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현 정치판 최고 고수 국민의당 박지원 '비즈니스 정치'로 반문연대 승부수 걸다

2017. 1. 1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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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당원들조차)은 관심이 없지만 기자가 보기에 ‘눈여겨봐야 할’ 정치적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바로 국민의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다. 이변이 없는 한 1월 15일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대표가 탄생될 것이다. 대표 경선에 맞서는 상대가 과거 의원총회에서 “야 인마, 너 나가”라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약체’이기 때문이다.

박지원 체제를 눈여겨봐야 할 이유는 그가 향후 정치지형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이어서다. 향후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주자는 자타가 공인하듯이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다. 이 ‘문재인 대세론’에 제동을 걸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을 꼽으라면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박지원 국민의당 전 비대위원장 정도다. 손학규는 원외이고 당이 없는 약점이 있지만, 박지원이 이번에 당 대표를 차지하면 명실상부하게 세력까지 얻는다.

4당 체제로 개편된 향후 대선은 예측하기 어려운 빅뱅의 정치판이 될 것이다. ‘능숙한’ 언변과 ‘폭넓은’ 정보력, ‘현란한’ 재주를 갖춘 박지원은 이런 빅뱅의 정치판을 휘젓고 다닐 적임자다. 이 시점에서 박지원을 탐구해야 하는 이유다. 정청래 전 의원은 “진짜 기름장어는 박지원”이라며 “박지원의 행보를 감시하자”는 운동까지 제안하고 있다.

그는 현 정치판에서 최고 정치고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이는 그를 ‘정치 9단’ 반열에 올리지만, 9단까지는 아니다. 박지원은 정당을 맘대로 만들 수 있는 ‘신공’을 가진 3김씨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기자의 기준에 박지원은 정치 6단 정도다. DJ라는 후광으로 컸고, 수도권에서 낙선하고 호남지역에서만 3선(비례 포함 4선)을 했기 때문이다.

/ 김정근 기자

능숙한 언변·폭넓은 정보력·현란한 재주

아무리 그래도 현재 활동하는 정치인 가운데 박지원의 정치력은 예리하고 실제적이며 탁월하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그의 정치력은 철저히 실제에 기반해 있다. 김종인이 ‘경제민주화’라는 철학(보따리) 하나 들고 이 당 저 당 기웃거리는 것에 비해, 박지원의 정치는 철저히 현실을 통해 체득된 것이다. 특히 박지원의 정치는 안철수처럼 ‘외워서’ 하는 정치나, 문재인처럼 참모의 ‘조언에 따라’ 하는 정치가 아니다. 그는 이 사안(이슈)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체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요즘 뜨고 있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특장과 비슷하다.

그 현실감 있는 정치의 바탕은 부지런함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박지원은 1942년 전남 진도에서 박종식씨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목포상고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해 6개월간 투옥된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진보 정치활동을 하다 일찍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박지원은 어렵게 성장했다. 그의 부지런함도 여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는 목포 문태고를 나와 광주교대에 진학해 부인을 만났다. 1965년 광주교대를 졸업하고 단국대 상대에 편입학했다. 그런데 그는 육군본부에서 사병으로 군복무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녔다. 직업군인이 야간대학을 다닌 경우는 있어도 일반 사병이 야간대학을 다니기는 보통 부지런함과 수완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가 대변인 시절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도 매일 새벽 동교동을 찾아 ‘DJ 말씀’을 받아 적고, 이를 소화해 기자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부지런함이 바탕이다.

그는 2008년 정계복귀 후 지역구 목포에 매주 ‘금귀월래’(금요일 귀향해 월요일 새벽 서울로 오는 것)하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그는 KTX나 고속버스 막차를 타고 매주 서울과 목포를 오가는 것을 7년이나 계속했다. 지금도 매일 신문 13개를 구독하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직접 대중과 소통하는 것은 ‘천부적’인 부지런함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박지원의 또 다른 특장은 포기하지 않는 무서운 집념이다. 그는 1978년 미국 뉴욕 한인회장 선거에 낙선한 후 2년 후 재도전해 당선됐다. 그때 38세로 당시 최연소 한인회장이었다. 같은 해 98개 지역한인회연합체인 미주지역 한인회장까지 거머쥔 집념의 소유자다. 사실 그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과 가까웠던 ‘5공 사람’이었다. 그는 미주 한인회장과 평통 해외자문위원으로 1981년 전두환 뉴욕 방문 시 환영·환송위원장을 맡았고, 전두환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박지원은 전두환을 피해 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DJ를 소개받고 180도 변신했다. 이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김경재 현 자유총연맹 회장이다. 처음 그가 DJ 주변에 나타났을 때 동교동계 사람들은 ‘5공 사람이 왜 기웃거리냐’고 백안시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특유의 친화력과 집념으로 이를 극복했다. 당시 동교동계의 한 인사는 “박지원은 DJ의 원형질막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교동계를 통과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5공 인물에서 DJ맨으로 180도 변신할 수 있던 집념은 공보수석 시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DJ에게 불리한 기사는 신문사에서 밤샘 ‘농성’을 하면서도 결국 빼는 집념을 보여줬다. 기사를 쓴 기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북송금으로 3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결국 그는 재기에 성공했다. 그가 이후 지역구에서 3선 연임을 하며, 주요 당직을 섭렵할 수 있던 것도 모두 집념의 결과다.

박지원의 현실정치에서 부지런함과 집념은 폭넓은 인맥을 쌓게 했다. 국정감사나 청문회를 앞두고 그에게는 각종 제보가 끊이질 않는다. 이런 제보를 바탕으로 박지원이 원내대표 시절인 18대 국회 1년 동안 5명의 총리·국무위원 후보를 청문회 문턱에서 좌절시켰다. 심지어 그의 인맥은 북한까지 미친다. 2006년 5월 대북송금과 관련해 구속되자 북한 <노동신문>은 “(박 전 실장의 구속은) 화해와 단합, 통일로 나가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반민족적 처사로 낙인하면서 이를 단호히 규탄한다”고 보도했을 정도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구축한 이 대북 인맥은 향후 남북관계 복원에 소중하게 쓰일 수 있다.

지난해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고 있는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 강윤중 기자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송금 관련 구속

박지원이 현실정치에서 폭넓은 인맥을 쌓을 수 있게 된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정치를 장사(비즈니스)처럼 한다는 점이다. 꼭 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민원 혹은 정보와 인재를 ‘기브 앤드 테이크’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행해 온 박지원의 스타일로 측근들도 인정한다. 측근들은 “나쁘게 보면 장사지만, 좋게 보면 정치에 비즈니스적 감각을 활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지원에게 특이점이자 무서운 점은 친노에 대한 증오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됐다. 그리고 2014년 당 대표에 출마했으나, 친노의 적자로 통하는 문재인에게 패했다. 게다가 친문에 의해 공천 탈락 위기라는 수모를 겪었다. 박지원은 당시 구치소에서 안 좋던 한쪽 눈 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박지원의 친문에 대한 증오는 신체적·정치적 증오심이 결합돼 있다. 꼭 박지원 개인뿐 아니라 그가 속한 국민의당 기류도 그렇다. 주승용 원내대표도 “친노 패권주의, 친문 패권주의가 청산되지 않고서 정권이 창출되면 박근혜 정권과 다를 바 없다”고 공언하고 있다.

박지원의 정치력과 증오가 결합돼 나타날 정치적 행보는 바로 ‘문재인 포위’이다. 이는 ‘문재인 대세론’을 막을 유일한 카드다. 그것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새누리당·바른정당·국민의당이 연대해 문재인을 고립시키는 신3당 합당이다. 이때 3당을 넘나드는 정치력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박지원이다. 비단 3당뿐 아니라 반(反)문재인 세력을 모두 모으는 ‘반문연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일차적으로 바른정당과 연대를 추진할 것이다. 바른정당 김용태 의원은 “죽어도 문재인 집권을 막기 위해 새누리는 대선이 다가오면 국민의당과 합친다는 것이 당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말했다. 이미 박지원은 반기문(충청)과 신DJP 연대를 공언하고 있다. 1997년 11월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DJP가 연합한 것을 재현하자는 것이다. 이미 박지원은 손학규 영입을 공언했고, 제3지대라고 부르는 이재오의 늘푸른한국당과도 연대할 수 있다.

“악마의 손이라도 잡고 넘어야 한다”

심지어 박지원은 민주당 내 비주류인 김종인 세력을 이탈시키고 필요하다면 ‘악의 축’으로 비난받는 친박세력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이 1997년 바로 내각제를 매개로 DJP연합을 성사시킨 당사자다. 현재 국회에는 개헌특위가 가동되고 있다. 이미 박지원은 “험난한 고개를 넘으려면 악마의 손이라도 잡고 넘어야 한다”면서 “반공주의자 처칠 총리는 스탈린과 손을 잡고 히틀러와 싸워 이겼다”고 주장했다.(2016년 11월 25일 페이스북)

물론 박지원에게는 약점도 많다. 정치를 비즈니스처럼 하다 보니, 그에게 철학이나 역사적 의식, 즉 명분이 미흡하다. 정치는 명분과 실리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명분이 없고 실리만 취하는 정치는 ‘꾼’에 불과하다. 명분이 없는 정치는 국민의당 경선 정도의 소규모 정치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대통령선거같이 국민을 상대로 한 ‘굵직한’ 정치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1997년 DJP연대는 정치철학이 검증된 DJ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DJ에 비하면 ‘기능인’에 불과한 박지원은 어렵다.

특히 박지원의 ‘반문연대’는 명분이 약하다. 과거 DJP연합을 추진하던 DJ조차도 ‘박정희 정권 2인자와의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DJ는 이를 ‘최초의 정권교체’라는 명분으로 돌파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반문연대’에 어떤 명분을 내세울 것인가. 반문연대는 ‘지지율 10% 미만의 군소후보들이 권력을 분점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도 DJ 정도가 해야 공감을 얻지, 그가 말하면 ‘야합’ 소리 듣기 십상이다. 정청래 전 의원은 노골적으로 “문재인 세력만 빼고 온갖 잡탕 다 끌어들여 친일부패연합당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또 다른 관건은 국민의당 기반인 호남 민심이 이런 반문연대를 용인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미 국민의당 호남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국민의당 의원들은 이 점을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다. 아직 총선은 많이 남았지만 이탈 없이 당을 대선국면으로 이끄는 것이 과제다. 박지원은 올해 초 5·18민주공원을 찾아 “국민의당이 할 일은 5·18정신, 광주정신, 호남의 가치를 지켜서 호남의 몫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5공 인사’라는 원죄를 안고 있는 박지원은 호남정신을 대표할 수 없다는 원초적 한계가 있다.

현실적으로 박지원은 창당 동지이자 당의 대주주인 안철수가 반문연대에 동의할지도 의문이다. 대선 전 개헌이면 몰라도, 대선 후 개헌이면 안철수는 남경필·원희룡·손학규·유승민 등의 ‘잠룡’과 예비경선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예비경선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안철수가 이들을 뚫고 경선을 통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박지원은 현재 활동하는 정치인 중 가장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이 분명하지만, DJ에 비해 철학·의식·명분 등이 한참 뒤떨어진다. 반문연대는 박지원의 마지막 정치적 승부수일 가능성이 크다. 성공하면 그는 ‘킹메이커’로 한동안 정치적 영향력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승부수가 어긋나 1987년 대선처럼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면 그는 야당사에 ‘오욕의 정치인’으로 오래 기록될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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