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이 된 백석의 詩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원종원 2017. 1. 1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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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원의 뮤지컬 읽기-71]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이 큰 인기를 끌더니 지난 16일 열린 제 1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최우수 창작 뮤지컬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형 무대 일색에 아이돌 스타들의 등장이 없으면 힘들 것 같던 우리나라 뮤지컬 공연계에 신선한 자극이 돼 관심을 끌고 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여인의 이름과 뜬금없어 보이는 흰 동물이 정말 무대에 등장할까 궁금했다면 일단 낚였다는 말을 해도 무방할 듯하다. 물론 무대에서 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 뮤지컬 제목은 한 편의 시 타이틀을 차용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 시인이라 불렸던 백석 시인의 작품 제목이다.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북녘 시인이다. 본명은 백기행으로 훗날 작품 활동을 하면서는 '흰 돌'이라는 의미인 백석(白石)이란 필명으로 문인으로 활약했다. 유년 시절의 아호가 白石 혹은 白奭이었다는 말도 있는데, 아마도 하얀 돌이라는 의미가 뭔가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에 울림을 남겼는지, 훗날 자신의 작품에도 흰돌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 시절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오늘날 용산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의 전신이다)를 나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아오야마 학원 전문부 영어사범학과에서 수학했고,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 기자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를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의 시는 주로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한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여줬다. 전통이나 민속, 지역신, 민간신앙 등을 소재로 보통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이나 철학의 단면을 보여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북쪽 방언(혹은 토착어)을 사용해 정감 어린 표현을 즐겨 사용했는데, 뮤지컬의 제목으로 쓰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시집 '사슴'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마가리에 살자'라는 왠지 정겨워 보이는 문구가 있는데, 그 마가리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다. 마가리는 오두막의 북쪽지방 사투리이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연인 김영한과의 사연을 중심으로 줄거리를 구성한다. 가난했지만 멋쟁이 시인이었던 백석은 우연히 기생 김영한을 만나게 되고 그만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같은 고향 출신인 데다 하얗고 청초한 그녀의 이미지에 그만 마음을 뺏겨버린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백석은 좋아하는 여인들에게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즐겼다는 말도 있는데, 그는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오늘부터 당신이 나의 부인이니 우린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고 선언을 했다고 한다. 엉뚱하지만 순수한 모습에 자야는 백석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두 사람은 가난한 시인과 기녀의 동거라는 별스러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두 사람의 사랑을 질투했었나 보다. 백석 고향집의 엄격한 아버지는 두 사람의 인연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아들을 정주로 끌고 와 고향 여인과 억지 결혼식을 올리게 한다. 고향집에서 도주를 반복하던 백석은 만주로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자야에게 중국에서 만나줄 것을 당부하지만, 뜻하지 않게 남과 북으로 갈린 민족상잔의 비극에 따라 이별을 하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를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백석은 1996년 북한의 한 집단농장에서 명을 달리하게 됐고, 자야는 1999년 남한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하며 남쪽에서 살아가야 했던 자야는 사업가이자 자산가로 성장한다. 당대 최고의 요정으로 손꼽혔던 대원각을 만들어 엄청난 재산을 모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연인이 더 이상 경제적인 문제에 시달리지 않고 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돈을 모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말년에 자신의 재산을 조계종의 법정스님에게 기탁해 사찰을 짓게 한다.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이다. 한때, 종교에 귀의한 재산이 아깝지 않냐는 세상 사람들의 속된 질문에 자야는 "1000억원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대답을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뮤지컬 무대를 통해 애틋한 사연으로 되살아나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게 됐다. 정말 뮤지컬을 보고 나면 길상사를 한번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이야기와 노래가 인상적으로 무대에서 전개된다.

 소극장 뮤지컬 특유의 작지만 아담한 무대 속 이미지들은 이 뮤지컬 특유의 정서와 재미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여러 뮤지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만들어냈던 무대 디자이너 서숙진의 솜씨다. 볼거리 위주의 대형 뮤지컬처럼 무대에 변화가 많거나 쉬지 않고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순수한 사연 속 이야기에 걸맞게 마치 관객들에게 '힐링'을 주려는 듯한 대나무 숲의 이미지는 강렬한 뒷맛을 남긴다. 공연을 전후로 한 사석에서 하얀 나무들이 가득한 무대의 전반적인 비주얼은 실제하는 구체적인 장소의 무대적 재현이라기보다 백석과 자야의 마음속에 살아있었음 직한 연인들의 마음속 정원을 형상화했다는 귀띔도 들려줬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너른 평상이 있는데, 때로는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난 기방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들이 함께 기거했던 자야의 단칸방으로 변하기도 하며, 극의 마지막 종반부에는 백석이 늘 자야를 데리고 오고 싶어했던 바닷가 어느 백사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미니멀리즘적인 재미도 마음에 사무치거니와 공간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의 색채가 뒤바뀌는 극 전개는 단출한 소극장 무대의 제약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이야기에 집중시키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을 십분 발산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 속 표현들처럼, 극의 마지막 대나무 숲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소품으로 만든 눈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 숲이 온통 하얗게 비추일 정도로 환한 조명을 밝혀 눈 내리는 풍경을 묘사해낸다. 극을 따라 이야기를 즐기다 보면 어찌나 맑고 아름다운지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화려한 볼거리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극적 구성에 어울리는 무대의 시각적 효과가 얼마나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실감하게 된다.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오가며 작가, 각색가, 연출가로 활약하는 오세혁이 이 작품의 산파다. 그는 원래 백석 시인을 좋아해 가방 속에 시집을 넣어 다녔다는데, 몇 해 전 백석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이 뮤지컬의 연출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음악은 요즘 왕성한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박해림과 채한울이 참여했다. 피아노 한 대로 수수하고 담담하지만 격정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내는 별스러운 체험을 선사한다. 소소하지만 아름답고, 담백하지만 서글픈 운명적 연인의 사랑 이야기와 잘 어우러져 소극장 뮤지컬 특유의 뒷맛이 길게 남는다. 무대를 통한 '힐링'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할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좋은 창작 뮤지컬과의 만남이 반갑고 고맙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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