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畵 배우고 중국어 열공.. 인생2막 공부로 연다

박상현 기자 2017. 1.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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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공부에 빠진 대한민국
예술·인문학 강좌 인기..1분만에 수강 신청 마감되기도
은퇴 시기 빨라지면서 도서관 이용자 수도 꾸준히 증가

"미대생 꿈꾸다가 가정 형편 때문에 사범대로 진학했어요. 은퇴하고 여유가 생기니 젊은 시절 미련이 담석처럼 마음 한편에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걸 깨달았죠. 붓을 집어 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박은혜(가명·68)씨가 빠른 손놀림으로 누드 크로키화(畵)를 완성해 나갔다. 먹을 묻힌 검지가 지나간 자리에 조금씩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 강의실. 66㎡(약 20평) 남짓한 공간이 스케치북 펼쳐 든 수강생 20여명으로 가득 찼다. 솜씨는 서툴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진지한 분위기였다. 백발 노인부터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 크로키가 취미라는 30대까지 다양했다. 수강생 곽동성(63)씨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던 교수다. "30여년 만에 학생으로 돌아온 기분이 남다릅니다. 남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는 왜 공부하는 재미를 잊고 살았나 후회가 돼요."

대한민국이 '공부'에 빠졌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하려는 입시(入試)나 입사(入社) 공부가 아니다. 수명은 늘어나고, 은퇴 시기는 빨라지면서 '제2의 인생'을 찾아 책장 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사서 하는 유쾌한 공부

'조윤범의 파워클래식' 수강생 김익현(70)·김화선(66)씨는 은퇴한 의사 부부다. 딸 두 명을 음악가로 키웠다. 김화선씨는 "아이들 음대 보내면서도 우리 부부는 클래식 공연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학원 보낼 때까지 '예술'은 아이들 차지였죠. 자식 다 길러놓고서야 클래식 들을 시간이 생겼어요. '기왕 들을 거, 우리도 알면서 들읍시다' 남편과 상의하고서 클래식 강좌를 찾았죠." 부부는 제각각 준비해온 노트에 수업 내용을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간간이 아내의 필기를 베끼는 남편 모습이 수험생 같았다.

인문학 강좌 '발터 벤야민의 문장들'에서 만난 주부 김미정(42)씨는 "초등학생 딸아이가 공부하는 모습이 부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인문학 강좌를 찾아 들은 지는 일년쯤 됐다. "대학 때 배우던 것과 같은 내용이지만 제가 달라졌어요. 예전 시험 보려고 달달 외우던 공부는 '불쾌한 공부'였지만, 사유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지금은 '유쾌한 공부'랄까요. 공부하는 재미를 알게 되면서 딸한테도 더는 시험 성적 가지고 잔소리하지 않아요."

공부하려는 이들이 늘면서 공공 예술·교육 기관에선 인문·예술 교육 강좌 수를 늘려가는 추세다. 예술의전당의 경우 교육 강좌가 2012년 265개에서 2016년 342개로 늘었다. 수강생 수도 2012년 7790명에서 2016년 9587명으로 12% 늘었다. 선착순으로 마감되는 강좌 특성상 실제 지원자 수는 수강생 수보다 2~3배가량 많다고 한다. 인기 강좌 접수 기간엔 대학 수강 신청을 방불케 하는 '수강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예술의전당의 올 봄학기 '최욱의 현대미술' 강좌는 모집 신청 공고가 나간 지 15초 만에 마감됐고, '조윤범의 파워클래식' 겨울 특강도 마감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강연·탐방이 어우러진 국립중앙도서관의 '인문 열차, 삶을 달리다' 시리즈는 지난해 9번의 강좌 모두 1분 만에 마감됐다.

공부로 여는 '인생 2막'

도서관도 더는 수험생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균 수명이 늘고, 은퇴 시기가 빨라지면서 도서관은 인생 2막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서울 삼청동 정독도서관 열람실에서 만난 이준호(55)씨는 노트 한 바닥을 중국어 단어로 채워가고 있었다. 학창 시절 누런 공책을 영어 단어로 빽빽이 채우며 외우던 '깜지 공부법'이란다. 그는 국내 한 대기업에서 5년 전 명예퇴직했다. "마흔아홉 살 때 세운 인생 목표가 있어요. '명퇴를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만들자'는 거예요.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스타트업을 꽤 오랫동안 준비했습니다. 중국어에 능통한 신입직원을 뽑을 예정이지만, 까막눈 사업가는 안 되려고 5년째 중국어 공부에 매달리고 있어요." 그는 지난해 공인 중국어 시험 HSK에서 5급을 땄다. '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요건'으로 주로 쓰이는 급수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따르면, 이용객 수가 2012년 86만8061명에서 2016년 94만7020명으로 5년간 11% 정도 늘었다. 2013년 12월 개관한 국립세종도서관까지 합하면 전체 국립도서관 이용자 수는 2013년 83만7365명에서 2016년 181만3574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장서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한 디지털도서관 이용객 수도 2012년 21만7640명에서 2016년 32만6224명으로 50% 정도 늘었다. 조수연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는 "매년 이용자 수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걸 보면 확실히 공부가 요즘 시대 화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친 현실, 공부로 위로받다

누군가에게는 공부가 지친 현실을 버티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김민재(43)씨는 스스로를 "문학 중년"이라고 부른다. 그는 20여년 전 '문학 청년'으로 불리던 국문과 대학생이었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당시 중학생이던 남동생을 홀로 키워야 했다. 그는 신춘문예를 4개월여 앞둔 지난해 8월 '소설 스터디'에 들어갔다. 서울 신촌 한 스터디룸에 모여 짤막하게 써온 시놉시스를 서로 돌려 읽는 모임이다. 그는 "외국계 제약회사 영업직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10년 넘도록 제약회사에서 일했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난 뒤 쭉 사람 치유하는 약(藥)을 팔았지만, 제 마음은 병만 들어 갔어요. 동생이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다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죠. '갑질'하는 병원 사람들 만나도 '취재'라 생각하니 즐겁더라고요. '악역은 당신으로 정했다' 생각하면서 웃어넘기기도 하고요." 그는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가장(家長) 역할은 다 했으니 이제는 즐거운 일을 하고 싶어요. 문학 공부하는 학생으로 돌아가는 일이 '인생 2막'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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