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이 된 백석의 詩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제목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여인의 이름과 뜬금없어 보이는 흰 동물이 정말 무대에 등장할까 궁금했다면 일단 낚였다는 말을 해도 무방할 듯하다. 물론 무대에서 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 뮤지컬 제목은 한 편의 시 타이틀을 차용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 시인이라 불렸던 백석 시인의 작품 제목이다.
백석의 시는 주로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한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여줬다. 전통이나 민속, 지역신, 민간신앙 등을 소재로 보통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이나 철학의 단면을 보여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북쪽 방언(혹은 토착어)을 사용해 정감 어린 표현을 즐겨 사용했는데, 뮤지컬의 제목으로 쓰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시집 '사슴'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마가리에 살자'라는 왠지 정겨워 보이는 문구가 있는데, 그 마가리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다. 마가리는 오두막의 북쪽지방 사투리이다.
하지만 세상은 두 사람의 사랑을 질투했었나 보다. 백석 고향집의 엄격한 아버지는 두 사람의 인연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아들을 정주로 끌고 와 고향 여인과 억지 결혼식을 올리게 한다. 고향집에서 도주를 반복하던 백석은 만주로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자야에게 중국에서 만나줄 것을 당부하지만, 뜻하지 않게 남과 북으로 갈린 민족상잔의 비극에 따라 이별을 하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를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백석은 1996년 북한의 한 집단농장에서 명을 달리하게 됐고, 자야는 1999년 남한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소극장 뮤지컬 특유의 작지만 아담한 무대 속 이미지들은 이 뮤지컬 특유의 정서와 재미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여러 뮤지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만들어냈던 무대 디자이너 서숙진의 솜씨다. 볼거리 위주의 대형 뮤지컬처럼 무대에 변화가 많거나 쉬지 않고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순수한 사연 속 이야기에 걸맞게 마치 관객들에게 '힐링'을 주려는 듯한 대나무 숲의 이미지는 강렬한 뒷맛을 남긴다. 공연을 전후로 한 사석에서 하얀 나무들이 가득한 무대의 전반적인 비주얼은 실제하는 구체적인 장소의 무대적 재현이라기보다 백석과 자야의 마음속에 살아있었음 직한 연인들의 마음속 정원을 형상화했다는 귀띔도 들려줬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너른 평상이 있는데, 때로는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난 기방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들이 함께 기거했던 자야의 단칸방으로 변하기도 하며, 극의 마지막 종반부에는 백석이 늘 자야를 데리고 오고 싶어했던 바닷가 어느 백사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미니멀리즘적인 재미도 마음에 사무치거니와 공간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의 색채가 뒤바뀌는 극 전개는 단출한 소극장 무대의 제약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이야기에 집중시키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을 십분 발산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 속 표현들처럼, 극의 마지막 대나무 숲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소품으로 만든 눈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 숲이 온통 하얗게 비추일 정도로 환한 조명을 밝혀 눈 내리는 풍경을 묘사해낸다. 극을 따라 이야기를 즐기다 보면 어찌나 맑고 아름다운지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화려한 볼거리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극적 구성에 어울리는 무대의 시각적 효과가 얼마나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실감하게 된다.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오가며 작가, 각색가, 연출가로 활약하는 오세혁이 이 작품의 산파다. 그는 원래 백석 시인을 좋아해 가방 속에 시집을 넣어 다녔다는데, 몇 해 전 백석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이 뮤지컬의 연출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음악은 요즘 왕성한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박해림과 채한울이 참여했다. 피아노 한 대로 수수하고 담담하지만 격정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내는 별스러운 체험을 선사한다. 소소하지만 아름답고, 담백하지만 서글픈 운명적 연인의 사랑 이야기와 잘 어우러져 소극장 뮤지컬 특유의 뒷맛이 길게 남는다. 무대를 통한 '힐링'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할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좋은 창작 뮤지컬과의 만남이 반갑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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