머리를 깎도록 경고하거나 이발 기구로 직접 밀어버렸다. 출입증이나 작업복이 없는 노동자는 공장 안으로 아예 들여보내지 않았다. 내년에 퇴직하는 현대차 노동자 한승기씨는 청년 시절 겪은 모욕감을 생생히 기억했다. “늦어서 택시를 타고 출근해 정문에 내리는데 경비가 다짜고짜 귀싸대기를 올리더라고요. 현대차 안 타고 다른 차 탔다고. 경비원이 이유 없이 때려도 다 맞았습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노동자들의 요구 가운데 ‘두발·복장 자율화’와 ‘강압적인 경비원의 태도 개선’이 들어갔던 이유다.

공장 새마을운동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뀌었지만, 그 명맥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90년대 이후 사실상 중단됐다.

# 2016 박근혜 탄핵 촛불의 경제적 요구

공장 새마을운동은 중단됐지만 박정희식 경제성장 모델은 그대로다. 박정희 모델의 핵심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정경유착(재벌육성)을 통한 자본축적-수출을 통한 성장’이다. 이 모델은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을 하는 데는 유효했으나 이미 경제대국 반열에 든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통한 자본축적이 끝난 현재 상태에서 박정희 모델은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공룡이 된 재벌은 돈 쓸 곳이 없어서 10조원이 넘는 돈을 땅 사는 데 쓰고 있는데,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이다. 노동 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 내수시장을 키우며, 재벌개혁을 통해 창업 공간을 열어야 진정한 ‘창조경제’가 가능하다. 이것이 ‘2016 박근혜 탄핵 촛불’의 경제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공무원인 30대 여성의 과로사 소식은 장시간 노동이 더이상 미덕이 될 수 없는 시대임을 일깨운다. 우리 사회 미래의 재앙을 예고하는 유례없는 저출산 문제는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고용된 소수의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청년 실업은 동전의 양면이다. 장시간 노동은 저임금을 당연시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울산/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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